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 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될까 ①

Gijuzzang Dream 2008. 9. 26. 00:17

 

 

 

과학으로 보는 『삼국지』 (2)

 

 

 장비의 주량은 얼마나 될까 ①

 

영웅호걸이 수없이 등장하는『삼국지』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장비의 술탐에 대한 설명이다.

유비 · 관우에 비해 명석하지는 않지만 용맹한 장비의 일화에는 술이 많이 나오는데

그와 술과의 관계는 명백하다. 장비가 술에 관한 한『삼국지』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마시는 주당이지만 술을 적절히 자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하에게 살해당하며

결국 초나라가 멸망케 되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장비는 술을 안 마실 때 가끔 명석한 두뇌를 사용하여 유비 · 관우로부터 칭찬을 받기도 하지만

과음은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장비의 죽음도 술탐에 의한 엉뚱한 사건 때문에 일어난다.

유비 · 관우 · 장비 세 명이 도원결의(桃園結義)한 후 똘똘 뭉쳐 촉나라를 세웠지만

관우가 손권에게 살해되자 유비는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손권을 총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한다.

장비도 관우가 살해되었다는데 분개하여 복수심으로 손권 공격에 앞장선다.
그러나 복수심에 너무 앞선 장비가 그만 술을 마시고 부하에게 행패를 부리다가

결국 살해당하는 것이다.

장비와 같은 대장군이 전투 중에 사망한 것이 아니라 술을 자제하지 못해 살해되어

촉나라의 작전은 엉망이 되는데 여기에서 관심사는 그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을까하는 점이다.

더구나 장비와 같은 대장군이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린다고 하는데 그 이유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신다고 해도 장비와 같이 행패나 주사를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부하들과 술을 나누어 마시다

불경의 『사분율(四分律)』에 음주에는 열 가지 잘못이 있다고 적혀 있다.

“얼굴빛이 악해지고, 기력이 약해지며, 눈이 침침해지고, 서로 성을 내고 노려보며,

쓸모없는 밭에 비용만 발생하고, 질병을 더 악화시키며, 이익을 다투고 소송을 하고,

나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가며, 지혜가 감소하고, 몸이 축이나 생명이 다하고,

만악(萬惡)의 길로 떨어진다.”

그야말로 술이 지구상에서 가장 나쁜 것 중 하나로 묘사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이 지상에서 사라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단점도 있지만 단점을 상쇄할 수 있는 장점도 이에 못지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쁠 때도 술을 마시고 슬플 때도 술을 마신다.

이처럼 양면성을 띠는 것은 술에는 인간에게 위안을 주는 특별한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중국처럼 술을 정치의 한 도구로 삼은 고대 국가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술의 제조와 연회를 준비하고 거행하는 전문기구를 설립했는데

주나라 때에는 주정(酒正)이라는 곳에서 술의 제조와 주연을 관리했으며 이들 직급은 장관급이었다.

또한 술은 문인 관료들로 하여금 대체로 격식을 갖추도록 하는 작용을 했으며

예의나 성은을 표시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술이 가장 많이 사용된 곳은 병영에서이다.

군대에서 장수와 병사간의 유대가 전투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술은 전투력 증진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술은 병영 생활에서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였고 또한 흥분제 역할을 하여 나약한 병사를 용맹하게

만들고 지친 병사들을 분발하게 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최고의 명약으로 인식했다.

역대 통치자들은 술로써 병사들을 위로하고 포상했으며 출정할 때는 술을 하사했고

개선한 후에도 술을 내려 전공을 치하했다. 이는 병사들에게 상으로 술을 내리지 않았을 때는

바로 사기가 떨어지고 일을 그르치게 될 수도 있음을 의미했다.

술이 군사 작전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되었는지는 『좌전(左傳)』의 다음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진(秦) 목공이 진(晉)을 공격할 때 공교롭게도 수중에는 술이 한 단지 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건숙(蹇叔)이 나서서 그에게 남은 술을 모두 강물에 부어버리도록 진언하여

모든 병사가 그 강물을 마시고 취했다.”

와신상담 구천

구천은 오나라의 부차에게 회계(會稽)에서 패배한 후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 복수를 다짐했고

술을 나눠 마시면서 장병의 사기를 올렸다. (자료 : 중국역사미해지미).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병사가 군주인 목공과 함께 술을 나누어 마셨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월(越)의 구천(勾踐)이 회계(會稽)의 치욕을 복수하고자 군대를 일으켰는데 술이 나누어 마시기에 부족하자 강물에 붓고 장병들에게 마시게 하여 함께 취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전쟁에서 술은 필수적인 군수품이었다.

이 전투에서는 구천이 승리했는데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에 의해 패배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임종 때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기원전 496년).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구천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외치게 했다.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가 간(諫)하는 것도 듣지 않고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구천은 회계산(會稽山)에서 부차에게 대패하자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말했으나

부차는 구천을 살려주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

회계의 패배를 상기하면서 군사를 훈련시키면서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결국 회계의 치욕으로부터 12년이 지나 구천은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는데

이때 부하들에게 술을 나누어주면서 장병들을 독려한 것이다.

