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단원 김홍도 - 그림 감상

Gijuzzang Dream 2008. 7. 11. 18:37

 

 

 

 

 우아한 취미 ‘서화 감상’

 

 

김홍도의 작품 ‘그림 감상’을 보자. 유건을 쓴 유생들이 둘러서서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워낙 단순한 그림이라 그림 자체에 대해서는 달리 설명할 것이 없다.
 

김홍도의 풍속화도첩 '그림감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작자 미상의 ‘후원아집도(後園雅集圖)’는 연못까지 있는 부유한 양반가의 후원을 그린 것이다.

왼쪽에는 바둑이 한창이다. 그 오른쪽 소나무에 기댄 두 사람을 보기 바란다.
두루마리를 펴서 감상하는 장면이다. 아마도 그림이나 글씨를 보고 비평하는 중일 것이다.

 

'후원아집도' 작자미상, 19세기

  

안평대군 서화 소장품 어마어마

 

이처럼 서화를 감상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있던 일이다.

하지만 그 농도는 다르다. 이 부분을 약간 검토해 보자.

 

세조 때 인물인 신숙주의 ‘화기(畵記)’란 글은 안평대군의 어마어마한 서화 소장품에 대한 기록이다.

‘화기’를 통해 조선전기 서화의 수집과 감상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서화들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와 조선전기 서화가의 작품도 전해지는 것은 몇 안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전쟁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궁중에 소장된 책과 서화, 골동품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또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판이니, 민간에서도 서화를 챙길 여유가 없다.

이래서 대부분이 망실된 것이다.

 

서화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다.

이 문제를 조금 살펴보자.

 

박지원의 글 중에 ‘필세설’이란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시커멓고 우묵하게 생긴 돌덩이 하나를 골동품이라고 하며 팔러 다니는데,

그게 무슨 골동품이냐며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 연암의 친구 중 서상수란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이 그 물건을 보더니, 단박에 “이것은 필세(붓 씻는 그릇)다.”라 하고는

그 재질과 생산지를 따지더니, 보물이라면서 거금을 던지고 소유해 버린다.

 

연암은 이 글에서 서상수의 높은 안목을 칭찬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인즉 “처음 시작한 공로는 있지만 감상안은 투철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한다.

 

 

18세기 서화 · 골동 수집의 선구자 김광수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김광수부터 골동품과 서화의 감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만은 틀림없다.

김광수는 김동필의 아들인데, 김동필은 소론 온건파로서 영조의 탕평책에 협조하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조판서에 이른 인물이다.

 

김광수는 “감식안이 신묘하여 한 물건이라도 마음에 들면 가산을 기울여 후한 값을 치렀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소장품의 대부분이 중국 수입품이란 것이다.

19세기의 서화가 조희룡은 김광수를 두고

“사람됨이 소탈하고 우아하여 집 재산을 기울여서 멀리 연경에서 고서 · 명화 · 벼루 · 먹 · 골동품 등을

많이 사들여 종일토록 그 사이에서 읊조리고 완상하였다.”라고 했으니,

김광수는 서화와 예술품, 골동품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알았던 사람이었다.

 

김광수는 1696년 출생이고 사망한 해는 모른다.

대체로 영조 일대를 살았을 것이고, 좀 오래 살았다면 정조의 치세도 경험했을 것이다.

김광수가 서화 골동을 소장하고 또 애호하는 취미의 선구자라면,

조선후기의 서화 골동 취미는 18세기 이후의 산물인 것이다.

 

김광수에게서 특별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북경에서 서화와 골동품을 수입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주목해 보자. 조선은 병자호란 이래 청을 섬기게 되어 여전히 북경에 사신단을 파견했다.

청은 조선을 의심하여 조선 사신단을 숙소에 묶어 놓고 내보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세기 중반에 와서 청 체제가 안정되자 조선의 사신들은

비로소 서적과 서화, 골동의 거대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유리창 거리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거창한 규모의 서화와 골동품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최초의 대량 구입자가 바로 김광수였던 것이다.

 

이 수입 서화와 골동은 국내의 생산을 자극했다.

도화서와 선비 화가들의 작품이 쏟아져 나와 감상과 품평의 대상이 되고,

급기야 예술품 수집가들의 소장 대상이 되었다.

