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석굴암의 왜곡

Gijuzzang Dream 2007. 11. 9. 22:59

 

 

 

 석굴암(石窟庵) – 우리 문화의 자랑

 

 

석굴암은 통일신라의 문화와 과학의 힘, 종교적 열정의 결정체이며 국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문화재이다.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하늘 끝과 맞닿고 서쪽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봉우리들이 하늘과 만나는 절경을 볼 수 있다.

 

석굴암은 토함산의 동쪽사면, 해발고도 565m에 있다.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로 26˚ 틀어져 있으며 계곡 너머 멀리 동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해변의 왜구를 막기 위해 호국용(護國龍)이 되었다는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大王巖)이 토함산 밑 동해 변에 있다.

 

 

           문무왕의 수중 능 - 감포 대왕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후 뼈를 뿌린 곳으로 알려져 있다.

 

 

토함산 동쪽에 있는 계곡은 동해에서 경주로 넘어오는 최단 도로였으며 따라서 왜구침입로가 되기도 하여 국토수호의 목적에서 많은 절이 세워졌다. 토함산은 신라 5 악(新羅五岳) 가운데 하나인 영산(靈山)으로서 석탈해(昔脫解)의 사당이 있었던 곳이다.

 

석굴암은 불국사와 함께 김대성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그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경덕왕 10년(751)에 착공하였으며 김대성이 죽은 뒤에는 나라에서 공사를 맡아 완성시켰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 돼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우선 전실에서부터 배치된 조각을 살펴보면, 석벽 좌우에 팔부신중 4체씩이 각각 마주보고 있고, 연이어 금강역사가 한 체씩 서 있다. 일반 사찰과 견주어보면 이들 조각은 사천왕문같은 도입부에 속한다. 그러나 이 전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단정짓기가 어렵다. 전실과 주실은 비도(扉道)로 연결돼 있다. 벽 좌우에는 사천왕상이 두체씩 조각되어 있다.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상 얼굴부분

 

 석굴암의 범천과 제석천

 

주실은 본존불을 중심으로 둘러싼 공간으로 되어 있고 앞쪽 좌우에는 돌기둥이 있다. 입구에서부터 좌우에 차례대로 천부상 하나, 보살상 하나, 십대 제자상 다섯, 그리고 본존불의 광배가 새겨져 있으며, 광배 양 옆으로 각 다섯 개의 감실이 있다.
  

감실 안에는 문수, 유마, 지장 등 기타 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다만 현존하는 것은 좌우 넷씩 모두 8체뿐이며, 나머지 두 감실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전실의 조각까지 합하면 현존하는 석굴암의 조각은 모두 38체로 저마다의 특징과 표정이 잘 표현되었다. 주실의 본존불은 일반 사찰의 대웅전에 해당하고 관음상은 관음전을, 다른 보살 군상들은 천불전 쯤에 해당된다 하겠다.

 

석굴암 본존불을 둘러싼 십대제자상의 조각

 

천정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고, 본존불 바로 위에는 연화문을 새긴 하나의 큰 천개다 있다. 이 천개에는 석굴암을 지을 때 세 조각으로 갈라진 것을 천신이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하는 김대성의 꿈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세 줄의 균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 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없이 창건당시의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굴암에 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 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입구에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 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교남명승첩에 수록된 ‘골굴석굴도’

 

천장은 하늘처럼 둥글게 짜인 궁륭 모양인데 30개의 돌못이 쐐기처럼 박혀 궁륭천장을 받치고 있다. 해체·복원 전에 천장의 일부가 무너졌지만 이 돌못 때문에 다행히 다 무너지지않고 여래상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돌못은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지루하지 않게 변화를 주는 장식역할까지 하고 있으며, 햇살처럼 여래의 빛이 하늘가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느낌을 주어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궁륭모양을 한 석굴암 천장에 돌못이 박혀있다.

 

천장 맨 꼭대기에는 하나의 큰 돌을 중심으로 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단선 복판의 연화를 새기고 있는데, 이 큰 돌은 김대성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와 같이, 천신이 세 조각을 이어붙인 듯 균열이 있다. 천장은 앉아 있는 본존불이 일어서서 움직이더라도 머리 끝이 천장에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치밀하게 만들어졌다.

 

 

 석굴암(石窟庵)과 테라우치 조선총독  

 

 


                   석굴암 본존불 

 

 현재의 석굴암은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이 해체하여 일본에 가져가려다 다시 꿰맞춰 놓은 것이다. 석굴암은 원래 석불사이다. 하지만 일제시대때 일본인들에 의해 불국사 속에 있는 하나의 작은 암상이라는 뜻으로 석굴암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왼쪽(1912년 석굴암 모습)                                       오른쪽(당시의 해체 복원 후의 모습)

 

석굴암 현재의 모습은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는 1913년 당시 일본인에 의해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완전 해체되고 재조립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남겼다. 차가운 물이 지나도록 만든 지하의 감로수 방향도 바꿔버렸고 무너지는 것을 방지한다며 2M두께의 콘크리트를 돔 위에 만들면서 고온 다습한 공기 흐름을 차단해 이슬 맺힘 현상이 생겼다.

