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흥원(흥선대원군묘)과 운현궁가족묘를 찾아

Gijuzzang Dream 2007. 11. 6. 12:45

 

 

 

 

***** 2007년 3월 12일 답사한 내용입니다. *****

 

 

어제 3월 12일(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창현리 산 22-2

흥원(興園 : 경기도기념물 제48호 지정)을 찾았습니다.

흥원은 조선의 26대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묘입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며, 시호는 헌의(獻懿)입니다.

1843년(헌종 9)에 흥선군에 봉해졌고, 1863년(고종 즉위년) 흥선대원군 교지를 받습니다.

 

여느 사대부의 묘 치레에도 못미치는 흥선대원군의 무덤인 '흥원'은

좌향이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정서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묘역으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표지석이 서 있는데 대리석 사각의 민무늬 비신 앞면에

"흥원(興園)"이라 써 있고, 뒷면에는 현손 이종(李淙)이 쓴 천장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興園)은

원래 1898년 윤 3월20일 고양군 공덕리 아소당 뒤뜰에 있던 것을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현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로 천봉(遷奉 : 왕실의 묘 이장하는 일)하는데, 

융희(隆熙) 원년(1907년) 11월10일에 시작, 융희 2년(1908년) 2월1일에 마무리하는 당시의 기록을

옮겨 적은 책이 '흥원천봉등록(興園遷奉謄錄)'입니다.

그런데 흥원의 천봉은 

1966년 4월 28일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또 한번 옮깁니다.

흥원 일대에 미군 군사시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봉분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민무늬의 비신에  "國太公園所 "이라 쓰인 원표(園標)가 있는데,

1905년(광무 9)에 세워진 것으로 전면 좌측 하단에는 '의미근서(意美謹書)'라 쓰여 있습니다.

 

 

 

 

묘역은 형식상 2단으로 나누어져 상단에는 호석으로 둘러싸인 봉분이 있고,

봉분 안쪽 좌우에는 석양이 있습니다.

봉분 앞에 상석 그리고 장대석이 놓여있으며, 장대석 하단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있습니다.

그 중간에 장명등과 양쪽에는 중간에 난초그림이 새겨진 석마가 놓여있습니다.  

 

 

 

 

광무 2년(1898) 2월 22일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4동)의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세상을 떠난

흥선대원군은 5월16일, ‘아소당’ 뒤뜰에 묻힙니다.  

 

고종 37권, 35년(1898 무술 / 대한 광무(光武) 2년)2월 22일 양력 3번째기사

흥선대원군이 훙서하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훙서(薨逝)하였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흥선대원군이 음력 2월 2일 술시(戌時)에 훙서하였으니,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비유하겠는가?

응당 행해야 할 모든 절목을 장례원(掌禮院)에서 참고하여 마련하도록 하라." 하였다.

 

(興宣大院君薨逝。 詔曰:

“興宣大院君, 今陰曆二月初二日戌時薨逝。慟迫何喩? 應行諸節, 令掌禮院參考磨鍊。”)

 

고종 37권, 35년(1898 무술 / 대한 광무(光武) 2년)5월 16일 양력 1번째기사

흥선대원군과 여흥 부대부인의 안장 시에 망곡을 행하다.

 

 

대유재(大猷齋) 서쪽 행각(行閣)에 나아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의 안장 시 망곡(望哭)을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 나아가 망곡하였다.

 

(十六日。詣大猷齋西行閣, 行興宣大院君驪興府大夫人安葬時望哭。皇太子隨詣望哭。)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흐른 1907년(융희 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 시호는 헌의(獻懿)라 하였습니다.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9월13일 양력 1번째기사

이완용이 흥선대원군을 왕으로 봉하고 시호 대안을 올리다.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왕(王)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망(號望)을 '헌의(獻懿 : 밖으로 충성스럽고 덕스러운 것을 '헌(獻)'이라 하고,

행실이 중앙과 지방에 나타난 것을 '의(懿)'라고 한다)로 하였으며,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을 비(妃)로 추봉하고

시호망을 '순목(純穆 : 똑바르고 화순한 것을 '순(純)'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리를 견지한 것을 '목(穆)'이라고 한다)으로 의논하여 결정해서 상주하니,

그대로 하라고 하였다.

【영인본】 3책 495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十三日。 內閣總理大臣李完用以

“興宣대院君, 追封王。 諡號望, ‘獻懿’【嚮忠內德曰獻, 行見中外曰懿】;

驪興府大夫人。 追封妃。 諡號望, ‘純穆’【中正和粹曰純, 布德執義曰穆】。議定上奏。” 恭依。)

 

흥선대원군의 묘인 흥원(興園)을 아소당 뒤뜰에서

경기도 파주 운천면 대덕동(현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운천리)으로 옮깁니다.