장병들의 사기를 올려주기 위해 술을 나누어 마신 일화로 가장 유명한 것은

한 무제 때 흉노와의 전투에서 일어났다.

무제는 북방에서 한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는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장건(張騫, ?~BC 114)을 서역으로 파견했다.

흉노와 원수지간인 대월지와 연합하여 협공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에 쫓겨 새로 정착한 지역이 살기 좋은 곳임을 알고

굳이 강력한 흉노와 대항하려 하지 않아 한나라와 대월지와의 연합이 실패에 돌아갔다.

무제는 대월지와의 연합을 포기하고 기원전 129년부터 기원전 119년까지 10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이청, 곽거병장군에게 단독으로 감숙(甘肅)지방 하서주랑에 있던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이 지역은 추후에『삼국지』에서 대활약하는 마초(馬超, 176∼222) 등이 태어난 고향이다.

이때 무제가 장병들을 격려하기 위해 전투 현장으로 술을 보냈다.

그런데 무제가 보낸 술을 장병들이 모두 나누어 마시기에는 너무나 부족하자

곽거병은 이에 중국 고사를 떠 올리고 오아시스에 있는 물에 술을 부어 모든 장병들이 마시게 했다.

이 오아시스가 중국술로 유명한 주천(酒泉)이다.

주천은 한무제가 곽거병에 하사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한무어(漢武御) 술의 생산지로

현지인들은 술의 신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한무어를 마시는 장병들

무제가 흉노를 공격하는 곽거병장군에게 보낸 술이 적자 곽거병은 오아시스 물에 술을 부어 모두 마시게 했다. 이 오아시스가 감숙성의 ‘주천(酒泉)’ 시(市)이고 ‘한무어(漢武御)’의 생산지이다. 

 

 

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

전쟁에 관한 대하드라마인 『삼국지』에서 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관우(關羽, ?∼220)가 술이 식기 전 화웅(華雄, ?∼191)의 목을 베었다는 고사는

『삼국지』를 읽지 않은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화웅을 맞아 싸움에 나가기에 앞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조조가 관우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그러나 관우는 술을 받아 마시기 전에 먼저 말을 달려 싸움에 뛰어 들었고

그의 장담대로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와서 술을 마셨는데 그때까지도 술이 따뜻했다고 한다.

물론 이 대목은 사실이 아니다.

『삼국지』에서 화웅은 관우가 청룡도로 벤 두 번째 장수로 나오는데

중국의 정사인『자치통감』에 의하면 그는 손견과 싸우다 죽었다.

나관중이『삼국지』를 각색할 때 역사적인 사실을 오도한 부분이 많이 있다고 거론될 때

항상 나오는 대목이다.

오나라의 감녕(甘寧, ?∼215 이후)이 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위나라 진영을 급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도 술이 큰 효과를 발휘한다.

감녕이 백 명 모두에게 술 한 병씩을 나누어 주자 장병들이 서로 격려하고 분발한다.

결론은 술을 마신 장병들이 위나라의 진영을 야간에 급습하여 혼란 상태를 만든 후

백 명 모두 무사히 귀환하였다는 것이다.

술에 취한 척하여 이간책을 펼쳐 승리했다는 기록도 있다.

오나라의 주유((周瑜, 175∼210)가 술에 취한 척하며

고의로 장간(蔣幹, 3세기 초)에게 채모(蔡瑁, ?∼208 이후)와 장윤(張允, 3세기 초)의 가짜 항복문서를

노출시킴으로써 조조의 충실한 수군 장수 두 명을 힘들이지 않고 해치운다.

공융, 천하의 재사인 공융은

술과 남을 비꼬기를 좋아하여 결국 조조에게 살해당한다.

(자료 : 중국을 말한다) 

반면에 술로 인해 해를 입은 예도 적지 않다.

조조는 한나라의 헌제(獻帝)를 허창(許昌)으로 데려와 옹립한 후 매사를 본인이 직접 확인해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는데

그 중에서 단 두 사람만 조정에서 믿을 만하다고 말했다.

양문거(楊文擧, 공융<孔融, 153∼208>)와 양덕조(楊德祖, 양수<楊修, 175∼219>)이다.

 

공융(공자의 20대 손)은 술과 손님접대를 좋아하여 자주 “자리엔 손님이 언제나 가득 차 있고 술잔은 언제나 빌 틈이 없으니 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공융(공자의 20대 손)은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태중대부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어릴 때 총명하다가도 크면 별 차이가 없다”라고 그를 평가절하했다.

그 말을 들은 공융은 “그렇게 보면 대감께서는 어릴 적에 분명 대단하셨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의 나이 겨우 10여 세 때의 일이다.

