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석굴암 제대로 보기

Gijuzzang Dream 2007. 11. 9. 23:12

 

 

 

 

 석굴암 제대로 보기

해외여행 자유화로 세계의 유명 관광지에는 한국인들이 홍수를 이루어,
이탈리아 로마의 경우 관광 안내책자가 한글로 되어 있을 정도이다.

특히 필자가 있었던 프랑스 남부의 소피아안티폴리스라는 과학단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휴양지인 니스와 칸느, 모나코가 인접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오는 방문객이 많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방문객들은 이미 여러 국가를 여행한 터라
자신들이 들른 국가를 평하면서 한국의 유산에 대해서도 솔직한 비평을 남기며 돌아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우리의 유산에 대해 다소 폄하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한국에서 배운 우리 것에 대한 지식들이 외국을 다니면서 다소 과장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국 여행객들은, 세계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귀가 따갑도록 들은 석굴암이
정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인지 의심을 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우선 규모에 대해 불평을 한다. 외국의 유물들과 비교하여 너무나 왜소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파리나 로마 시내의 일반 건물에 있는 평범한 조각들조차
석굴암에 있는 불상보다 더 정교하다는 사실에 눈길이 간다.
더구나 한국은 천년 전에 지어진 건물조차 변변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4천5백 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2천 년이 넘었고
로마의 고대 유적 거의 모두가 한국에서 삼국이 세워지기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이르면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라고 했던 유산들이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람브라 궁전의 코마르탑과 아라이안느 정원. 신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도 불려지는 아람브라 궁전의 재료는 석고이다.

 
심지어는 석굴암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우리나라 정부가 심의위원들을 매수해서 억지로 승낙을 받은 것이라는 불신까지 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자 정부에서 한국 유산을 보다 홍보하기 위해 편법을 썼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석굴암이나 종묘가 유럽에 있었다면
세계 문화유산으로 신청이라도 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세계문화유산의 당위성>

세계문화유산은 각 유적이 있는 지역과 특수성, 독창성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 선정된다.
따라서 이집트의 기자에 있는 쿠프의 대피라미드가 4천5백 년 전에 건설되어
세계 7대 불가사의로 인정받았고,
우리 눈에 익은 외국의 대형 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음을 보고
1996년에 지정된 석굴암이나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에 의혹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외국에 있는 대형 건축물이나 문화유산들과 비교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 독창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석굴암 조각들이 아름다운 것은 물론이거니와 석굴암의 차별성은 설계와 시공뿐만 아니라
건축상의 특수성에 기인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바로 재료이다. 석굴암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노트르담 사원. 유럽에서는 석회석이 많이 생산되므로 대부분의 대형 건물들을 이들 재료로 건설한다.
 
 
전세계인들로부터 그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찬사받고 있는
스페인의 알람브라 궁전에 있는 조각품들의 재료는 놀랍게도 석고이다.
석고판을 정교하게 찍어내어 천장이나 벽에 붙인 것으로 시공 기간도 고작 3∼4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은 손재주 있는 사람의 디자인에 따라 얼마든지 손쉽게 제작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또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이나 프랑스 파리에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정교한 조각상들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경탄한다. 그러나 세계인들이 찬탄하는 그 조각들의 원재료는 석회석이다.
석회석은 경도에 있어 활석 다음으로 무른 돌이다.
실제로 필자가 캔터베리 대성당을 방문하였을 때 조각가들이 조그마한 조각 연장을 갖고
석회석 큰 조각으로 커다란 인물상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조각칼로 비누를 조각하는 것처럼 쉽게 정교한 인물상들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탈리아를 방문한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수많은 조각상들의 아름다움과 반들반들한 표면 처리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면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고
옷의 주름이 실제의 옷을 입은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조각상도 재료가 대리석이라는 데 비밀이 있다.
대리석은 석회석과 같은 성분으로 다소 경도가 높은 돌이다.
물론 대리석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조각상의 예술적인 가치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제작의 난이도에 있어 화강석에 비해 비교적 쉽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동남아에 있는 수많은 불상과 불탑에 정교한 인물상들이 조각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겉보기에는 매우 단단한 돌처럼 보이므로
그것들을 조각하는 데 상당히 공을 들였으리라고 단언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진흙과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다.
미술시간에 석고로 모형을 만들듯이 진흙으로 조각상들을 정교하게 만든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것일 뿐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이들에 비하면 석굴암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화강암은 경도가 매우 높아 섬세하게 조각하기 아주 힘든 재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굴암의 모든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하다.
화강석으로 조각할 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설사 마무리 단계의 조그만 실수로
조각의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면 어김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손금과 발바닥 금(불상 중에서 발바닥 금이 있는 것을 아직 다른 곳에서 발견하지 못했음)이 있는 것은
물론 연화문의 꽃무늬가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섬세하게 조각된 연화문 무늬하나만 떨어져도 다시 조각해야 하는 것을 감안할 때
조각가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루기 매우 어려운 화강암으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제작 과정을 거쳐서
완벽한 배율과 아름다움을 갖도록 만들었으므로
석굴암이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세계 어느 문화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석굴암을 직접 보고 나서 극찬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특히 한국이라면 무조건 격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 일본인들도
석굴암에 관한 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석굴암은 동양 무비 최고의 걸작품이다.'