첫번째 천봉(遷奉 : 왕실의 묘를 이장하는 일)이었습니다.

흥원의 천봉은 융희 원년(1907) 11월10일에 시작, 융희 2년(1908) 2월1일에 마무리됩니다.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11월10일 양력 1번째기사

대원왕과 대원비의 능에 대한 이장 절차를 집행하도록 하다.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대원왕(大院王)과 대원비(大院妃)의 원침(園寢)을 이제 천봉(遷奉)해야 할 것이니,

예장(禮葬)하는 절차를 궁내부(宮內府)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영인본】 3책 501면 【분류】 *왕실-종사(宗寺) / *왕실-의식(儀式)

 

 

(十日。 詔曰: “大院王、大院妃園寢, 今當遷奉矣。 禮葬之節, 令宮內府擧行。”)

 

순종 1권, 즉위년(1907 정미 / 대한 융희(隆熙) 1년)12월4일 양력 5번째기사

김각현이 대원왕의 원소에 관하여 아뢰다.

 

 

 

천원(遷園)하는 일을 검찰하는 당상(堂上) 김각현(金珏鉉)이 아뢰기를,

"이번에 대원왕(大院王)과 대원비(大院妃)의 원소(園所)를

파주(坡州)의 운천면(雲川面) 대덕동(大德洞) 묘좌(卯坐)에 정하고

지금 이미 봉표(封標) 하였습니다.

화소(火巢)의 사표(四標)도 내부(內部)로 하여금 해당 지방관에게 전칙(轉飭)하여

함께 모여서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遷園檢察堂上金珏鉉奏:

“今此大院王、大院妃園所, 定於坡州雲川面大德洞卯坐地, 今旣封標矣。

火巢四標, 令內部轉飭該地方官, 會同擧行何如?” 允之。)

 

 

순종 2권,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1월30일 양력 1번째기사

대원왕의 원소를 파주군으로 옮기다.

 

 

 

천원검찰당상(遷園檢察堂上) 김각현(金珏鉉)이 아뢰기를,

"오늘 미시(未時)에 대원왕(大院王)과 대원비(大院妃)의 관을 광중에 내려놓은 뒤에

그 주위를 회로 메꾸었습니다."라고 상주하였다.

 

(三十日。 遷園檢察堂上金珏鉉以

“今日未時, 大院王、大院妃椑室下幽室後, 仍爲隔灰之意, 上奏。”)

 

 

순종 2권,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5월 8일 양력 1번째기사

대원왕과 대원비의 묘이름을 흥원이라고 부르고 수봉관을 두도록 하다

 

 

포달(布達) 제175호,

대원왕(大院王)과 대원비(大院妃)의 원호(園號)를 '흥원(興園)'이라 부르고

종묘(宗廟), 사직(社稷), 전(殿), 궁(宮), 각릉(各陵), 원(園), 단(壇), 묘(墓) 관제 중

흥원수봉관(興園守奉官) 2인을 판임관(判任官)에 첨입(添入)하는 안건을 반포하였다.

 

(八日。 布達第一百七十五號, 大院王、大院妃園號以興園爲稱,

廟、社、殿、宮、各陵、園、壇、墓官制中興園守奉官二人判任添入件。頒布。)

 

천봉 책임자로 임명된 김각현

산지관(지리학을 전공한 관상감 관원) 신택두ㆍ최홍준과 함께 파주 일대로 나가

묘자리를 살핀 뒤 장릉(長陵 : 인조와 인렬왕후의 능)을 천봉한 자리로 정합니다. 

 

파주 운천리에 있던 본래 장릉은 1636년(인조 14) 4월 인렬왕후를 장사지내면서 조성되어

그 이후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곳에 함께 장사지냈는데,

1731년(영조 7) 장릉에 뱀이 무리를 지으니 옮겨야 하겠다는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장릉자리인 파주 탄현면 갈현리로 천봉하였기에 비어있었던 것입니다. 

 

 

 

천봉에 소요된 비용은 구원(舊園)을 헐고 벽실을 봉출한 비용 68환31전 등

총 3만2천51환41전6리로 기록돼 있습니다. (<흥원천봉등록 (興園遷奉謄錄)> 의거)

 


 

흥원은 1966년 6월 16일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지금의 자리로 또 한번 옮깁니다.

흥원이 있던 파주 문산읍 운천리 일대에 미군 군사시설이 들어섰기 때문이죠.

 





 


 


 

흥원의 상처입은 모습들, . . . 상처뿐인 영광인가요.

