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1.16.569호 (p 84~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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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문학의 기원] |
연암의 문학적 독창성 “이건 아니잖아” |
후대 연구가들 높이 평가하지만 실제론 양명좌파와 공안파 사유 빌려 |
시(詩)는 자하(紫霞)에게서 망했고, 문(文)은 연암(燕巖)에게서 망했으며, 글씨는 추사(秋史)에게서 망했다는 말이 있다.
한시는 자하 신위(申緯)에게서 더 나아갈 경지가 없어졌고, 산문은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에 와서 정점에 이르렀으며, 서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이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나에게 이 말은 범재의 슬픔으로 들린다. 천재 뒤에 태어나는 범재들에게 오를 수 없는 경지는 곧 절망이기 때문이다.
절망의 대상은 언제나 위대한 법이다. 나는 연암의 산문과 ‘열하일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본 적이 없다. 모든 연암 연구자들은 예외 없이 연암의 위대함을 말한다. 어떤 연구도 그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20세기 이후 연암을 연구한 모든 연구물은 ‘연암은 위대하다’라는 짧은 문장의 무한한 반복이다.
저서에 독서 이력 거의 안 밝혀
연암의 위대함은 그의 독창성에서 왔다고 말한다. 연암의 위대함에 말참견을 할 수 없듯, 그의 독창성 역시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불경스럽게도 그 독창성이 의심스럽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연암이란 말인가.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연암의 문학 역시 시대의 산물, 곧 그 시대 문학담론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말해 그 문학담론을 이루는 책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연암은 어떤 책을 읽었던가? 존 로크(John Locke)는 인간의 대뇌를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흰 종이라고 말했다. 백지인 연암의 대뇌에 입력된 책은 어떤 것이었던가. 도대체 그의 위대한 산문을 가능하게 한 외부의 사유, 곧 책들은 어떤 것들이었던가.
연암과 가까웠던 이덕무의 문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보면, 이덕무의 독서 이력을 손바닥 보듯 환히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연암집’을 이 잡듯 뒤져보아도 그의 독서 이력은 오리무중이다. 그가 남긴 문자에서 타인의 저작이 남긴 흔적은 찾기 어려운 것이다.
연암은 1780년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로 베이징(北京)에 파견되자 자제군관으로 동행한다. 홍대용보다 15년 뒤, 이덕무보다는 2년 뒤에 중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베이징에서의 일정은 홍대용이나 이덕무와 다를 것이 없었다. 베이징 시내를 구경하고, 홍대용과 이덕무 등이 구축한 인맥을 따라 중국인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눈다. 이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더 말하면 사족이 될 뿐이다.
연암 역시 유리창을 방문했다. 이덕무가 박지원에게 자랑했던 도옥(陶鈺)의 오류거(五柳居)를 맨 먼저 찾는다. 하지만 이덕무와 달리 연암은 유리창과 오류거의 책에 대해서 감탄하는 말을 남기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유리창에서 이렇게 말한다.
- 주간동아 -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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