1909년경 소네 아라스케 통감의 지시로 토함산의 석굴암을 탐사한
일본의 미술사학자 세키노 다다시가 한 말이다.
즉 동양에서는 그것에 견줄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외국에서 본 거대한 건축물과 정교한 조각품들을 보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12지연기>
 
엉뚱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석굴암은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보 제24호의 우리 문화유산이다.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산자락 해발 565미터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의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735년에 세웠다고 한다.

한편 최완수는 원성왕이 성덕왕과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전 왕조,
즉 진흥왕의 혈통을 이은 순수 진골인 혜공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주목했다.
그는 원성왕이 과거 왕들과의 단절을 표방하기 위해 경덕왕이 성덕왕의 추복사찰로
국력을 기울여 건립해온 불국사의 건립 시말을 자세히 밝히는 것을 피하고
불국사 건립을 마무리지은 원성왕은
이를 공사 감독관으로 건립의 총책임을 맡았던 김대성 개인의 원찰로 둔갑시켰다고 주장했다.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石窟庵)으로 불렀다.

석굴암은 윤회의 12단계인 12지연기(12支緣起)를 나타내는 법당으로 꾸며져 있다.
연기(緣起)란, 우주 만물은 어떤 독자적인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인(因)과 연(緣)의 결합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로
석가가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사원에서 정각한 진리의 내용이다.
 
연기설은 불교의 기본 사상으로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또는 육처(六處),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순서로 되어 있다.
석굴 법당에는 12지연기의 각 연기를 상징하고 있는 연기보살들이 배치되어 있다.

석굴 평면은 원형부 중앙 뒤쪽에 대좌가 있고, 그 위에 본존불 좌상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벽 전체는 약 89센티미터 높이의 하단부가 요석(腰石)으로 둘려 있으며
그 위로 폭 약 1.19미터, 높이 2.67미터인 판석(板石) 29개가 놓여 주벽 중간 부분을 이루고 있다.
 

석굴암에는 다음과 같은 불상이 있었다.

본존불(本尊佛) : 1구
인왕상(仁王像) : 2구
천부상(天部像) : 2구
나한상(羅漢像) : 10구
팔부신장(八部神將)  : 8구
사천왕상(四天王像)  : 4구
보살상(菩薩像)         : 3구
감실 좌상(龕室坐像) : 10구

석굴암에는 본존불을 포함하여 모두 40구의 불상이 있었지만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반출되었기 때문에
불상이 놓여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석굴암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은 도합 38구이다.

본존불과 상부 멍에돌이 있는 궁륭 모습.


중앙의 본존불은 높이 3.4미터에 이르는, 대좌까지 합치면 5미터나 되는 큰 불상으로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부드럽고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본존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우선 불국사가 8세기 중엽에 유행한 화엄종의 사찰이므로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은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들에게 깨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견해이다.

본존의 소외경전으로는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을,
본존의 원조 석불로는 인도 부다가야 대각사(大覺寺)의 본존을 제시한다.
『방광대장엄경』은 석가의 탄생에서 깨달음의 순간까지를 담고 있는 경전으로
석굴암의 본존은 바로 이 정각(正覺)의 순간을 구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유력한 설은 본존불이 아미타여래라는 설이다.
 
