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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조선의 인물, 조선의 책] 16. 홍대용과 유리창(琉璃廠)

Gijuzzang Dream 2008. 7. 7. 21:40

  

 

 

 

 

2006.11.21. 561호 (p 88~90)

 

 [홍대용과 유리창(琉璃廠)]

중국 지식인들과 세상을 논하다

사신단에 끼여 베이징행 …

문학·철학·역사 등 주제로 이야기꽃 피우고 담화 내용 책으로

 

중국 사신단에 자원한 홍대용은 베이징 유리창에서 많은 중국 지식인들을 만나 친분을 맺었다.

중국으로 파견된 사신행렬을 그린 <항해조천도>의 일부.

 

영조 41년 을유년 겨울, 곧 1765년이다.

이해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숙부 홍억(洪檍)을 따라 베이징에 간다.

홍대용 이전에도 사신단(使臣團)은 수없이 많았고, 또 홍대용처럼 공식 사신이 아니라

사신의 자제로서 오로지 중국 유관(遊觀)을 위해 사신단에 끼여 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홍대용의 베이징행만이 돌출적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베이징행이야말로 18세기 후반 이후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조선의 학문과 예술, 문학에 거대한 파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른다섯의 젊은 홍대용은 왜 그 멀고 고단한 여로를 마다 않고 베이징으로 가고자 했던가.

아시다시피 그에게는 주어진 임무가 없었다.

여느 사신의 자제처럼 이국의 산천과 풍물을 즐기고자 하는 관광이었던가. 물론 그렇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베이징에 가서 조선에서 보지 못했던 문물을 즐기려 하는 호기심,

곧 기이한 구경을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30대 중반의 조선 지식인 홍대용에게는 기이한 구경을 넘어 간절한 염원이 있었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 중국의 지식인을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심회를 시원하게 토로해보는 것이었다.

 

 

중국 관료들에게 대화 상대 소개 청탁

 

1766년 1월1일 홍대용은 조선 사신단의 조회(朝會), 곧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조회가 끝난 뒤 우연히 중국인 관료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눈 홍대용은

중국 관리의 명부인 진신안(縉紳案)까지 구입해 두 사람의 이름이 오상(吳湘), 팽관(彭冠)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열흘을 수소문한 끝에 그는 팽관의 집으로 찾아간다.

팽관의 집에서 오상도 함께 만나 길게 이야기를 나누지만, 홍대용은 만족하지 못한다.

두 사람의 학문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언변과 취미도 볼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증을 느낀 홍대용은 다른 사람을 소개해줄 것을 청한다.

 

“귀인들께서는 사례(事例)에 구애되시므로 감히 다시 만나뵈올 기회를 바랄 수가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아름다운 선비 한 분을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오상, 팽관 두 사람은 한참 상의한 끝에 이런 제안을 한다. 팽관의 말이다.

청나라 선비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

“좋은 선비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면 유리창(琉璃廠)에 사는 한 벗을 소개해줄 터이니, 찾아가 만나보심이 어떨지요?”

“그렇게 일러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벗은 누구이며, 또 언제 찾아가야 하는지요?”

 

“유리창길 남쪽 미경당(味經堂) 서점에서 26일에 장감생(蔣監生)과

주감생(周監生)을 만날 수 있도록 약속해 놓을 것이니, 거기서 한번

이야기를 해보시는 게 어떨지요?”

“정말 좋습니다.

장감생과 주감생은 모두 족하(足下)의 친척인지요?”

“장감생은 친구이고, 주감생은 학도(學徒)입니다.”

 

약속대로 홍대용은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당 책방을 찾아간다.

거기서 과연 장본(蔣本), 주응문(周應文), 팽광려(彭光盧)

세 사람을 만난다.

이 세 사람과의 대화를 기록한 것이 ‘담헌서(湛軒書)’의 ‘장주문답(蔣周問答)’이다.

하지만 홍대용은 이들과의 만남에서도 자신이 기대했던 수준높은 대화를 끌어내지 못한다.

