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실크로드

Gijuzzang Dream 2008. 8. 13. 11:33

 

 

 

 

 역사의 길목에 핀 화려한 사막의 꽃…실크로드

 

 

 

수천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끊기지 않고 살아 있는 길 ‘실크로드’.

매일 바람에 따라 모래언덕 모양이 바뀌어 높이를 알 수 없는 밍사산,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가오 굴,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가오창 고성과

「서유기」에서 우마왕이 삼장 법사일행을 불길로 막았던 훠옌산 등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실크로드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도 역사 속 주인공이 된다.

 

 

변화의 기운이 움트는 땅

 

1980년 일본 NHK는 다큐멘터리 ‘실크로드’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름답고 화려한 사막과 역사의 길목에 터를 박고 사는 사람들….

실크로드가 먼 옛날에나 존재했던 역사 속의 길이 아니라

아직도 완전히 끊기지 않고 살아 있는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실크로드를 꿈꿨다. 물론 당시에 중국은 공산국가였고, 여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요즘은 많이 변했다. 4월이면 겨우내 막혀 있던 파미르 고원 길도 열린다.


실크로드의 역사는 2천1백년이나 된다.

후한(後漢)의 장건 장군이 흉노의 침공으로 골머리를 앓던 한무제의 명을 받아 정벌에 나섰다가

포로가 됐으나 탈출해서 중앙아시아 오지의 교통로를 알렸다.

이 지역이 시안과 로마를 잇는 실크로드가 됐다.

AD 1세기 중국의 특산품인 비단이 로마에까지 팔려갔으며 유럽의 유리공예품은 중국으로 흘러갔다.

실크로드가 가장 번성한 시기는 당나라 때다.

실크로드는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서서히 쇠퇴하다가 명나라 때 해상교통의 발달로 잊혀졌다.

실크로드는 크게 텐산북로와 텐산남로, 서역남로로 나뉜다.

텐산북로는 톈산 산맥 북쪽으로 통하는 길.

둔황 ­ 하미 ­ 투루판 ­ 우루무치 ­ 카자흐스탄을 지나 터키에서 로마로 가는 길이다.

톈산남로는 둔황 ­ 투루판 ­ 구얼러 ­ 쿠차 ­ 카스를 지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이란에서 터키로 빠진다.

서역남로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으로 가는 길. 둔황 ­ 러우란 ­ 체모 ­ 허텐 ­ 아르칸트 ­ 카스를 지난다.

현재 나온 여행 상품은 국경 통과 문제 등으로 주로 중국 내 실크로드 상품이 주종을 이룬다. 둔황, 카슈가르, 우루무치, 투르판이 주요 도시. 이중 목초지란 뜻의 우루무치는 중국 정부의 서역 대개발과 함께 공업도시로 변해 옛 모습을 찾기 힘들다.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과

노천 박물관 ‘마가오 굴’


가욕관을 지나면 황량한 사막지대. 여기서부터 실크로드답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보면 서역으로 가는 사막 한가운데서 둔황(敦煌)을 만나게 된다.

둔황은 수천 년 전처럼 지금도 오아시스다.

관광객들이 처음 찾는 곳은 밍사산(鳴沙山)과 마가오 굴이다.

길이 40km, 폭 20km의 밍사산은 사구다.

바람에 따라 모래언덕이 모양을 바꾸기 때문에 높이는 알 수 없다.

산 아래에서는 그저 엄청난 모래더미지만 낙타를 타고 오르면 굽이치는 모래 능선을 볼 수 있다.

탐험가 오렐 스타인의 표현대로 ‘파도 같은 사구가 넘실거리는 바다 같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사막길. 밍사산은 ‘우는 모래산’이란 뜻이다.

바람에 모래알이 쓸려갈 때 울음소리가 난다. 모래벽에도 바람자국이 또렷했다.

간밤에 불던 바람에 구겨진 모래 능선이 꼭 비단폭을 접어놓은 것 같다. 모래알도 비단만큼이나 곱다.

3천 년 동안 마르지 않았다는 초승달 모양의 월아천은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국가 명승지가 됐지만 이 사막은 원래 실크로드 여행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5세기 초 승려 법현은

‘사막의 수많은 귀신들과 뜨거운 돌개바람들, 마주치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간다.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짐승 하나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길은 바라다 보일 데까지 뻗어 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마른 해골 조각이 이정표일 뿐’ 이라고 했다.

 

마르코 폴로는 ‘사막에서는 악령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홀려 길을 잃고 죽어간다’ 고 했다.