18세기를 지나면서는 그 풍조를 비판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18세기의 문인 이정섭은 이런 풍조를 비판하였다.

“요즘 사람들은 고서화를 많이 소장하는 것을 청아한 취미로 삼아 남에게 비단 한 조각이라도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떳떳하지 못한 온갖 수단으로 기필코 구해 농짝을 가득 채우고 진귀한 보배인 양

자랑을 한다.” 

 

이제 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하고 그것에 대해 지식을 쌓아, 그림이나 글씨 혹은 골동품을 보면

거기에 대해 진위를 가리고 비평을 하는 것은 양반들의 독특한 문화가 되었다.

 

서화 수집가이자 비평가인 남공철(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멋있게 포장했다.

“정자를 용산과 광릉 사이에 지어두고 매화, 국화, 소나무, 대나무를 많이 심어

간소한 차림으로 나가서 한가롭게 거닐었다.

손님이 찾아오면 향을 사르고 단정히 앉아 경전과 역사에 대해 토론하였고,

곁에 고금의 법서(法書)·명화·골동품을 두고 품평하고 감상하였으니,

마음이 담박하여 세상의 영리를 바라지 않았다.”

 

서화와 골동을 품평하고 감상하는 것을 아주 고상한 삶의 형태로 보고 있는 것이다.

 

 

광통교서 산 그림을 자기 작품이라 속이기도

 

이런 풍조로 인해 별별 희극이 다 벌어졌다.

 

다산 정약용이 이정운이란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다.

 

보내주신 신선 그림은 대릉(이정운이 살던 곳을 말함)에 계시는 여러분의 그림은 아닌 듯싶은데

혹 광통교에서 사 오신 것은 아닙니까?

어떤 신선이기에 눈은 순전히 욕심으로 불타 있고 얼굴은 순전히 육기뿐이니 말입니다.

우열을 비교해 봤자 반드시 하등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림으로 승부를 걸려면 반드시 우리 모임의 벗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대면하여

직접 그린 것만이 시합에 응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워야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로 간사스러운 폐단이 있어 두루 방어할 수 없을 것이니, 우스운 일입니다.

 

이정운은 다산과 같은 서클에 든 사람이고,

이 서클은 그림을 그려서 서로 돌려보며 품평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위의 그림도 그런 그림 감상, 품평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이정운은 그림에 별 솜씨가 없어 광통교에서 파는 그림을 사와서

자기 그림이라고 남에게 돌려보였던 모양이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놓여 있던 다리다.

추측건대 18세기 후반에 광통교에 그림을 걸어놓고 파는 상인이 생겼고,

서울 시민들은 집치레 그림을 여기서 구입하였다.

이정운은 요즘 말로 하자면 이발소그림을 사서

동료들에게 자신의 것인 양하고 보냈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다산은 또 윤참판이란 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윤참판이 자신에게 그려 보내준 난초와 매화 그림을 격찬한 뒤 장난조로 다시 이정운을 비난한다.

 

“오사(이정운)께서는 언제나 광통교 위에서 걸어놓고 파는 하찮은 그림을 사다가

사중에서 일등을 하려고 하니 이러한 사실을 시험관에게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정말 웃음이 터지는 일입니다.”

 

이정운의 가짜 그림은,

그림을 그려 동료들 간에 돌려 보이고 품평하는 풍조가 낳은 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이발소에 가면 물레방아가 돌아가는 시골풍경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 그림을 보며 지루한 이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이발소그림을 굳이 예술사조로 따지면 낭만주의 풍이다.

이발소그림이 다루는 가장 흔한 제재,

곧 목가적 풍경이나 장엄한 풍광이 낭만주의 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얼마 전 퇴근길에 보니 길거리에 그림을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이발소그림이었다.

반가운 생각이 왈칵 들었다.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천천히 그림을 보았다.

배운 사람들은 이발소그림을 한 마디로 폄하하지만,

이른바 제대로 된 예술품 대접을 받는 그림은 값이 너무 비싸 구입하기 어렵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발소그림이야말로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이상향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김홍도의 ‘그림 감상’을 보고 절로 떠오른 생각이다.

그런데 ‘그림 감상’ 속의 그림은 어떤 그림이었을까? 궁금하다.

-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울신문, 2008-07-07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