 

인연은 이상한 곳에서 맺어지게 마련이다.

2월1일 홍대용과 같이 베이징에 갔던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원시경(遠視鏡),

곧 돋보기를 사기 위해 유리창에 갔다가 중국 선비 둘을 만난다.

그중 한 사람은 근시안경을 낀 ‘용모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인의 기운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기성이 말을 붙였다.

“나의 친지 중에 안경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시장에서 진품 안경을 사기란 참 어렵군요.

족하께서 끼고 있는 안경이 그 사람의 나쁜 눈에 꼭 맞을 것 같으니, 나에게 팔면 어떻겠습니까?

족하께서는 여벌이 있을 수도 있고, 또 새로 구하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성의 말에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냉큼 안경을 벗어준다.

“그대에게 안경을 사오라 부탁한 분도 나처럼 눈이 나쁜 모양이구려.

내 어찌 안경 하나를 아까워하겠소. 팔 것까지도 없겠소이다.”

말을 마치자, 홀홀히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뜬다.

이기성은 남의 물건을 탐내 대가 없이 차지한 꼴이 됐다. 쫓아가 안경을 돌려주며

“농으로 건넨 말입니다. 원래 안경을 원한 사람이 없으니 이 안경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자,

그 사람은 약간 언짢아하면서 “이 물건은 보잘것없는 것이고, 또 동병상련의 뜻이 있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좀스럽게 구는가?” 하며 완강히 거절한다.

이기성이 부끄러워 안경 이야기는 다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내력을 물으니,

저장성(浙江省)의 거인(擧人)으로 과거를 보려고 막 베이징에 도착해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에 숙소를 정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중국에서 맺은 인맥과 많은 실학자들 교류

 

이기성은 돌아와 홍대용에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해준다.

홍대용은 두 사람의 거동과 언론에 감탄하고 이기성을 재촉해 건정동으로 그 둘을 찾아간다.

한 사람의 이름은 엄성(嚴誠),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반정균(潘庭均)이었다.

해를 넘겨 서른여섯이 된 홍대용과 서른다섯의 엄성, 스물다섯의 반정균은

그날로 국경을 초월한 벗이 되어 문학과 철학, 역사, 서책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운다.

 

이들과의 담화를 기록한 것이 ‘담헌서’의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이다.

충남 천안시 수신면에 있는 홍대용의 묘

 

건정동에서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이 만난 사건은

조선 후기 지성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조선 건국 이후 수많은 조선의 인물이 압록강을 건너 베이징 땅을 밟았지만, 조선의 지식인 개인이 중국의 지식인 개인을 만나 담화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20세기 이후 수많은 한국인, 그리고 한국 지식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밟았지만, 한 사람도 미국 지식인을

만나 담화한 적이 없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런 이상한 관계가 홍대용 이전의 조선과 중국의 관계였던 것이다.

홍대용은 아마도 중국 지식인을 개인적으로 만난 최초의 경우일 것이다.

 

1766년 건정동에서 홍대용이 맺은 인맥을 통해

훗날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박제가(朴齊家), 박지원(朴趾源) 그리고 김정희(金正喜)가

중국의 학자, 문인들과 만나 우정을 쌓고 학문과 문학, 예술을 논할 수 있었다.

이런 접촉이 궁극적으로 조선 후기 학계와 예술계의 변화를 가져왔으니

홍대용과 엄성, 반정균의 만남이야말로 조선 후기 지성사의 한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홍대용이 장본 · 주응문 그리고 엄성 · 반정균을 만나게 된 계기를 마련한 공간이

다름 아닌 유리창이다. 왜 다루(茶樓)와 주점(酒店)이 아니고 유리창이었던가.

홍대용 이전의 사신단은 유리창에 드나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는데

어떤 이유로 홍대용만 유리창에서 중국의 지식인들을 만날 수 있었던가.

 

 

‘유리창’은 서적과 골동품 백화점 같은 곳

 

지난번 이의현(李宜顯) 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명나라 때부터 조선 사신단은

일단 베이징에 들어가면 사신의 공식 숙소, 곧 회동관(會同館)을 벗어날 수 없었다.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한 이후로는 조선에 대한 의심이 짙어

조선 사신들의 출입에 대한 감시가 더욱 엄중했다.