그가 술과 손님접대를 좋아하여 자주 “자리엔 손님이 언제나 가득 차 있고 술잔은 언제나 빌 틈이 없으니 난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조조가 금주령을 내렸을 때 공융은 조조에게 다음과 편지를 보내어 금주령에 반대했다.

“하늘의 별은 주기(酒旗)로 명명하고 땅의 군은 주천(酒泉)으로 명명하니

이는 바로 인산 세상이 음주를 덕으로 숭상하기 때문입니다.

요임금이 만약 천 잔의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성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라의 걸왕와 상나라의 주왕 모두 색(色)으로 멸망한 것이지

술로 나라를 망친 것이 아니므로 음주는 결혼과 마찬가지로 금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공융이 자주 조조를 비꼬아 말함에도 공융의 재주를 생각하여 관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무례함을 항상 꼽아두고 있었다.

그런데 공융이 오나라의 사자를 접대할 때조차 조조를 비방하는 말을 하자 그 죄로 처형당했다.

조식의 시짓기, 재주가 뛰어난 조식은

술로 인해 결국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알려지는데 조비가 7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고 하자 그는 일곱 발자국도

끝나기 전에 시를 지었다.

(자료 : 중국을 말한다). 

『삼국지』에서 술 때문에 가장 손해를 본 사람은 조조의 셋째 아들인 조식(曺植, 192∼232)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인데 그의 수많은 공에도 불구하고 조조의 후계자가 되지 못한 것은 “타고난 성질이 제멋대로여서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으며 술도 절제하지 않았다”라는 글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조식은 본래 재주가 뛰어나고 학문에도 박식하여 조조도 총애했으며 여러 차례 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술을 끊지 않고 여러 번 실수를 했고 결국 왕권은 첫째 아들인 조비(曺丕, 187∼226)에게로 넘어간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건안(建安) 24년, 관우가 형주에서 북으로 공격하여 조인(曺仁, 168∼223)이 포위되자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南中郞將)으로 임명하여 우군을 구해오도록 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조조가 그를 불러 작전 지시를 하려고 할 때 술에 취해 있던 조식은 조조의 명을 받을 수 없었고 조조는 그를 파면한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위씨춘추(魏氏春秋)』를 인용하여 그의 형 조비가 일부러 그를 잡고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여 취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조비가 그를 함정에 빠뜨렸다는 설명이지만 여하튼 조식이 남다르게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그처럼 긴박하고 중요한 시기에 당연히 자신을 절제하면서 기회를 포착했을 것이라는 것이 배송지의 생각이다.

조식이 술을 욕심내다 일을 그르쳤다는 설명이다.

조비는 황제가 된 후에도 계속 조식을 박해했다.

조식은 조조의 25명의 아들 중 재주와 문재(文才)가 뛰어나

조비가 조식을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비는 조식을 죽일 요량으로 일곱 걸음을 걷는 사이에 시를 한 수 지으면 죽음을 면해 준다고 했다.

 

이때 조식은 잠깐 생각하더니 바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국을 끓이고 체로 걸러서 즙을 받는데, 콩대는 솥 밑에서 불타오르고

콩은 솥 안에서 흐느껴 운다. 본래는 한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어찌해 이다지도 괴롭히는가.”

조식의 시를 들은 조비도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조비가 조식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에 대한 박해는 거두지 않았다.

조식을 임치왕에서 안향후로 낮춰 봉했다.

조비가 조식을 적으로 간주하여 푸대접했지만 그는 역경 속에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많이 써냈다.

그러므로 조식은 중국 문학사상 상당히 높은 지위를 받고 있는데

특히 그의「백마왕 표에 드림」은 저명한 장편 오언 서사시로 후세의 서사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하튼 조식은 더욱 술에 빠져 마음을 달래다가

‘항상 술을 마셔도 즐겁지 않고 마침내 꽃피는 시절에 병들어 죽는구나’라고 읊은 후

4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여포도 술 때문에 화를 재촉한 케이스다.

당시 온 성에 금주령이 내려지자 그의 부장 후성(侯成, 2세기말)이 잃어버린 명마를 다시 찾은 것을

경축하기 위해 여포에게 장수들과 함께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여포가 불같이 화를 내며 “네 놈들이 술을 빌려 날 배신하려는 거냐”고 후성을 크게 질책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후성은 장수들과 모의하여

여포의 책사인 진궁(陳宮, ?∼199), 고순(高順, ?∼199)을 사로잡아 조조에게 바쳤고

결국 여포는 조조에게 처형되었다.

- 참고문헌
『중국의 술 문화』, 허만즈, 에디터, 2004
『중국을 말한다(7)』, 구청푸 외, 신원문화사, 2008
『제갈량 문화유산 답사기』, 제갈량편집팀, 에버리치홀딩스, 2007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 mystery123@korea.com

저작권자 2008.08.11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