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부석사 - 중세 사원건축의 역동적 외부공간

Gijuzzang Dream 2007. 11. 9. 21:43

 

 

 

 

 

부석사, 중세 사원건축의 역동적 외부공간 

 

 

 

봉황산 부석사

 

태백의 본줄기인 봉황산에 터잡은 부석사는

일찍이 이 땅에 화엄 사상을 꽃피운 의상과 그 제자들의 수련 도량이었다.

더구나 건축사에서 주목하는 고려시대의 두 건물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품에 안고 있는 절,

불교미술사상 가장 오래된 벽화를 간직하고 있는 절,

석굴암 본존불상 계열의 고려시대 소조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절로 이름이 높다.

학술적 의의 때문이라면 찬사를 받아야 할 절은 부석사 말고도 많으나

이 땅에서 건축을 배운 모든 이들이 가장 뛰어난 건축으로 부석사를 꼽는 데 망설이지 않는 것은

부석사야말로 자연과 건축적 공간의 조화를 탁월한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빼어난 산세와 포용력있는 계곡이 산의 깊이를 자랑하는가 하면

절은 이 공간을 한결 더 깊은 사색의 장소로 경영한다.

공간 경영의 원리를 찾아 나서는 건축적 산책은 부석사의 아름다움의 원리를 밝히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 건축의 구성원리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건축적 산책과 시지각적 체험

 

불교에 친숙하지 않은 이에게 절은 낯선 환경일 수밖에 없다.

가람배치의 여러 형식을 익히 배워 아는 사람도

처음 가보는 절의 다양한 시설들이 어떠한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지를 알기란 쉽지 않다.

이때 배치도나 조감도를 보면 마치 약도를 보는 것처럼 가야할 곳과 이르는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어느 절에나 입구쯤에 '사찰안내도'란 이름의 조감도를 세워놓고 있으며 부석사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조감도는 어디까지나 새가 공중에 떠서 내려다 본 구도대로 표현한 것이기에

인간의 동선(動線)에 따른 시각체험과는 전적으로 무관한 것이다.

만일 앞 산에 올라가 내려다볼 수 있는 경우에는 새처럼 절 전체를 부감(俯瞰)할 수 있을 것이나

부석사 주변에는 애석하게도 절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장소가 없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산비탈을 오르는 동안 눈 높이에 맞추어 기대에 찬 눈으로 하나하나 올려다보며

새로이 나타나는 장면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수고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산책을 통해서만 건축적 산책의 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곳,

바로 부석사이다.

 

절을 찾은 배관자(拜觀者)는 부처의 세계가 마련된 곳을 향하여 올라가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하나하나 의미심장하게 여기며 그 모든 장면을 눈속에 담으려 한다.

그러나 연속적인 움직임 속에서는 모든 장면을 다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불자(佛者)가 아니더라도 숨가쁜 발걸음이 조금 보폭을 달리하는 곳 즉,

운동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 곳, 수평이동에서 수직이동으로 다시 수평이동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의미 있는 대목으로 삼아 마디마디에서 고개 숙여 합장하고 고개 들어 심호흡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순례행의 길목마다 쉬어가는 계기적(繼起的)인 운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숨을 고를 때마다 시야에는 획기적인 장면들이 전개되지만 그 장면을 해석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부석사를 만든 사람, 한 채 한 채의 건물을 바로 그 자리에 배치한 분의 의도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시각적 관찰을 통하여 그 의도를 해석해낼 수 있다면

부석사 건축을 담당한 수많은 승려 목수들의 디자인 목표를 대체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신라시대 석축과 그 위에 세워진 조선중기 이후의 목조건물이

시대라는 벽을 넘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는 감동을 지나 무한한 존경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석사 전역이 어느 한 천재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라

누적된 전통의 산물이라는 데에도 큰 경의를 보내야 할 것이다.

 

 

절을 향해 나아가면

의상 창건 당시에는 부석사 경내에 불탑을 세우지 않은 채

아미타불상을 봉안할 초가집만 짓고 제자들에게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부석사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는 대석단(大石壇)이나 무량수전 주위의 석탑, 석등,

입구의 당간지주 등은 화엄종이 크게 중흥되었던 신라 하대 경문왕때(861∼874) 중창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중창된 부석사의 출발점이었던 당간지주로부터 무량수전까지 이르는 길에는

대석단과 가파른 계단 그리고 여러 겹의 문(천왕문)과 문루(범종루와 안양루)가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부석사 건축군에 질서를 부여하는 율선(律線)으로서의 축(軸)은

진입부에서 범종루를 지나 안양루 내부 계단을 잇는 제1축(南西向)과

무량수전과 석등 및 안양루 일곽을 조율하는 제2축(南向)으로 구분되어 있다.