이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로 뒷받침되고 있다.

첫째는 1891년 석굴을 중수한 사실을 담은 현판에서 '미타굴(彌陀窟)'이라 불렸던 기록이 있고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또 오늘날까지 무량수불 · 무량광불(無量壽佛 · 無量光佛)을 뜻하는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편액(扁額)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수광은 끝없는 빛이란 뜻으로 아미타불의 다른 이름이다.

둘째는 일본인들이 본존불의 명호를 추정하는 주요 근거로 삼았던
오른손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땅을 가리켜 부처의 진리를 증명하는 뜻을 지닌 손의 모습)과 우견편단(右肩編袒 :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만 감싸는 옷차림 양식)의
법의(法衣) 양식이 신라 때 아미타불상에 가장 많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셋째는 부석사 무량수전 항마촉지인의 본존불이 아미타불인 것처럼
석굴암 본존불도 김대성을 비롯한 신라 왕실의 정토왕생을 바라는 의미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아미타불이라는 설이 틀림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본존불의 이마 한가운데를 둥글게 파내고
백호(白虎 : 성인의 32가지 상호 중 하나)를 박았는데
이것을 다면체로 깎아 햇빛을 반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존 카터 코벨은
"제일 앞에 있는 좌우 첫번째 감실 두 곳에 놓여진 불상도 본존불처럼 이마에 백호 구슬을 지니고
있었다.(일본인이 반출한 것을 뜻함) 동트는 새벽의 첫번째 빛이 석굴암 입구와
그 위에 달린 광창을 통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와 닿고 반사된 빛은
두 보살상의 백호를 향해 내쏘고 거기서 다시 한번 굴절되어 나온 빛은
본존불 후변에 있는 11면 관세음상의 이마에 비쳐진다.
한마디로 새벽의 짧은 한순간에 석굴암 내부의 조명 효과를 극적으로 제고한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일본인들이 반출한 감실 내의 두 보살상과 본존불 이마의 백호가 다시 원위치에 선다면
이런 효과를 재현할 수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종합건축물 석굴암>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그 우수함을 인정받는 것은
신라 사람들의 지혜와 재능이 잘 녹아 있는 종합적인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석굴암의 구조는 다른 나라의 어느 석굴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우선 석굴암은 화강석을 다듬어 석굴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은 인공 석굴로서
자연석을 뚫고 굴을 만든 고대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중국과 인도의 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조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라의 석굴암은 명백히 건축물인 것이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서늘한 곳에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기원전 100년경부터 바위에 굴을 파 그 속에 탑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 풍습은 4세기경 중국에 전해졌다.

원래 인도와 중국에는 조직이 무른 퇴적암의 사암이나 석회암의 거대한 암벽 지형이 많다.
따라서 암벽을 뚫어 규모가 큰 석굴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
또한 기후도 일년 내내 매우 건조하고 기온이 높기 때문에 암벽을 뚫어 만든 석굴은
매우 시원하므로 안락한 사원의 공간을 조성하는데 적당하다고 문중양 박사는 설명한다.

여하튼 이러한 석굴 신앙이 7∼8세기 초 우리나라에 전해지면서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 군위 삼존석굴과 같은 석굴사원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자연 여건은 중국이나 인도와는 다르다.
추운 겨울과 고온 다습한 여름을 갖고 있는데다가
전 지역이 매우 단단한 화강암 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경주지역에는 큰 바위산도  없었으므로
신라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창안할 수밖에 없었다.

즉, 산을 파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흙을 덮어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인공으로 구축된 석암(石岩)에 예술적으로 조각된 불상들이 배치되어 있는 곳은
전세계적으로 오직 석굴암뿐이다.
거대한 암벽을 뚫어 석굴을 만들지 않았다하여 석굴암을 조성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인공 석굴은 고도의 축조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석굴암은 설계뿐만 아니라 시공면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지 않으면 건설될 수 없는 것이다.

