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인생의 당락, 출세를 위한 교육의 길

Gijuzzang Dream 2008. 9. 6. 02:45

 

 

 

 

 

 

 

 

 

   

유자(儒者)들에게서 출세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것이다.

입신출세하여 이름을 남기는 것은 유자의 본업이라 할 수 있다.

입신출세하여 관인(官人)이 되어야 치인(治人), 신민(新民)의 대학지도(大學之道)를 행할 수 있으니

무릇 선비 된 자는 모두 이를 지상과제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출세의 주 통로가 과거(科擧)이니

학교교육 또한 과거에 매이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와 출세, 그리고 학교교육의 관계를 조선조의 퇴계나 율곡과 같은 선조들의 생각을 통해 알아보자.

 

 

조선조 학교 체제는 중앙의 성균관을 비롯하여 사부학당과

지방의 향교로 이어지는 관학 체제와 서원 등으로 대표되는

사학 체제가 있었다.

성균관이나 서원은 주로 문과 초시 합격자인 생원과 진사들이

입학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으며,

향교나 사부학당은 중등 정도, 서당은 초등 정도의 교육기관으로

원칙상 천민이 아니면 입학이 가능했다.

그리고 왕실 자제를 위해서는 종학(宗學)이라는 별도의 종실교육기관을 두기도 했고,

역관 · 의관 · 율관과 같은 기술직에 종사하는 중인 이하의 사람들을 위해서는

소관 아문에 전문교육기관을 두기도 했다.

즉 역관은 사역원, 의관은 전의감과 혜민서, 천문관은 관상감 등에서 양성하였으며,

오늘날 예술인이라 할 수 있는 화관은 도화서, 악관은 장악원 등과 같은 해당 관청의 부서에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보면 조선시대에는 교육체제가 잘 완비되어 각자의 신분에 맞게 학교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으나 실제로는 경제적인 사유나 신분적인 사유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특히 인구의 절반인 여성은 아예 학교교육 대상자가 아니었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회적인 활동을 제한받았다.

이렇게 신분제가 엄격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태어나 사회적으로 출세를 한다는 것은

개인을 넘어 누대에 걸친 가문의 영광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학교교육은 그 어느 것이든 심지어 문자계몽기관이었던 서당까지도 은연중에

출세의 거의 유일한 통로인 과거 합격을 교육의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고

이는 오늘날 유치원까지 명문대 합격을 교육 목표로 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오늘날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지만 과거합격을 하는 것은 더 어려웠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대과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까지는 소과 초시와 복시,

대과의 초시와 복시에 각 초장, 중장, 종장 등 9회의 시험을 거쳐야 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온갖 요행수와 부정행위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진풍경이 벌어지는 과거장의 이모저모


과거 풍경에 대해서는 조선조 마지막 과거에 참여한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래 과장(科場)에는 노소도 없고 귀천도 없이 무질서한 것이

유풍이라 한다. 또 가관인 것은 늙은 선비들의 걸과(과거에 급제 시켜달라고 비는 것)라는 것이다. 둘러 느린 새끼 그물 구멍으로 모가지를 쑥 들이밀고 이런 소리를 외치는 것이다.

‘소생의 성명은 아무이옵는데 먼 시골에 거생하면서 과거마다

참예하였사옵는데 금년이 일흔 몇 살이올시다.

요다음은 다시 참과 못하겠사오니

이번에 초시라도 한 번 합격이 되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 모양으로 혹은 큰 소리로 부르짖고 혹은 방성대곡도 하니

한끝 비루도 하거니와 또 한끝 가련도 하였다.”

 

사실 이날 백범 자신도 자신의 글방 선생이 대신 글을 짓고

또 다른 접장이 대필하여 답안을 내었는데

자기 이름이 아닌 자신의 아버지 이름으로 내었다.

자신보다 아버지가 급제하였으면 하는 ‘효심’이 발동하였던 것이며,

상민이었던 가문을 일으켜 보자는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나’는 가문의 일원, 신민의 일원으로

존재하였기에 나의 출세는 가문의 출세이며,

나의 공부는 가문의 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율곡 선생은 말한다.