두 축은 안양루에서 무량수전 마당으로 오르는 계단 지점에서 30°정도의 각도를 유지하며 만난다.

즉 그곳이 방향을 달리하는 두 축의 교차점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축은 부석사 경내의 시설을 조율하는 건축공간의 축이라는 의의를 넘어서

앞산 봉우리와 연결되는 자연의 축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무량수전 일곽은 향우측(向右則)으로 뻗어 나온 안산(案山)을 향하고,

범종각―천왕문 축은 도솔봉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도솔봉이라는 이름을 비롯하여 주변 산에 주어진 연화봉, 비로봉 등의 이름이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 두 축의 존재가 배관자(拜觀者)에게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부석사를 설계한 사람이 자연의 축을 염두에 두고 배치를 결정했다는 뜻일 뿐이다.

그렇다면 배관자가 부석사에서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질서는 어떤 것일까?

 

 

불국(佛國) 형성의 의지

부석사의 일주문, 천왕문, 대석단, 범종루, 안양문은 그 자체가 시각적 장면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장면 연출의 시각적 프레임이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의 문틀, 범종루나 안양루의 마루밑 출입구는

마치 카메라의 파인더처럼 대상의 가시적 윤곽을 한정하는 틀로 작용한다.

이때 문틀이 내부의 세계(안마당)를 어떻게 조절하고 있는가를 해독하는 것이야말로

건축적 산책에 나선 우리들의 임무이다.

 

사찰안내도를 왼쪽으로 끼고 경사로를 오르면 멀리 봉황산을 배경으로 선 일주문이 나타난다.

'태백산부석사'라 쓴 현판을 내건 일주문(1980년 新建)의 문틀 사이로 휘어진 황토길이 미리 보인다.

일주문을 통과해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목에 이르면

당간지주(통일신라, 깃대를 세워 깃발을 매달았던 시설)와 천왕문(원래 일주문 자리에 1980년에 재건)이

예기치 않게 등장한다. 당간지주의 횡장축(橫長軸)과 천왕문의 종심축(縱心軸)이 만나는 교차점 위에 서서

바라보면 문의 왼쪽은 산으로 막히고 오른쪽은 하늘로 트여 있어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유도된다. 문틀 사이로는 흰 색의 계단이 보여 다음 경로를 암시한다.

천왕문 아래 계단에서 보면 문틀은 틈새처럼 작아졌다가 축대 위에 서면 갑자기 실제 크기로 확대된다.

문틀 안으로는 끝없이 연속될 듯한 계단이 약간 오른쪽 방향으로 비스듬히 보인다.

문의 중심에서 내다보면 이미 석축(石築)과 계단이 온통 모습을 드러낸다.

석축 위에는 아무런 시설도 보이지 않고 왼쪽으로 산봉우리만 슬쩍 걸쳐져 보인다.

 

계단 밑에 서서 가파른 계단을 올려다보면 건물 지붕의 꼭지가 마치 축대 가장자리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축대 위 50m 쯤 뒤에 서 있는 범종루의 합각지붕 용마루 망와이다.

가파른 돌계단과 대면한 채 돌의 물성을 느끼며 축대 위로 오른다.

시선이 석단을 벗어나자 일찍이 암시되었던 범종루가 자태를 드러낸다.

그뿐만이 아니다. 범종루 왼쪽으로 무량수전이 처음으로 모습 일부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남은 계단을 마저 올라가면 범종루를 중심에 두고 3단으로 분절된 깊고도 평활한 대지가 펼쳐진다.

숨차게 가파른 계단을 오른 뒤에 긴 호흡이 필요하다는 것을 고려한 배려로 해석된다.

범종루 앞 계단에서 마루밑 통로를 보면 계단과 가는 틈새창이 어두움 속에 들여다보인다.

누 밑으로 몇 걸음 옮기면 전혀 예기치 못한 놀라운 장면이 출현한다.

대석축(大石築) 위로 안양루(2층, 중심), 무량수전(왼쪽), 3층석탑(오른쪽) 등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감추어졌던 불세계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누각 밑에서 맞이하게 될 줄 어찌 짐작이나 하였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부석사의 건축가가 의도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한 번의 클라이맥스로 끝났다고 속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직 아미타여래의 극락세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엄불국토인가 아미타정토인가

 

마침내 극락정토의 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안양루 계단 앞에서이다.