그러던 것이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천하가 안정되고 또 조선이 달리 소란을 일으킬 염려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금령이 느슨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약 회동관을 벗어나 유람을 갈 경우 회동관에 사용할 물을 길러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베이징 시내로 나갔다. 물론 공공연하게 회동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사신단을 따라온 사신의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의 위세를 믿고 실무를 담당하는 역관에게 압력을 넣어 베이징 시내 곳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사고를 일으키면,

역관들이 나서서 회동관에 뇌물을 바치고 묵인해줄 것을 부탁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역관들은 한사코 사신 자제들의 베이징 시내 출입을 막았다.

 

이것을 아는 홍대용은 미리 뇌물을 준비하고 역관을 설득해

자신이 직접 회동관 아문(衙門)과 교섭해 베이징 시내 출입을 허락받는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뇌물은 통하는 법이 아니던가.

홍대용의 유리창 출입도 뇌물로 가능했던 것이다.

 

이제 홍대용의 말을 빌려 유리창의 역사와 모습을 떠올려보자.

 

유리창은 유리기와와 벽돌을 만드는 공장이다.

무릇 푸르거나 누런 잡색(雜色) 기와와 벽돌이 모두 유리처럼 빛과 윤을 내므로,

궁정에서 쓰는 각색 기와와 벽돌은 유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공장 건물을 창(廠)이라 부른다. 유리창은 정양문(正陽門) 밖 서남쪽 5리쯤에 있다.

 

유리창 가까운 길 양쪽에는 점포가 늘어서 있다.

동쪽과 서쪽에 여문(閭門)을 세우고 ‘유리창(琉璃廠)’이란 편액을 달았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시장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라 한다.

 

유리창의 ‘창(廠)’은 원래 공장이란 뜻이다.

위의 공역(工役)이란 수공업을 말하는 것이고, 곧 공장이란 뜻이 된다.

하지만 유리창이 유리벽돌 공장으로 유명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곳은 현재 알려져 있다시피 서적과 서화 골동품시장이었다.

유리창의 시장에는 서적과 비판(碑版), 정이(鼎彛)·골동품 등 일체의 기완(器玩)과 잡물(雜物)이

많이 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남방에서 온 수재(秀才)로서 과거를 보고 벼슬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유리창에서 노니는 사람들 중에 왕왕 명사(名士)도 있다.

 

유리창 시장의 길이는 5리 가량이다.

누각과 난간의 호사스러움은 다른 시장에 떨어지지만, 진귀하고 괴이하며 교묘한 물건들이

가득 차 흘러넘칠 정도로 쌓여 있고, 시장의 위치 역시 예스럽고 아름답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으면 마치 페르시아의 보물시장에 들어간 것처럼

단지 황홀하고 찬란한 것만 보일 뿐, 종일 다녀도 한 물건도 제대로 감상할 수가 없을 정도다.

 

서점은 일곱 곳이 있다. 3면의 벽마다 십몇 층의 시렁을 매었는데,

상아로 만든 책 표찰이 질서정연하고, 모든 책은 책마다 표지가 붙어 있다.

서점 한 곳의 책은 대충 헤아려보아도 수만 권을 넘는다.

얼굴을 들고 한참 보고 있노라면, 책의 제목을 다 보기도 전에 눈이 어질어질해진다.

 

 

작은 나라 조선에서 온 젊은 선비 홍대용은

유리창의 서화 골동과 서적, 곧 문화상품의 규모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페르시아의 보물시장을 떠올리게 하는 서화와 골동품, 현기증을 일으키는 수만 권의 서적은

그에게 거대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홍대용이 베이징에 갔을 당시 조선에는 서점이 없었다.

중종과 명종 때 조정에서 서점을 설치하자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서점은 끝내 출현하지 않았다.

서적에 관한 수요가 적어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수요는 있었다.

