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글과 그림을 완성시키는 배첩 - 배첩장, 김표영

Gijuzzang Dream 2008. 8. 5. 15:51

 

 

 

 

 

 

 글과 그림을 완성시키는 또 하나의 예술 배첩

 김표영. 중요무형문화재 102호 배첩장

 


이 세상에 오래 묵은 것의 지혜를 당할 것은 없다. 

또 다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생성의 시간,
기다리고 또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배첩과 함께 시작된 인생

그 때 나는 예술이 무엇인지, 문화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열여섯 살 소년이었다.

우연히 사촌 형님의 작업실에 들렀다가 알게 된 배첩.

그림과 글자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지켜보다가

나는 그 길로 인생을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60여 년.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전쟁을 힘겹게 치러내면서도

나는 한 번도 배첩이 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배첩은 글과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서화에 종이나 비단을 붙여 족자나 액자, 병풍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서화의 뒷면에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배첩은 예술 작품과 문화재의 미적 가치와

실용성, 보존성을 높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개 표구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일본식 명칭이고

한국의 것은 배첩이다.

 

이미 조선 초기에 도화서에 화원 말고도 배첩장이 있었을 정도로,

한국의 배첩은 역사가 깊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이나 다름없는 배첩장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혜로운 풀 이야기

이 세상에 오래 묵은 것의 지혜를 당할 것은 없다.

오래된 바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쓰다듬었고, 오래된 물은 세상의 구석구석을 흘러 다녔으며,

오래된 사람은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래서 나는 한지나 비단을 붙이는 작업을 할 때 오래 묵은 지혜의 풀을 사용한다.

 

이 풀을 만들기 위해 들이는 긴 시간은

자신의 몸을 삭혀 또 다른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생성의 시간이다.

그 시간은 5년이어도 좋고 10년이어도 좋다. 풀 쑤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릴 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옹기에 밀가루와 물을 섞고 삭히기 시작한다. 가끔 물만 갈아주며 보관하노라면

자연스레 박테리아가 모여들어 밀가루에 있는 영양분을 모두 빨아 먹는다.

퀴퀴한 냄새 풀풀 나는 옹기 안에는 기다림으로 몸을 삭히며 분해된 결정체만이 남는다.

남은 밀가루를 고운체로 걸러 말린 뒤 필요할 때마다 꺼내 풀을 만든다.

이 풀을 사용하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좀이 슬지 않는다.


새 생명을 불어 넣는 행복

한지의 섬유질 하나하나를 타고 나의 소망은 피어오른다.

바람이 불어와도 나를 잊으라 했다.

꽃이 필거라 소식을 전해와도 더 이상 나를 찾지 말라 했다. 나의 영혼은 이미 사로잡힌 뒤였다.

 

나의 섬세한 손길을 따라 예술 작품과 문화재들은 다시 태어났다. 그들이 다시 태어날 때마다 나의 영혼도 다시 태어났다. 손상된 지류문화재 복원은 나의 혼을 걸고 벌이는 싸움이었다.

 

마른 꽃잎처럼 부스러지는 종이 속의 유물,

행여나 숨결에라도 부서질라 떨리는 손끝을 다스리며 마음을 모았다.

잘못 복원하면 자격을 모두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살 떨리는 순간을 이겨내기도 했다.

 

고서화 배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본을 최대한 살려 유일무이한 예술품의 생명을 정성껏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배우는 게 많다. 사람들이 손봐달라며 좋은 작품을 많이 가져온다.

좋은 작품을 자꾸 보다보면 작품을 보는 안목이 생겨 이제는 매화도 하나쯤은 너끈히 그린다.

나는 이 행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다.
- 이지혜 / 사진, 이은영
-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