신도비에 남겨진 군데 군데의 상흔들과

안면이 떨어져나가 시멘콘크리트로 성형수술한 문인석,

주변의 무성의하고 엉성한 관리상태는 너무도 쉽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흥선대원군 신도비는 묘역에서 약 25m 전방에 있는데,

귀부에 오석(烏石)으로 만든 비신에 팔작지붕 형태의 옥개석이었습니다.

비신 전면(前面) 상단에 "大韓獻懿大院王興園神道碑銘"이라 횡서했는데,

비문은 종1품 규장각 대제학 김학진(金鶴鎭, 1838-?)이 찬하고 전자(篆字)를 썼으며

이재극(李載克, 1864-1927)이 비문을 썼습니다.

이 비는 융희 21년(1927)에 세운 것으로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곳곳에 보이는데,

탄흔 5개소 및 좌측면에 직경 10㎝ 이상의 큰 탄흔이 10여 개소 눈에 띄었습니다.

 


한편, 흥선대원군 묘인 흥원(興園주변에 자리잡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아들 이재면(載冕 : 1845∼1922), 손자 이준용(埈鎔 : 1870∼1917),

그리고 이준용의 양자 이우(鍝 : 1912-1945, 生父 : 의친왕의 2子)의 무덤은

어찌어찌한 이유로 파묘되어 화장이라는 과정을 거쳐

이렇게 가족묘 납골당 형식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가족묘로 변해버린 이 묘역은 원래 이우의 무덤이 마련되었던 곳입니다.

 


 

상설제도로

곡장, 석망주, 석양, 석호, 문인석, 석마,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에, 그것도 양관 가운데에는

'운현궁'을 상징하는 문양이 뚜렷합니다.

다섯 꽃잎 이화문양을 감싸는 원이 둘러있는 그 문양이 . . .

 

 


 

운현궁가(家) 가족묘역을 조성하고 있는 이곳에서는

왕가의 일부 자손들이 재산문제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는데,

승자가 된 자손들 측에서 흥원에 제를 올릴 때 음식을 장만하던 건물을 헐어버려

지금은 그 흔적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제 그나마 남아있는

흥원 좌측 언덕 윗쪽 흥친왕(이재면)무덤마저도 봉분은 3/1이상 무너져내리고

곡장도 무너져 내리고있어 이것 또한 어찌된 일인가 했더니 . . .

곧 파묘되어 이렇듯 마련된 가족묘역에 봉안될 준비를 하고 있다네요.

 

그리되면, 흥친왕무덤 앞을 지키던 석물들은 제 자리, 설 자리를 잃어

서울역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한 운현궁의 석물들처럼 옮겨올까요.

이러저러한 속사정만 담아둔 채 . . .  

 


 


 

그러나저러나,

나어두가 새겨진 고석 4개로 떠받치고 있는 이 큼지막한 상석에

들고 간 소주 몇 잔 올리고 엎드려 절하면서 참 많은 무상함을 . . .

허기지고 쓴 가슴 안고 돌아섰습니다.

봄날은 가까운데 바람결은 차갑기만 했던 날이지요.

 

운현궁의 봄날은 . . .

 


 

 

 

 

 

 

 

 

 

 

 

 

 

 

 

 

 

 

 

  

 

 

****  운현궁家의 가계도 ****

 

 

                                              인조(仁祖; 1595-1623-1649)

 연령군(延齡君: 숙종의 6남, 1699-1719)                   

            │                                        │

 낙천군(洛川君: 선조의 7대손, 1720-1737)                              

           ├ 계자                          인평대군(隣平大君: 1622-1658, 인조 3남)

           │                                        │

           │                                        │        

 은신군(恩信君: 장조의 4남, 1755-1771)          이병원(李秉源: 인평대군의 5대손)

           ├ 계자                                   │

           │                                        │

 남연군(南延君: 李球, 인평대군의 6대손, 1788-1836)  ------

 

 

 ┌───┬──┴─┬────┐

흥녕군  흥완군   흥인군  흥선군

興寧君    興完君    興寅君    興宣君

(李昌應) (李晸應)  (李最應)  (李昰應):1820-1898

                      ┌───┼────┐

                    서자       장남        차남   

                   完恩君   完興君    翼成君

                   (載先)  (載冕, 興王)  (載晃, 高宗) ── 익종(翼宗)에 입적

                            1845-1912

                        ┌──┴──┐

                     李埈鎔     李문(+汶)鎔 

                     (永宣君)       1882-1901

                        1870-1917                           

                          

                           │                     

            계자 ─-  李鍝 ─── 부인: 박찬주(박영효:1861-1939 의 손녀)

                  (의친왕 李堈의 차남)      1914-1995

                       1912-1945  

                          

                          

                    ┌──┴──┐

                    李淸         李淙

                1936-         1940-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