그 수요를 충족시키고 더 자극할 만한 의지와 정책이 없었던 것이다.

서점 대신 서적 유통을 맡았던 것은 개인적으로 서적 매매를 중개하는,

서적 거간꾼인 서쾌(書쾌)였다. 이 서쾌가 18세기 말까지 서적 유통을 장악했던 것이니,

조선에는 18세기 말까지 특정 공간을 점유한 서점은 없었다. 이런 판국에 수만 권의 책을 쌓아놓고

판매하는 거대한 서점을 보았으니 홍대용이 놀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책에 대한 열망 국경 뛰어넘어

베이징서 많은 책 사고도 귀국 후 중국 친구들 통해 재차 구입 시도

 충남문화재자료 제349호로 지정된 충남 천안시의 ‘홍대용 선생 생가터’.

풀만 무성해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베이징(北京)의 유리창(琉璃廠)은

18세기 말 규모를 더 키워 그야말로 천하의 서적이 집적(集積)되는 거대한 서적시장으로 성장한다.

 

그런데 베이징에는 유리창 외에 다른 서적시장도 있었다. 융복사(隆福寺)가 그곳이다.

융복사는 명나라 경태(景泰, 1450~1457)의 재위기간에 세워진 절이다.

이 절의 넓은 마당에 8·9·10이 드는 날 베이징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상품은 서화와 골동품, 서적으로 유리창과 같았다.

다만 유리창이 상설시장이라면, 융복사는 정기시(定期市)였던 것이다.

 

홍대용은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재(味經齋) 서점을 방문하고,

사흘 뒤인 29일 역관 조명회(趙明會)와 수레를 타고 융복사로 간다.

패루(牌樓) 아래에 이르러 수레에서 내렸다.

문에 들어서자 사방 백 보 가량 되는 넓은 마당이 있었다.

마당 주위로 천막을 쳤는데, 일용의 온갖 물화가 없는 것이 없었다.

그 찬란한 모습이 마치 오색구름과 아침노을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사람과 상품이 그득히 쌓여 걸어서 지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몇만 명의 사람이 지껄이는데도 다만 큰 퉁소 소리처럼 은은한 소리만 들릴 뿐,

크게 외치거나 부르거나 놀라거나 꾸짖거나 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그 사람들의 차분하고 조용한 풍습과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만 명의 인파를 뚫고 홍대용은 책을 파는 시장, 곧 유리창처럼 거창한 책시(冊市)로 파고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수천 수백 질의 서적들이 종류별로 정연하게 꽉 들어차 있다.”

 

이곳 역시 유리창과 같은 책의 바다였던 것이다.

 

 

유리창과 융복사는 큰 규모의 서적시장

 

융복사 책시장에서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홍대용을 담당하던 서반(序班)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서반은 조선 사신단에 서적과 서화 따위를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하급 관리이자 상인이다.

서반이 홍대용을 보고 어색하게 웃자, 홍대용도 따라 웃고 말을 건넸다.

1939년 발행된 ‘담헌집’(맨 오른쪽)과

홍대용의 책을 현대에 맞게 꾸미거나 그의 사상을 다룬 책들.

 

“내 주머니에 천금이 있어 이곳의 수천 수백 질의 책을 당신 모르게 깡그리 다 사가지고 가려 하니,

그대는 나를 어쩌시려우?”

“나 역시 책을 팔려고 왔으니, 그대가 원하시는 대로 사서 가시우.”

 

서반은 홍대용이 유리창과 융복사에 갈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책을 사는지 엿보았던 것이다.

홍대용이 좋은 말로 따라오지 말라고 달래보았지만 당최 듣지 않았고,

홍대용이 베이징 시내를 나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하여 늘 길을 막고 나서곤 했다.

홍대용은 자신과 동갑내기인 ‘부(傅)’씨 성의 서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아무리 같이 이야기해도 속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유리창과 융복사의 서적을 본 홍대용의 머리에는 어떤 생각이 오갔던가.

그는 유리창 미경재에 가득한 신간서적을 보고 주인에게 묻는다.