실크로드는 목숨을 걸고 넘어야 했던 고행길이었다.

시안을 벗어나 황허의 서북쪽 하서회랑과 고비사막을 지나고

험준한 톈산 산맥 줄기를 넘어 로마까지 갔다. 시안에서 로마까지는 7,000km. 왕복 10년의 거리였다.

둔황은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다. 장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무사 안녕을 비는 기도처였고,

서역에서 돌아온 사람들에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휴게소였다.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둔황시에서 남쪽으로 25km떨어진 마가오(莫高窟) 굴이다.

마가오 굴은 낙준이라는 승려가 366년, 노을에 물든 바위 절벽에서 부처의 모습을 본 뒤

석굴을 파고 수행을 하면서 생겼다. 남북으로 1,618m. 이후 1천 년 동안 수도승들이 모여들어

7백35개의 굴이 생겨났는데 지금은 4백92개만 남아 있다.

굴에서 발견된 벽화를 합하면 4만5천㎡, 불상만 1천4백여 기나 된다고 하니

가히 세계 최대의 노천박물관인 셈이다.
 


마가오의 17호 굴에서 바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다.

우리 민속 악기 장구의 모습이 그려진 335호 굴,

머리에 깃털이 달린 신라인 모자를 쓰고 있는 237호 굴….

고작 10여 개의 굴을 보았는데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기하학적인 카펫의 무늬를 연상시키는 동굴 천장의 자오정화(藻井畵), 화려한 비천상,

인종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천 년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도 생생하고 또렷하다.

이렇게 잘 보존된 것은 연 강수량이 40mm밖에 안 되는 메마른 기후 덕택이다.

크고 작은 다른 동굴에서는 불교 문화재뿐 아니라 엄청나게 다양한 문서들이 나왔다.

마니교의 기도문집, 소그드나니아 상인의 편지, 중국 황제의 칙령, 티베트 처방전, 위구르어 계약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경전…. 그래서 둔황학이란 고유의 학문까지 생겨났다.

마가오 굴이 알려진 것은 불과 1백여 년 전이다.

고대도시의 문화재에 눈독을 들였던 헝가리 출신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미국의 워너 같은 탐험가들이 마가오 굴의 고문서를 빼돌리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들은 마가오 굴의 장경동(17호굴)에서 5만 권이 넘는 고문서를 발견한 왕원록이란 도사로부터

돈을 주고 사거나 훔쳐갔다.

어떻게 이런 엄청난 문화재가 천 년 세월 동안 잠자고 있었을까.

둔황 고문서는 11세기 종교 탄압을 피하기 위해 승려들이 몰래 숨겼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나라 말기엔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는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 수십 만 명을 강제로 환속시키는 불교 탄압이 있었다.

나중에는 이슬람 등 이교도가 들어오면서 승려들은 또 박해를 받았다.

 

당나라가 망하면서 정세가 불안해지자 실크로드의 교역량이 줄고, 명나라 이후엔 해상교통로가 발달하면서 험준한 실크로드는 잊혀졌다.

 

당나라의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여러나라의 군왕과 호족들이 모래 속에 묻힌 도시의 보물을 탐했으나 맹렬한 폭풍과 구름 때문에 길을 잃는다’고 썼다.

 


‘가오창 고성’과 중국 3대 불가사의 ‘카레즈’

 

가오창 고성(高昌)은 둔황에서 가까운 사막 유적지다.

가오창 고성은 모래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토성.

1천5백년 세월에 성벽은 무너져 내리고, 앙상한 토벽만 곳곳에 남아있다. 성한 곳 하나 없는 성벽의 높이는 10m, 둘레는 5.4km로 면적은 30,000㎡나 될 정도로 넓다.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왕궁터에선 예닐곱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이 기념품을 들고 나와

관광객들을 졸졸 쫓아다닐 뿐이다. 대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왕국은 어디로 갔을까?.

가오창국은 5호16국 때인 5세기부터 약 7세기까지 2백 년 동안 번성했던 나라다.

당시에는 성내에 수만 명이 살았을 정도. 가오창국 왕은 「서유기」의 삼장 법사를 국사로 초빙했다.

5세기 이후부터 7세기까지는 불교의 고향인 천축(인도)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승려가 많았다.

당대에 명성을 얻고 있던 삼장도 그중 한 명.

13세에 승려가 된 삼장은 어린 나이에 중원에 이름을 떨칠 정도로 유명했다.

삼장이 불교 경전을 가져오기 위해 627년 20대 후반에 인도 여행길에 올랐을 때

가오창 국왕은 간청을 해서 3개월 동안 설법을 들었다.

