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 신윤복 '사시장춘'의 신발
남녀의 모습 하나 그리지 않고 표현해 낸 에로티시즘의 진수 | |
동양화에서는 달을 그리지 않는다?
수묵으로 색의 농담을 조절하는 까닭에, 서양화에서처럼 달을 '직접' 그릴 수 없다. 게다가 달은 흰색이다.
수묵으로 흰 달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신 달에 해당하는 공간만 남겨둔 채, 나머지 부분에 구름을 그려서 달을 드러내면 된다.
간접적이다. 그러니까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 표현하지 않고, 주변의 것을 통해 감춰진 본질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것을 '홍운탁월법(烘雲託月法)'이라고 한다.
'사시장춘'은 에로틱한 춘정을 홍운탁월법으로 구현한 빼어난 춘화도다.
따라서 남녀의 모습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즉,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구름'만 치밀하게 그려두었다. 그럼에도 에로틱한 '달'은 감상자의 마음에 둥실 뜬다.
노골적인 표현 하나 없이 에로티시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산수화 속에 숨긴 춘화 멀리 계곡과 폭포가 있는 어느 산기슭. '모텔' 같은 집에 술 쟁반을 받쳐 든 계집종이 엉거주춤 서 있다. 쪽마루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놓였고, 기둥 뒤에는 봄날을 암시하듯 꽃이 활짝 피었다.
이것이 내용의 전부일까? 아니다. 그림의 속내는 '숨은 그림'처럼 감추어져 있다.
단순히 이상향이나 봄이 정취를 그린 산수화가 아니다.
봄을 빙자한 노골적인 춘화다.
오른쪽 상단의 계곡은 좁고 깊다. 그 위쪽이 약간 검은 색을 띤다. 숲 같다. 계곡과 숲, 무슨 의미일까? 여자의 성기다. 그러고 보면 왼쪽에 방문을 살짝 가린 나뭇가지의 폼이 수상하다.
잎이 장비의 수염처럼 빽빽하고 거칠다. 바로 남자의 음모다.
절묘하게도 계곡을 향해 뻗어 있다. 비교적 겉으로 드러난 에로틱한 장치들이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신발의 배역을 아주 뜨겁게 만든다.
절묘한 포즈로 말하는 신발 그림의 중심은 장지문 너머 방 안에 있다. 시선의 흐름도 그렇다. 계집종의 시선은 신발을 향하고, 신발은 장지문을 향한다.
하지만 이 좋은 봄날, 방문이 굳게 닫혀 있다. 왜 그럴까? 방 안은 어떤 상황일까?
짐작 가능한 단서가 하나 있다. 남녀의 신발이다. 결정적인 단서다. 오른쪽의 붉은 가죽신은 여성용이고, 왼쪽의 검은 가죽신은 남성용이다.
신발이 이른바 '명품'이다. 남녀가 보통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신발이 마루에 놓여 있는 것부터 이상하다. 신발은 원래 마루 아래 있어야 한다. 가죽신이 귀한 명품이어서 마루에 올려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이는 신발이 비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것처럼 남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신발의 포즈에는 긴박한 상황이 담겨 있다. 두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하지 않다. 여자의 것은 가지런한 데 비해, 남자의 것은 한 짝이 비뚤게 놓여 있다.
이 흐트러진 포즈는 무얼 의미할까? 남자가 급했던 것 같다.
신발을 반듯하게 챙겨두지 못할 정도로 몸이 달아, 여자를 데리고 급하게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비뚤어진 왼쪽 신발 한짝이 상황을 실감나게 증언한다.
게다가 기둥 쪽에 흐드러지게 핀 꽃이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방안의 후끈한 열기를 전한다.
만약 남녀의 신발이 '가지런하게' 놓였다면 에로틱한 감정은 덜했을지 모른다.
댕기머리를 한 어린 계집종의 자세도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쟁반을 들고 가다가 엉거주춤 멈춰 서 있다. 쟁반에는 술병과 술잔 2개가 얹혀 있다.
장지문 안쪽에서 나는 야릇한 소리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폼이다.
그러고 보면 이 그림에는 두 개의 소리가 들어 있다. 계곡의 폭포소리와 방안의 교성이 그것이다.
모두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계집종은 쟁반을 든 채 들어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춘화의 절정
![]() 방안의 분위기를 암시하는 또다른 장치는 주련이다.
장지문 옆 기둥에 '사시장춘(四時長春)'이라고 적혀 있다.
사시장춘은 일년 내내 늘 봄과 같다, 혹은 한결같다는 뜻이다.
남녀의 춘정을 '영원한 봄날'로 해학성있게 표현했다.
이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낙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것으로 추정하는 '전칭작'이다.
전칭작이란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라는 뜻이다.
혜원의 낙관은 후대에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
농밀한 춘의가 벚꽃처럼 만개한 '사시장춘'은
남녀의 얼굴도, 알몸도 보여주지 않고 에로틱한 감정과 춘화의 관음증을 극대화하고 있다. - (주)아트북스 대표,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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