 

“듣자하니 중국에서는 책을 더러 토판(土板)으로 찍어내기에 비용은 적지만

일이 갑절이나 많다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나무는 쉽게 닳기 때문에 반드시 단단한 것을 골라 써야 하지만, 토판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중국에도 주자(鑄字)와 철판(鐵板)이 있는지요?”

“모두 목판을 쓰고, 철판과 주자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토판은 흙을 빚어 도자기처럼 구운 활자로 조판한 것일 터이다.

토판 인쇄에 대해 묻지만 대답은 모호하다. 흥미를 끄는 것은 두 번째 질문의 답이다.

중국에는 금속활자 인쇄가 없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민족의 문화를 말하는 사람치고 언필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떠들지만,

그 활자로 찍은 책이 과연 유리창과 융복사의 서점에서처럼 쌓여 팔렸던가.

아니, 책시장이란 것이 있기나 했던가.

 

서신에 원하는 책 제목 담아

 

홍대용은 유리창과 융복사란 책의 바다에서 어떤 책을 구입했던가.

불행하게도 구입한 책의 목록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가 어떤 책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추측할 수 있다.

 

홍대용은 베이징에 도착한 뒤 1월20일 오상(吳湘)과 팽관(彭冠)을 만났을 때

‘독례통고(讀禮通考)’ 속편이 있는지 묻는다.

이에 팽관은 금시초문이라면서 도리어 홍대용에게 책의 저자에 대해 묻는다.

홍대용이 중국 서건학(徐乾學, 1631~1694)의 저작인데 아직 보지 못했느냐고 하자,

팽관은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홍대용은 오상과 팽관을 두고 학문이 별로 볼 것이 없다는 평가를 하는데,

아마도 ‘독례통고조차 모르다니’ 하는 심경이 아니었을까?

 

홍대용은 이어 1월26일 유리창의 미경재에서

장본(蔣本) · 주응문(周應文) · 팽광려(彭光盧)를 만났을 때

주응문에게 다시 ‘독례통고’를 비롯한 서적에 대해 묻는다.

 

“ ‘목재속집(牧齋續集)’이 있는지요?”

“아직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 ‘독례통고속집’은 있는지요?”

“ ‘독례통고’는 본조의 서건학 상공(相公)의 저서인데 속집은 없습니다.”

 

두 종의 책을 묻고 있는데 ‘목재속집’은 전겸익(錢謙益, 1582~1664) 문집의 속편이다.

전겸익의 문집 ‘초학집(初學集)’이 조선에 전해져 조선 후기 문학비평과 창작에 큰 충격을

던졌던바, 그 속편을 찾고 있는 것이다.

 

홍대용이 집요한 관심을 보이고 있는 ‘독례통고’는 상례(喪禮)에 관한 고금의 설을 종합한

예서(禮書)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 책 역시 조선에 전래돼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홍대용은 이 두 저작을 읽고 그 속편을 베이징 유리창에서 찾았던 것이다.

 

홍대용은 엄성, 반정균과 건정동에서 필담을 나눌 때도 역시 ‘독례통고’의 속편을 찾았다.

또 여유량(呂有良, 1629~1683)과 같은 항청(抗淸)의식을 가졌던 지식인의 문집과

명이 멸망한 뒤 중국 남쪽에 일시 잔존했던 남명(南明) 정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찾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전겸익 문집의 주해본 유무에 대해 문의했고,

전겸익이 원래 항청을 표방하다가 뒷날 청나라에 항복해 신하가 됨으로써

절조를 잃은 사람이라는 정보를 얻기도 한다.

 

홍대용은 귀국해서도 베이징에 있는 친구를 통해 서적 구입을 시도했다.

 

그는 엄성(嚴誠)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 쪽의 사신이 계속 파견되어 중국의 서적이 제법 많이 흘러 들어오고는 있지만,

오직 ‘황면재집(黃勉齋集·朱子의 제자인 黃幹의 문집)’만은 4, 5권의 소본(小本)이 있을 뿐입니다.