그러나 의형제까지 맺은 뒤 인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약속하고

삼장이 천축기행을 떠난 사이 가오창국은 당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불법에 의지해 천 년 왕국을 꿈꾸었으나 허무하게도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지금도 성 한가운데 왕궁 터와 승려가 불법을 전하던 강당이 남아 있다.

특히 강당은 연설자가 말을 하면 소리가 마이크처럼 울려 퍼지도록 설계됐다니 과학기술도 상당했다.

삼장의 흔적은 투르판에서 하미 가는 길에 있는 훠옌산(火焰山)에서 볼 수 있다.

우마왕이 불길로 삼장법사 일행을 막자 손오공이 우마왕으로부터 파초선을 빼앗아 불을 껐다는 곳이다.

훠옌산은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색을 띠고 있다. 한여름 지표 온도가 80℃까지 올라간다.

투르판(吐魯番)은 가오창 고성을 끼고 있는 고도다.

거기엔 만리장성, 대운하와 함께 중국 3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카레즈가 남아 있다.

카레즈는 지하수로를 뜻한다. 투르판은 연간 강수량이 20mm밖에 안되는 사막지대.

하지만 텐산 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이 지하수로 스며든다.

그래서 지하수로를 만들고 밭농사를 짓는데 수로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5,000km나 된다.

투르판은 중국 최대의 건포도 산지다.

사막이라 일조량이 풍부한데다 물이 맑다보니 다른 곳보다 당도가 높다.

한여름이면 사막 한가운데 펼쳐지는 포도밭이 장관이다.

카레즈는 일단 수원을 찾아 샘과 샘을 파고 땅굴을 파서 수도관처럼 연결시킨다.

너무 지표면과 가까우면 말라버리고, 너무 깊으면 농사를 짓기 힘들단다.

또 중간에 물 저장고를 따로 만들어둔다.

 


전 세계 상인들이 모이는 번화한 땅 ‘카슈가르’

 

카슈가르는 3개의 실크로드 길 중 텐산남로와 서역남로가 교차하는 요충지였다.

중국인들은 카슈가르를 카스(喀什)라고 부른다.

파미르 고원 턱밑에 자리 잡은 카스는 전 세계의 상인들이 모여들던 번화한 땅이다.

1천 년에 지은 「한서」의 서역전에는 당시에 1천5백여 가구 8천6백70명이 산다고 쓰여있다.

2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바자르(시장)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바자르는 남대문 시장의 두세 배 정도.

파미르 고원의 고갯길이 녹아내리는 4월쯤이면 파키스탄과 인근에서 상인들이 몰려든다.

그들이 가져오는 것은 주로 실크와 면으로 된 카펫이고 중국의 공산품을 사서 돌아간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까지 가세해 시장은 그야말로 북새통이다.

시장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다. 실크, 칼, 카펫, 공예품, 모자, 양털, 의류는 물론 전통 빵인 난,

양고기꼬치 시시케밥, 스파게티의 원조라는 비빔국수 판미엔까지 다양하다.

카스의 또 다른 명소는 향비 묘다. 위구르족인 향비는 위구르인들이 가장 떠받드는 인물 중 하나.

향비란 몸에서 향기가 난다는 뜻인 데 청나라 건륭 황제의 총애를 받다 59세에 사망했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향비가 건륭 황제의 수청을 거부하다 20대 후반에 독살당했다고 믿고 있다.

실제로 향비의 묘는 후베이성(湖北省)에 있다.

향비 묘는 실제로는 이슬람을 전파했던 17세기 아바크훠자의 묘로 그의 아들 위스프란이 세웠다.


눈부신 만년설을 안고 있는 ‘파미르 고원’

 

카슈가르를 지나면 파미르 고원으로 이어진다. 파미르 고원으로 가는 길은 독특하다.

도로 양쪽으로는 신장백양나무만 촘촘이 서 있다.

하얀 기둥은 사시나무를 닮았고 줄기는 포플러나 미루나무처럼 솟은 신장백양나무는

거센 모래바람을 걸러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시내를 벗어나서 두어 시간쯤 달리면 서서히 눈 덮인 산자락이 나타난다.

이 길이 중국 · 파키스탄 우의도로다.

1961년부터 85년까지 중국과 파키스탄이 공동으로 만든 카라코람 하이웨이의 시작.

카스에서 파미르 고원을 지나 쿤제랍 고개 ­ 훈자 ­ 이슬라마마바드까지 모두 1,300km.

얼마나 난공사였던지 3천 명이나 죽었다고 한다.