반지름 12당척(29.7센티미터)의 궁륭형 천장은
화강석을 둥근 띠 모양으로 묶어 5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띠 둘레는 각각 10개의 2중 곡면 부재로 묶였는데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점차 띠의 폭이 줄어들며
정점에 연꽃 문양으로 된 125개의 돌을 올려놓았다.
 
기울기가 크지 않은 아랫부분의 2개 층을 제외하고는
띠를 묶을 때 돌들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연접부에 쐐기들을 수평으로 박았는데 이를 ‘멍에돌(팔뚝돌)’이라고 한다.

멍에돌은 길이 2미터 크기의 약간 운두가 높고 폭이 좁은 단면의 장대석으로
멍에돌을 다듬는데 그 길이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설치하면
머리 부분만 천장 벽면 밖으로 나오고 나머지는 적심에 넣어 고정시키게 된다.
멍에돌 머리 부분엔 잘록하게 판 흠이 있고 홈에 천장 판석을 끼운다.
멍에돌을 삽입하여 반 모멘트를 조성시켜 조립식으로 구형 방막을 건설한 것과
각 부재들의 이음줄이 세로면에서는 궁륭의 원심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궁륭 표면상에서는 정확하게 자오선을 따라 형성되도록 한 것은
신라의 석공들이 높은 구조역학적 지식을 갖고 석굴암을 축조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돌 부재가 중심축 방향으로는 주로 압축력만이 작용하게 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부재의 무게를 줄이게 하는 합리적인 구조로
불국사 청운 백운교 좌우의 석벽 구조에서도 멍에돌 공법이 사용되었다.

석굴암 내부 단면(2중 콘크리트가 보임, 신라역사과학관 모형).



천장 덮개돌은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 2.47미터, 높이 1미터, 바깥쪽 지름 3미터나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이나 된다. 기중기로 들어 올려도 만만치 않은 무게의 커다란 덮개돌이지만
정확하게 반구형 돔을 시공했기 때문에 역학적 균형을 이루어 매우 튼튼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혼동하는 상식 이야기. ‘천장’과 ‘천정’의 차이점이다.

천정(天井)은 고급 집이나 법당과 같은 건물에서
반자(방이나 마루의 천장을 평평하게 만든 시설)에 우물 정(井)자형의 바둑판 반자틀을 만들어
설치한 것을 말하며 천장(天障)은 서까래가 다 드러나 보이도록 꾸민 것이다.
석굴암의 경우 당연히 천장이다.