듣자하니, 전집의 예(禮)를 논한 글에 볼만한 것이 많다 하기에

해마다 북경의 저자에서 구입하려고 했지만, 끝내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 밖에 ‘소자전서(邵子全書)’와 ‘천문류함(天文類函)’ 두 책은 평생 보기를 원한 것이지만

그 권수가 적지 않을 것이고, 또 설령 있다 해도 어떻게 멀리 부칠 수가 있겠습니까?

 

베이징의 친구에게 서적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좁은 조선으로 돌아온 지식인 홍대용에게 그가 목도했던 베이징의 서적시장은

그야말로 갈망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른바 홍대용의 실학적 저술,

곧 ‘주해수용(籌解需用)’ ‘임하경륜(林下經綸)’ ‘의산문답(醫山問答)’은

베이징의 서적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베이징의 서적시장 없이는 저술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 구체적인 상관성은 앞으로 정밀하게 따져야겠지만.

중국 베이징 유리창의 상인과 물건들. 청나라 때 서적, 골동품 시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유리창 이곳은 지금도 서울 인사동 같은 문화의 거리로 통한다.

 

대용은 귀국 후

세손익위사(世孫翊衛司) 시직(侍直)이란 벼슬을 한다.

세손은 곧 뒷날의 정조(正祖)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죽었기에 세손이 되었던 것이다.

 

세손익위사를 계방(桂坊)이라 하는데,

그는 세손을 보호하면서 가르치는 일을 맡았던 것이다.

 

그때의 일기가 ‘담헌서’에 실린 ‘계방일기(桂坊日記)’다.

 

영조 51년(1775) 3월28일 세손, 곧 뒷날의 정조와 홍대용이 나눈 대화의 일부를 보자.

 

“계방(桂坊·홍대용을 말함)은 베이징에 가본 적이 있소?”

“가보았나이다.”

“어떤 일로 가보았소?”

“신의 숙부 전 승지 신(臣) 홍억(洪檍)이 을유년 사행 때

서장관이었는데, 신이 자제비장(子弟裨將)으로

수행했나이다.”

“그때 상사·부사는 누구였소?”

“상사는 순의군(順義君)이었고,

부사는 김선행(金善行)이었나이다.”

“오갈 때 무슨 옷을 입었던가?”

“다른 비장처럼 전립(氈笠)을 쓰고 군복(軍服)을 입었습니다.

돌아올 때는 포립(布笠)을 쓰고 도포를 입었습니다.”

동궁(東宮)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백면서생이 난데없이 군복 차림이라 아주 쉽지 않은 일이니, 또한 호사가라 할 만하겠소.”

……

“서사(書肆)는 어떠하던가?”

“유리창(琉璃廠)에 예닐곱 개의 서사가 있어 과연 직접 가서 보았는데, 사방에 판자로 시렁을

설치해놓았고, 책을 종류대로 표지를 정확히 붙여 질서정연하게 진열하고 있었습니다.

한 서점에 간직한 책만 해도 적어도 몇만 권 아래는 아니었습니다.”

 

 

정조는 호학의 군주였다. 정치적으로 노론의 심한 견제를 받고 있던 즉위 전의 정조는

오로지 근신하면서 학문에 전념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정조는 비록 베이징 땅을 밟지는 못했지만, 홍대용에게 베이징 유리창의 서점에 대해 물을 정도로

베이징 지식시장의 동향을 꿰고 있었던 것이다.

 

 

학문적 제자인 정조에게 베이징 책시장 소개

 

정조는 청나라가 ‘사고전서’를 편찬하기 위해

중국 최대 출판단지인 저장(浙江)에서 서적을 수집하고 엮은 ‘절강채진유서총록(浙江採進遺書總錄)’이라는 책 목록을 구입하고, 여기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다시 ‘내각방서록(內閣訪書錄)’이란 목록을 엮는다.

 

이 목록에 의거해 책을 수입한 정조는

18세기 후반 베이징 책시장의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박학한 독서가가 된다.