 

가장 난코스인 쿤제랍 고개는 ‘피의 골짜기’라는 뜻이다. 옛날엔 더 험했다.

5세기 초 중국의 고승 법현은 「불국기」에서

‘깎아 지른 절벽 밑으로 세차게 물이 흐른다. 앞으로 가려 해도 발을 디딜 곳이 없다’고 표현했다.

말이 고속도로지 포장도 안 된 흙길도 나타나고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만한 좁은 구간도 많다.

사막 기후와 고산 기후가 교차하면서 흙이 푸석푸석한데다

가끔씩 만년설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에 휩쓸려 도로가 유실되기 때문이란다.

이러다 보니 도로 한가운데로 불쑥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도 만나고,

노새에 짐을 지우고 달리는 촌로도 흔하다.

지프와 소형 버스만 다닐 수 있는데 버스는 그나마도 뒤쪽 범퍼가 땅에 닿는다고 떼어내고 운행한다.

휴게소라는 것도 원주민들의 막사같이 작은 집인데 벽에 ‘식당’이라고만 쓰여 있을 뿐이다.

만년설을 쓰고 있는 고봉이 한 발자국 물러나 있는 나이스 협곡을 지나 해발 3,000m를 넘어서면

파미르 고원지대가 나타난다.

파미르 고원은 텐산, 힌두쿠시, 쿤룬, 카라코람 등 4대 산맥이 교차하는 고원이다.

고원은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동서로 300km, 남북으로 200km 정도.

그렇다고 광장처럼 확 펼쳐지지 않고 사이사이에 해발 6,000m가 넘는 고봉들이 솟아 있다.

고도도 2,500~5,000m로 다양하다. 파미르란 타지크어로 ‘세계의 기적’이라는 뜻이다.

산자락의 만년설은 빛을 안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고원 길은 4월이 돼야 열리고 5월 들어서야 빙천(氷川)이 녹는다.

겨울에는 영하 30~40도 이하로 내려가는 혹한을 피할 수 없다.

파미르 고원은 신라승 혜초, 고구려 출신의 당나라 장수 고선지가 넘었던 길이다.

 

‘길은 거칠고 눈은 산마루에 수북이 쌓였는데, 험한 골짜기에는 도적이 들끓는다.

새는 날다 깎아지른 산 위에서 놀라고 사람은 좁은 다리를 건너며 어려워한다.

평생 눈물 흘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천 줄이나 뿌리도다’ (「왕오천축국전」)

1천3백년 전 구도의 길을 떠나며 험준한 세상을 몸으로 버텨냈던 신라승 혜초는

얼마나 고단하고 팍팍했는지 눈물까지 흘렸다.

 

8세기 당 현종 때 고선지 장군은 파미르 고원에서 세계 전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

747년 티베트와 사라센 제국이 동맹을 맺고 당을 견제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오자

군사 1만 명을 끌고 티베트(토번국)를 격퇴시키고 티베트의 72개 동맹국의 항복을 받았다.

750년에는 타슈켄트를 토벌하기도 했다.

 

고선지 장군이 빙하와 만년설이 있는 해발 4,500m의 산줄기를 넘는 대장정을 두고

영국 탐험가 스타인은 ‘알프스를 넘은 하니발과 나폴레옹보다 뛰어났다’ 고 표현했다.

관광객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해발 3,650m의 카리쿠리 호.

시시각각 색이 변한다는 변색호지만 여름이 돼야 얼음이 녹는다.

그 옆으로 빙산의 아버지라는 뜻의 무스타거봉(7,546m)에 구름이 걸쳐 있다.

여기서 국경까지는 불과 4시간이면 된다.

동양과 서양을 이어줬던 실크로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실크로드는

모래 속에 파묻힌 지 1천 년만에 다시 부활하고 있다.


여행수첩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둔황으로 들어가는 방법과

시안에서 기차를 타고 유원을 거쳐 둔황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여행 코스는 둔황, 투루판, 카슈가르, 우루무치, 파미르 고원 등이다.

직장인들은 둔황까지 직접 비행기를 타고 들어가는 상품이 낫다. 그래도 7박 8일 이상 걸린다.

시안부터 시작할 경우 2주 가까이 걸린다.

카스는 중국령이지만 이슬람 색채가 강하다. 돼지고기는 금물이며 현지에서는 달러가 통하지 않는다.

국내 대형 여행사와 배낭여행 전문 여행사에서 실크로드 상품을 취급한다.
- 글·사진 / 최병준 기자(경향신문 매거진 X부)

- 레이디경향, [길 떠나는 길]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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