<김대성의 꿈에 나타난 선녀>

『삼국유사』에는
“본존불을 조각하기 직전에 석굴 천장의 돌 덮개를 만들던 중 갑자기 돌이 세 조각으로 깨져 버렸다.
김대성이 분을 이기지 못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서 덮개를 다 완성시켜 주고 돌아갔다.
꿈을 깬 대성이 나가서 석굴암을 보니 꿈에 본대로 덮개석이 원위치에 올려져 있었다.
김대성은 감동하여 남쪽 고개로 달려가서 천신께 제사를 지냈고 그곳을 향령(香嶺)이라고 부른다”
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석굴 천장 중앙의 돌 덮개는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다.
이를 두고 유홍준 교수는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완성시켜 놓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나는 김대성이 잠든 틈을 타 석공들이 완성시켜놓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그들은 20개의 쐐기돌을 박아 천장덮개돌을 얹은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공사를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던 석공들의 욕망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무게 20톤이나 되는 2.5×3×1미터의 돌을 채석해서 복판연꽃을 새긴다는 일 자체가
한심스러웠을 것이다. 일이란 마무리단계에 오면 더욱 그런 법이다.
생각해 보아라, 25살에 이 공사를 시작한 석공은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그것이 겨울날이었다면 또 어떠했을까 미루어 알 만하다.
석공들은 그들의 고집대로 또는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후딱 해치웠는데
김대성의 꿈에는 그들이 천신으로 현몽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유홍준 교수의 이와 같은 설명은
신라인들의 종교적 열정과 구원에 대한 믿음, 엄격한 주종 관계라는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
‘천박하기 짝이 없는 상상력’이라는 비평을 받았다.
필자도 유교수의 설명에는 다소 무리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고대 사회에 있어서 20톤이라는 돌의 무게는 엄청난 것이다.
요즈음에는 일반 공사현장에도 크레인이 있어서 20톤 정도를 움직이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1970년대 말까지도 10톤 정도의 무게를 현장에서 움직이는데는 상당한 노력을 들여야 했다.
그 정도의 커다란 돌이라면 김대성이 잠자고 있을 때,
즉 하룻밤 사이에 얼렁뚱땅 제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심이 돈독한 김대성이 어떤 이유로 깨진 덮개석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시공했을까?
그 이유를 추론하기 전에 우선 석굴암에 사용된 석재의 산지가 어디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일부 학자들은 석굴암에 사용된 화강석의 산지가 백제 지방인 전라북도 황등이라고 추정했다.
석굴암의 본존불을 조각할만한 좋은 석재가 경상도 지역에서는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당시 거의 30톤(원형으로 다듬어야 하므로 원석은 이 정도는 되어야 했을 것이다)이나
되는 큰 돌을 어떻게 옮겨갔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그들은 백제에서 신라까지의 길고 험준한 도로로 거대한 석재들을 끌고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뱃길로 옮겼다고 대안을 제시하였다.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도 신라에서 불사를 일으킬 때 많은 백제 사람이 기술자로 갔으므로
석굴암을 건조할 때 황등에서 일하던 석공들이 작업을 했다면
백제땅 황등에서 거대한 석재를 갖고 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연세대학교 지질학과 교수였던 고 이대성 교수는
석굴암의 석재는 바로 현장에서 채굴한 돌을 사용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작업 여건과 석재의 운반 등을 고려할 때 현장 이외의 장소에서 석재를 공급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석굴암의 석재는 홍색장석화강암으로 석굴암터에서 암석을 채취한 흔적도 발견하였다고 했다.
그것은 석굴암이 현재의 토함산 자리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석굴암이 현재의 위치에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많은 설들이 있다.
김대성이 수십 년에 걸쳐서 건설하다가 국가가 이어받을 정도로 중요한 공사였으므로
위치 선정에 있어 여러 점을 고려하였다는 것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똑바로 동해를 향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해 중의 한 지점인 동해구를 응시하고 있다.
인근에는 문무왕이 욕진왜병(慾鎭倭兵)의 뜻으로 감은사를 세우다가 준공을 보지 못하고
681년에 사망하자 아들인 신문왕이 부친을 이어 감은사를 완공한다.
 
또한 동해구에는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조성된 동해릉(東海陵)이 있다.
신문왕은 망배망제(望拜望祭)를 위한 이견대(利見臺)도 세운다.
석굴암의 위치는 신라 왕조의 중요한 유적이 집중되어 있는 동해구를
의식적으로 향하도록 선정하였다는 것이다.

반면에 장충식은 석탈해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우물 요내정(遙乃井)이 바로 지금의 석굴암 자리에 있었다며 ‘동악대신’ 즉 토암산의 신이 됐다는 석탈해왕과 관련된 종교적 이유가 석굴암 조성의 한 배경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유사』에 적힌 요내정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루는 토해(吐解)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백의(白衣)로 하여금 마실 물을 떠오게 했는데,
백의가 물을 길어오며 중도에서 먼저 맛을 보고 바치려고 하니
그 각배(角盃)가 입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꾸짖으니 백의가 맹세하기를,
“이후로 가깝고 먼 곳을 막론하고 먼저 맛보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자 비로소 떨어졌다.
이로부터 백의가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 가운데 한 우물이 있는데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고 말하니, 그것이 그 샘이다.’

여하튼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선정된 현 석굴암 장소에서 공사하는 도중에
커다란 덮개석이 깨지는 문제가 생긴다.
석굴암을 짓고 있던 김대성으로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석굴암의 구조로 보아 천장을 덮는다는 것은 시공상 마무리 단계를 의미하므로
준공 날짜도 얼마 남지 않았었을 것이다.
불자인 김대성으로서는 당연히 새로운 돌로 석굴암을 완성하여야 하지만
그러려면 적어도 상당 기간 동안 준공 시기를 늦추어야 한다.
아무리 석굴암 현장에서 원석을 채취한다고 해도 덮개석 만한 돌을 새로이 준비하는 것은
단순한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돌로 시공할 수 없는 이유를 어떻게 해서든지 만들어서 변명해야 했을 것이다.
김대성이 만든 변명은 간단하다.
자신의 꿈에 천신이 나타나 깨진 덮개석으로 천장을 마무리해 주는 것을 볼 때
새로운 돌로 덮개석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석공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김대성이 깨어진 돌이지만 석굴암 천장 덮개석을 그대로 쓰자고
오히려 석공들을 다독거렸을 것이라는 뜻이다. 