 

1962년에는 목조전실과 유리 차단막을 만들고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기계장치를 가동하면서 소음과 진동이라는 문제를 유발시켜 "석굴암"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많은 사람이 연구하고 있지만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1300년 전, 우리 조상님의 지혜를 오늘날의 첨단과학으로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에 의해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 종묘와 함께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테라우치 조선총독은 석굴암을 일본으로 져가려 했

 

 

그런데 일제시대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마치 자신이 이 석굴암을 지하동굴에서 발굴한 양 과장선전하여, 이후 일본의 무뢰한들이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급 유물들을 반출해 가는 계기를 만들었다. 일제는 석굴전체를 해체하여 일본으로 가져갈 계획까지 세웠으나 한일합방으로 굳이 반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 제 1대 총독

 

1912년 11월 8일,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환갑의 나이로 30여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이날 경주 토함산에 올랐다. 목적지는 석굴암이었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석굴암을 단지 구경하려는 생각으로 변변한 길조차 없던 가파른 산길을 거침없이 올라섰던 것은 아니었다.

석굴암을 통째로 옮기려던 계획이 실행 가능한 것인지를 몸소 확인하기 위한 것이 실제 목적이었다. 그 역시 별도리가 없음을 알았음인지 하릴없이 '불이법문(不二法門)'이라는 네 글자를 바위에 큼직하게 새겨놓고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석굴암 원경 (당시의 자료사진)

 

그 당시 데라우치의 경주방문 일정은 2박 3일. 그 해 11월 7일 대구를 출발하여 경주로 들어와 경주 일대의 고적유물을 두루 살펴보고 이틀을 머문 뒤 포항 쪽으로 빠져나가 영일만에 대기하던 광제호(光濟號)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직항하는 행로였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2년 11월 10일자에는 "총독은 출영하기 위하여 도열한 일군의 학생생도와 이를 인솔한 교원에게 정녕 근황을 물어본 뒤 군청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에서 중요한 일본사람 조선사람을 접견하고 훈시를 하고 나서 재판소, 경주지청, 경찰서, 농산물진열장 등을 순시하시고 7일은 군 청사에서 숙박하였다"고 그 풍경을 그리고 있다.

이 후,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텨온 석굴암은 그 자체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석굴암 해체 및 수리공사를 하던 자료사진

 

석굴암은 해방 뒤 혼란한 사회 속에서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되었다. 이 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습도를 유지한다 하여 일차 시멘트벽 위에 공간을 띄어 놓고 다시 시멘트로 발라놓았다. 그러고는 따로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석굴암 내부에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향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 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였다. 이렇게 앞뒤로 외부와 완전 차단된 석굴암은 이제 스스로의 자정능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으며 습도나 온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해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출처 : http://blog.naver.com/himammo/90007203942

 

 

 

 

 

 성낙주 교사, 1912년 사진첩 발굴ㆍ공개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진 석굴암(국보 제24호)주실 지붕이 마치 시루떡처럼 기와를 적어도 두 겹 이상이나 얹고 그 중간에는 토석을 채운 구조였음을 결정적으로 밝혀 주는 1912년 촬영 사진자료가 공개됐다.

 

석굴암 연구가인 성낙주(49) 서울 중계중 국어교사는 1913년 석굴암이 해체되기직전인 1912년 늦가을 무렵, 일본 동양헌사진관(東洋軒寫眞館)이란 곳에서 촬영한 석굴암 관련 화보집인 `신라고적석굴암 석불'을 8일 공개했다.

 

 1912년 촬영된 석굴암 사진, 토석층 사이에 기와층이 보인다.

성낙주씨가 공개한 석굴암 주실 전면사진

 

이 화보집은 이미 학계에 공개돼 석굴암 연구에 매우 긴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1912년 겨울판의 또 다른 석굴암 화보집 `신라고적 석굴암 석불'(총 26장)과 비교할 때 촬영회사는 동양헌사진관으로 같으나, 수록된 사진은 겹치는 것이 없다.

 

이번에 성 교사가 공개한 `신라고적 석굴암 석불'은 석굴암 감실 조각상 8상(像)을 사진 1장에 각 2상을 담아 처리한 것을 제외하면, 당시 주실과 전실의 부조입상 7상을 한 장에 하나씩 담고 있다.

여기에다 본존불 한 장, 입구정면을 촬영한 한 장, 멀리서 석굴암을 조망한 원경 한 장을 더해 총 34장으로 구성돼 있다.

이중 감실조상 한 장분이 결실돼 현재는 33장이 남아 있으나 이것만으로도 식민지시대 초반 무렵에 나온 석굴암 관련 화보집으로는 분량이 가장 많다고 성 교사는 덧붙였다.


이번 화보집을 통해 공개된 석굴암 관련 자료 중에서도 4번이라는 번호를 매기고 있는 석굴암 주실 전면사진은 해체 직전인 1912년 무렵 주실 지붕구조를 명확히 알려 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로 평가된다는 점에서 비상히 주목되고 있다.

 

바깥에서 석굴암 주실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담은 이 사진에는 고대 불교석굴 사상 유일하게 석재를 이용한 돔 형식으로 쌓아 올린 이 석굴암 지붕전면부가 무너져 내리면서 생긴 절단 토층면을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르면 석굴암 주실 지붕은 두 겹 이상 되는 기와 지붕을 씌우고 그 사이에는 토석을 채웠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진첩 발굴자인 성 교사는 기와가 세 겹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으나 사진판독으로 볼 때 두 겹은 확실하게 드러나며 나머지 한 겹은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다.  성 교사는 "이 사진을 통해 석굴암 주실, 특히 그 지붕은 방수와 보온, 충격에의 완충 등을 위한 다목적용으로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치밀하게 축조되었음을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 창건 이후 퇴락과 중수를 반복했을 터이므로이번 사진에 드러난 지붕 구조가 곧바로 신라시대 초창기 때의 그것이라고 단언할수는 없다"면서 "그러나 중수가 있었다고 해도 전래의 고식을 따랐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이 사진에 담긴 정보가 현재로서는 가장 원형에 가깝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 2005년 1월 8일,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