 

홍대용이 베이징 지식시장에서 경험한 충격으로

낙후한 조선을 개혁할 학문, 곧 실학을 궁리했다면,

정조는 뒷날 베이징에서 수입된 책이 조선의 지식인을 오염시키고 주자학을 해체한다고 판단해,

베이징 서적시장에서의 수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의 저작을 검열해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다.

동일하게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을 읽었지만,

홍대용과 정조가 나아간 방향은 전혀 달랐던 것이다.

- 강명관 부산대 교수 · 한문학 hkmk@pusan.ac.kr

- 주간동아

 

 

 

 

 

 

 

홍대용의 <의산문답(毉山問答)>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ㆍ1731~83)은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36살에 연행사를 따라 중국에 다녀온 연행(燕行)을 평생 보람으로,

18세기를 살았던 실심실학자였다.

2,600여 쪽에 이르는 국문본 <을병연행록>과 함께, 이 여행체험을 바탕으로

자기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소설 <의산문답(毉山問答)>을 남겼다.

책은 조선의 학자 허자(虛子)와 의산에 숨어사는 실옹(實翁)의 대화체로 쓰였다.

"오륜(五倫)과 오사(五事ㆍ외모와 말과 생각)는 사람의 예의다.

사람의 눈으로 만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만물은 천하며,

만물의 눈으로 사람을 보면 만물이 귀하고 사람은 천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의 처지에서 바라보면 사람과 만물은 평등한 것이다."

30년 공부로 천리(天理)를 깨쳤다던 허자가 실옹을 만나 새로운 깨달음에 이른 결론으로,

생태주의 생명사상을 일찍이 갈파한 선구적 주장이라 할 만하다.

이른바 홍대용의 '인물균(人物均)'사상이며,

사람은 물론 자연과 사람이 차별 없는 평등의 생명사상을 담고 있다.

이런 이치로 우주에는 위와 아래도 없고, 안과 밖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물 가운데 스스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사는 지구가 태양계의 중심이며 또한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여,

자연지배는 이제 자연의 대반격에 직면했다.

그러나 지구는 태양계의 중심이 아니며, 무한한 우주의 한 별에 지나지 않는다.

태양계 또한 무한한 우주의 한 별무리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별무리는 우주에 무한하다.

이것이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중심이란 따로 없다는 홍대용의 <우주 무한론>이다.

지구가 태양계의 한 중심이면서 우주의 한 중심이듯이, 내가 있는 자리가 한 중심이다.

 

이런 원리라면 역사에도 중심은 없다.

<춘추(春秋)>가 중국의 역사라면, 각 민족은 각 민족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

<의산문답>의 이른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다.

이것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 중심주의를 타파했다.

중세 보편주의를 벗어나 자기 역사를 중심에 놓는 이런 역사의 깨달음은

18세기 조선 실학에서 비로소 나타난 역사의 자각이었다.

이것은 저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이른바 호락논쟁(湖洛論爭),

곧 사람과 사물의 성질은 같은가 다른가를 다투어 온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 논쟁의

1세기에 걸친 축적이며, 조선 철학이 이른 큰 도달점이었다.

18세기 홍담헌의 고뇌는 <민통선 평화기행>(창비)과 같은 평화운동을 이어 온 

사진작가 이시우(1967~ )선생에게서는 사람 몸의 중심을 묻는 질문으로 구체화한다.

"아픈 곳이 치유될 때까지는 온통 신경이 거기에 집중되기 때문에" 몸의 중심이 아픈 곳이듯,

사회의 중심도 아픈 곳이다.

"세계의 중심 또한 전쟁과 기와와 빈곤으로 인하여 '아픈 곳' 입니다.

'아픈 곳'에 사회의 모순과 세계의 모순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시대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예술가에게 그것은 숙명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이시우 <옥중서신>)
- 김태준, 동국대 명예교수
- 2010/07/04 ⓒ 한국일보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여행을 가다>, 푸른역사, 2005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직을 정년퇴임한 김태준 명예교수

이승수 한양대 한국연구소 연구교수, 김일환 동국대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이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