 

<석굴암의 수난>

 

 

석굴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이,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으나

세인에 잊혀졌다가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석굴암이 발견된 이듬해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석굴암의 조각상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려 획책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를 눈치챈 현지 관리가 석굴암 반출을 거절하자

총독 데라우치가 현지를 시찰하고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은 시작된다.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그 후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되어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1913년 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학자들은 석굴암의 훼손은 보수할 당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석굴암은 당초에 건설되었던 석굴암과 구조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즉 석굴암의 본래 모습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게 된 필연의 결과라는 뜻이다.

 

석굴암은 원래 일반 건물과 같이 주벽은 이중 돌로 축조되어 있었으며,

그 두께는 1.2미터 또는 1.5미터 정도였다.

지붕에는 판석을 덮어 빗물을 처리하였고 출입구는 개방된 구조였다.

남천우 박사에 의하면 출입구 상부에는 광창이 있었고,

주벽인 10개의 소감실 배후에도 창구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수리과정에서 이러한 원형이 모두 변형되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원래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마디로 밀폐구조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통풍 시설로는 감실의 환기창을 들 수 있다.

현재 10개의 감실 중에 8개에 연기보살 좌상들이 각각 안치되어 있고 2개의 감실은 비어 있다.

그런데 이 좌상의 두편으로 조그만 구멍이 나있어 외부로 바람이 통할 수 있었다.

물론 현재의 감실은 일제 강점기 때의 보수 공사로 감식 석재들이 모두 교체되면서

통풍을 할 수 있게 만들었던 환기창들은 모두 사라졌다.

 

1960년대의 석굴암 보수공사 때 현재 목조 전실이 세워진 곳 주변에서

건물의 초석과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다양한 기와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목조 전실이 틀림없이 존재했으므로

목조 건물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건축했다는 것도 논쟁거리이다.

 

석굴암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 돈황의 여러 석굴에도 목조 전실이 있었으며

영조 9년(1733)에 정선이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에 나오는

경주군 양북면 안동의 「골굴석굴도」에도 석실 입구에 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에

목조 건물로 씌워지지 않은 석굴과 그 옆에 목조 암자가 별도로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도에는 석굴의 위쪽에 '골굴'이라는 목조 암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중양 박사는 1961년 보수 공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정선의 그림을 보고 석굴이 목조 암자로 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현재와 같이 전실을 목조 건물로 덮어 버렸지만

이는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 않은데서 온 착오라고 지적했다.

 

물론 석굴 바닥의 샘물을 통한 습도 조절 문제도 계속 논쟁거리이다.

내부 바닥 밑으로 찬 샘물이 흐르게 함으로써 온도 차이로 인한 벽과 천장의 결로 현상을 막았다면

바닥의 돌을 마치 구들을 놓듯 질서정연하게 시공해야 했을 텐데

1960년대의 보수공사 때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 바닥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샘물로 인한 습도 조절 문제는 단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반론에 대한 반론이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재도 석굴암의 훼손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보다 현실적인 문제, 석굴암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대안이 제시되었으나

가장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은 석굴을 원형대로 다시 재축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과 같은 인공적인 조절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므로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옛 모습 그대로 재조립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참고적으로 전 서울대 물리학교 교수인 남천우 박사는

석굴암 보존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석굴암 보존의 위기는 개악 수리공사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래서 연구 보고를 핑계로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도 습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즉 배후에 만든 이중돔 사이 공간의 온도를 밤중 대기온도보다 4, 5℃ 높게 유지시켜 주고

출입문을 개방하면 결로 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관람객의 출입도 가능해지며

기 건조 장치도 필요 없고 진동과 소음도 저절로 사라진다.

굳이 수억 원을 새로 들여서 기계실을 밖으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