안양루 출구를 통하여

중심축에서 약간 왼쪽으로 이동 배치된 석등(石燈)의 상부와 무량수전이 보이는 것이다.

안양루 바로 밑까지 올라가 누 밑을 보면

열린 창의 왼쪽으로 석등의 팔각 기둥, 오른쪽으로 무량수전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침내 무량수전 마당에 올라서면 석등 뒤로 무량수전의 정면이 거의 다 보이지만

현판의 글씨는 석등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석등 전면 배례석 앞에서 합장한 채 불집창 사이로 보면 무량수전 현판이 고스란히 그 안으로 들어온다.

참으로 놀랍다. 아미타불을 찾아 온 건축적 산책은 이로써 목표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대단원의 막은 무량수전 내부의 아미타불을 배관하고 나와

아미타불이 바라보고 앉은 위치에 세워진 3층석탑 자리에서 뒤돌아 서서 사바세계를 내려다 볼 때,

구도와 탐승의 자세를 견지하며 올라온 모든 길을 잊을 때쯤 내려진다.

 

이제까지 일주문에서 무량수전까지의 공간구성을

진로축 위의 시점과 배관자의 시선 및 문틀의 한정 작용으로 설명하였다.

그 결과 치밀한 설계에 의한 조화가 신라건축과 조선후기 건물 사이에 실현되어 있음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간의 유도, 장면의 암시, 막고 트는 기법, 장면의 시각적 균제 등이

부석사에서 극도로 정밀하게 구사되고 예술적으로 높은 경지를 획득하였음은 물론이다.

 

부석사에서 실현된 이와 같은 높은 예술성이

화엄사상이나 극락정토 신앙 어느 쪽과 더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는지는

이러한 발견 위에서 다시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추녀끝 풍경 소리로 바람의 존재를 인식하고,

누각 밑 그림자로 빛의 존재를 깨닫듯이 시지각적 장면 전개의 공간구성 수법을 알고 나서야

부석사의 진가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리라. 

[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이강근 교수]

 

 

 부석사 

 

 그림처럼 깔린 오색 낙엽 안개비에 촉촉이 젖은 듯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늦가을 성스러운 순례

 

 

며칠 전에 꽤나 흥미로운 ‘사건 기사’가 어느 일간지에 게재되어 이를 따로 메모해 몇 번이고 읽어보았다. ‘사건 기사’의 특성상 매우 건조한 문장으로 기록돼 있었지만 마음에 남은 인상은 제법 컸다.

그 내용은 이렇다.

어느 예비역 해병과 현역 해병이 대낮에 술집에서 선후배 기수를 따지면서 주먹다짐을 벌이다 입건됐다는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서울 중부경찰서는 11월2일 군대 선후배 사이를 따지다 싸움을 벌인

강모(23) 씨를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하고 김모(20) 상병 등 현역 해병 세 명도

헌병대에 인계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공교롭게도 군기가 세고 훈련 강도도 높고

그 때문에 동기간이나 선후배 간에 ‘남다른’ 감정을 교감하는 게 오랜 전통이 된

‘해병대’ 선후배다. 해병대를 전역한 선배 강씨는 을지로 맥줏집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 있던 현역 일행과 패싸움을 벌이게 되었는데, 그 까닭인즉

“해병대 몇 기냐?”고 묻자 김 상병 등이 “몇 기면 뭐 할 건데?”라고 응수한 것이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강씨는 경찰에서 “후배들이라고 생각해 말을 붙였는데,

건방진 대답이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고 한다.

 

신경숙의 ‘부석사’엔 부석사 가는 여정 담겨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당사자인 강씨의 마음을 짐작해보았다.

아마도 반가웠을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 시절에 겪은 추억이 떠올랐을 것이고,

혹독한 훈련 과정에서 동료들과 깊은 정을 나누던 기억들이 새삼 술잔을 그러쥐게

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 아마도 강씨의 추억 속에는, 현역 시절에 휴가를 나왔다가

“해병대 몇 기냐?”고 물으면서 시원하게 술값을 대신 내주던 이름 모를 군 선배의

행동도 떠올랐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바로 그런 마음으로 후배가 되는 현역들에게 어쩌면 술 한잔 사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배반당했을 때, 그는 단지 후배들의 동만 거슬렸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추억마저 잠시 금이 간 듯한 감정에 빠져들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바로 그런 존재인 것이다. 깊은 밤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단독자가 된다.