 
“옛날 배우는 자는 벼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이 성취되면

위에서 천거하여 쓰는 것이니, 대개 벼슬은 남을 위한 것이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과거로 인재를 뽑게

되므로, 비록 천리(天理)를 통하는 학문과 인간에 뛰어난 행실이 있어도

과거가 아니면 출세하여 도를 행할 수 없으므로,

아비가 자식을 가르치고 형이 아우에게 권하는 것이 과거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선비의 풍습이 버려짐이 이 과거 때문이다.”

 

즉 과거가 거의 유일한 통로로 되어 있으니 선비인 이상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두고 아무리 응시자의 답안을 가리고,

답안을 새로 베껴 부본으로 채점하고,

과장에서 몸수색을 철저히 해도 부정행위는 생길 수밖에 없고,

예상문제집인 초집(抄集)은 유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냐 학문이냐, 그것이 고민이로다

 

인간은 누구나 소속의 욕구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소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도 있다.

출세하여 관인이 되어 조직 생활을 하게 되면 일정한 명예가 따르고 권력과 경제적인 부도 따르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생활을 동경하고 이를 위해 한평생의 수고도 마다 않는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출세의 허망함을 깨닫고 탈출을 시도하고

그들만의 새로운 교육공동체 건설을 시도 한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출발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교육혁신 운동은 시험에 매인 공부가 아닌 자신을 위한 공부,

즉 위기지학(爲己之學) 한 번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완전히 과거를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과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제자나 자제들이 과거를 응시하는 것을 적극 돕기까지 하였다.

 

퇴계가 누구인가?

조선조 대표적인 학자이자 교육자가 아닌가?

그런 퇴계도 아들과 손자의 과거 합격을 위해 노심초사하며 심지어 손자의 과거답안지를 보며 잘잘못을 꼼꼼히 지도해주기까지 하였다.

오늘날의 논술 첨삭지도인 셈이었다.

 

그리고 과거를 앞두고는 입시 대비 특강 같은

거접(居接)을 위해 자신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곳까지 유학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퇴계의 행동을 두고 어떤 이는 자기모순이 아닌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퇴계가 자손들에게 과거를 권한 것이 명리를 탐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고

제자들 가운데서도 퇴계의 지도로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다수 있었으니

퇴계가 모순되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과거릍 통해 출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향촌사회에서 착수한 이가 퇴계였다.

율곡도 과거가 사습(士習)을 흐려놓는다고 개탄한 것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럼에도 율곡 자신이 과거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서는 생계를 위해서라고

떳떳이 말하고 있다.

다른 재주가 없으니 이 길로 부모도 봉양하고 자신도 먹고 살아야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때문에 위기지학을 할 수 없다’며 과거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고

그렇다고 학문다운 학문도 제대로 하지 않는 ‘어중개비’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격몽요결』의 말미에서 율곡은

“요새 사람들은 과거 공부한다면서 공명도 못 이루고 학문을 한다면서 실제는 착수도 하지 않는다.

과거 공부를 하라 하면 ‘과거 공부 때문에 참다운 공부를 못한다’고 하여

미루기만 하여 유유히 날짜만 보내니 마지막에는 과거도 학문도 다 이루지 못하니

늙어서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라고 하였던 것이다.

 


출세의 통로일 수밖에 없던 조선의 교육

 

조선조의 학교 교육이 출세를 위한 교육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관학의 교육목표가 관인양성이었음을 생각할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과거 이외에 출세의 다른 통로가 없으므로 개인은 오로지 과거에 한 평생을 바쳐야만 했고,

그 결과 얻은 관직에 그들은 하나의 직업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관인이 되는 것은 권력을 얻는 것이며, 모든 것을 얻는 것이 된다.

역으로 출세하지 못한 자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 된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는 출세의 사다리다.

이 사다리에는 오늘도 수많은 ‘학생’이란 이름의 사람들이 매달려 있다.

예전에는 한 번 올라가기만 하면 몇 대에 걸쳐 온 집안이 ‘은택’을 입을 수 있었지만

요즈음은 올라가기도 힘들지만 올라가도 또 다른 사다리가 기다리고 있으며,

몇 대는커녕 자기 당대도 보장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 대한 ‘신앙’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있다. 

- 안경식 부산대 사범대학 교수
- 사진 / 남정우, 한국관광공사, 유교문화박물관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