단독자로서 인간은 참아내기 어려운 지극한 고독감에 자주 사로잡힌다.

그래서 그는 좀더 넓은 ‘전체로서의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런 전체의 삶 속에 자기 자신이 놓여 있을 때,

그리고 그런 감정을 누군가와 교감하게 될 때, 진실로 마음의 위로를 받게 된다.

 

이런 점에 대하여 김우창 선생은 큰 세계 속에서의 작은 삶이라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은 자신의 삶이 큰 것에 의하여 정당화되고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탈출이 절실해지는 것은

자신의 작은 삶이 괴로운 것이 되고,  그것을 지배하는 큰 것들이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지 않을 때다.

이때 탈출과 도약을 약속하는 것이 광신이고 이데올로기이고 돈이고 판타지다.

세계에 열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인지할 만한 세계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작은 삶에 충실하는 것 - 이것이 좋은 삶일 것이다.”

 

2001년 제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신경숙의 소설 부석사는 바로 이 같은 삶의 소중함과

그러한 삶이 좀처럼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발생하는 기이한 애틋함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의 어느 1월1일에, 

‘나’는 부석사에 가기 위해 인사동 한 카페에서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같은 오피스텔에서 사는 이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연에 의하여 상처를

많이 받았다.

그래서 문득 부석사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용이하지 않다.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떠났는데, 예기치 않게 길을 잃고 목적지인 부석사에는 이르지 못한다.

 

‘나’와 ‘너’의 단절을 의미하는 부석사의

‘떠 있는 돌’의 이미지가 반복되면서, 소설은 부석사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혹시 그곳에

이미 도착했을지도 모를 ‘나’의 상념으로 끝이 난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마음뿐이었다.

어깨가 내려앉는 듯한 피로에 점령되어 그는 점점 잠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녀는 보온통을 기울여 종이컵에 커피를 따른다.

부석사의 포개진 두 개의 돌은 닿지 않고 떠 있는 것일까.

커피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다.

그녀는 문득 잠든 그와 자신이 부석처럼 느껴진다.

지도에도 없는 산길 낭떠러지 앞의 흰 자동차 앞유리창에

희끗희끗 눈이 쌓이기 시작한다.”

 

이 소설의 세부 사실은,  순흥면에서 태어났고

부석면에 큰집 어른들이 여태 살고 있는 나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허술해 보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같은 책에 의하여,

그리고 지방자치단체마다 적극적으로 문화관광을 추진해온 저 90년대 이후로

영주, 순흥, 봉화 그 어디의 작은 도로일지라도 ‘부석사’로 향하는 이정표를

찾지 못할 까닭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설 속 인물들이 길을 잃고 말았다는 설정은

그곳을 고향으로 하는 내게 조금 낯설어 보였다.

 

그러나저러나 이 소설이 ‘큰 세계’와 일치하는 작은 삶은 고사하고,

바로 곁에 서 있는 사람과의 친밀했던 감정마저 일순간에 붕괴되고 마는

오늘의 우리 일상을 적절히 스케치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앞에 언급한 책에서 최순우가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고 묘사한

바로 그 부석사에서 옛사람들의 종교적 미의식을 환기하는 것은,

우리네 삶이 결코 단속적이지 않으며

저 유장한 세월의 흐름 속에 있음을 재확인하는 성스러운 순례가 되는 것이다.

 

 

시 ‘그리운 부석사’에 깃든 절실한 감정의 울림

 

늦가을 아닌가.

지금 이 시절이라면 부석사에 오르는 길의 은행잎은 다 떨어지고 말았겠지만,

그 나무들의 행렬은 여전히 반듯하고, 마침내 무량수전 앞에 이르러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과 그 아래 준령들의 흐릿한 그림자를 바라보는

늦가을의 순례 속에서, 우리는 필경 정호승 시인이 시 '그리운 부석사'에서 호소한

바와 같은 절실한 감정이 아직은 저마다의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바로 곁에 선 사람과 무언의 감정을 교감하면서

어떤 조화로운 전체 속에서의 ‘작은 삶’이 주는 위안을 얻는 것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마지(摩旨)를 올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 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주간동아, 2008.11.18. 661호(p68~70), [정윤수의 人文기행 29 / 부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