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0.17. 556호 (p 94~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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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가 이의현(李宜顯)] |
중국에 사신 행차 때마다 책 사는 데 올인 |
말단 관리 ‘서반’ 통해 전량 구입 … 1720년 방문 때 51종 1328권 사 |
앞서 허균이 중국에서 책을 대량 구입했던 일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적잖이 미진했다. 그는 북경에서 책을 어떻게 구입했던가. 서점이었던가? 그러면 그가 찾아간 서점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했던 것인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사신단은 북경에서 책을 구입했지만 구입 경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이 점을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예를 통해 검토해보자.
병자호란이 끝났다. 조선 조정은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북벌 운운하면서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해보는 말이었을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거대한 제국 청(淸)의 천하 경영이 안정의 길로 접어들자 현실을 인정하고 사대(事大)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다시 사신단이 파견됐고, 책이 수입되기 시작했다. 한데 18세기 후반이면 북경 유리창(琉璃廠)의 서적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사신단이 거기서 직접 서적을 구매하지만, 아직 이의현의 시대는 아니었다.
사신들 북경 시내 나들이 자유롭지 못해
이의현은 1720년과 1732년 북경에 파견된다. 1720년에는 예조참판으로서 동지사 겸 정조사(正朝使), 성절사(聖節使)의 정사(正使)로 파견됐다. 동지사는 동지에, 정조사는 정조(1월1일)에 맞추어, 성절사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사신인데, 이때에 와서 청나라 측에서 번거롭다 하였으므로 한데 뭉쳐 파견했던 것이다.
1720년 연행(燕行) 때 이의현은 북경에서 42일 동안 체류했다. 지낸 곳은 조선 사신의 전용 숙소인 옥하관(玉河館)이었다. 이곳에 여장을 푼 이의현은 북경 시내를 마음대로 구경할 수 있었을까. 명대에는 어떠했는지 몰라도 청(淸)의 치하인 1720년이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1765년에 청을 방문한 홍대용(洪大容)의 연행일기인 연기(燕記)에 의하면, 그 전까지 북경 시내 출입을 금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또 사신단의 정식 수행원은 공무 때문에 시내를 자유로이 출입할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이의현은 태액지(太液池), 창춘원(暢春苑), 정양문(正陽門) 밖의 시가를 본 적은 있지만 문산묘(文山廟), 천주당(天主堂), 망해정(望海亭), 각산사(角山寺)를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런 곳을 방문했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다. |
나는 그가 북경 시내에서 책을 구입했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는 1720년 연행의 일기인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에서 북경 정양문 밖의 번화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가지 북경 정양문 밖이 가장 번화하고 고루가(鼓樓街)가 그 다음이다. …시가의 상점은 모두 목판(木板)을 달거나 세우고, 혹은 융으로 장막을 쳐서 좋은 이름을 붙였는데, ‘무슨 누(某樓)’, ‘무슨 가게(某肆)’, ‘무슨 포(某鋪)’라는 식이다. 일용의 음식, 서화(書畵), 기완(器玩)에서 백공(百工), 천기(賤技)까지 진열해놓고 팔지 않는 것이 없다. 희고 넓은 베를 가게 앞에 가로로 치거나, 깃대를 높이 걸어 거기에 어떤 물건을 판다고 크게 써서 붙여, 행인이 언뜻 보고도 알 수 있도록 하되, 반드시 멋있는 이름을 붙인다. 예컨대 술이라면 난릉춘(蘭陵春), 차라면 건계명(建溪茗)이라는 식이다.
아마도 공무를 보기 위해 관부(官府)로 가는 길에 시내를 통과했을 것이고, 위의 묘사는 그때 본 모습일 터다. 하지만 그가 직접 상점에 들어가 물품을 구입했을 것 같지는 않다. 훗날의 박지원이 관광객이라면,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사절인 것이다.
하지만 그는 1720년 연행 때 대량의 서적과 서화를 구입해 온다. ‘경자연행잡지’에서 책이름과 권수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51종 1328권의 서적과 서화 10종 15건을 구입했다. 1732년에도 19종 346권을 구입했으며, 다른 사람의 부탁으로 모두 20종의 책을 따로 구입한다. 1732년에는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 선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삼산논학기(三山論學記)’와 ‘주제군징(主制群徵)’ 등 천주교 서적을 받아오기도 했다.
‘서반’들 책 독점 공급으로 이익 챙겨
이 방대한 서적을 어떤 경로를 통해 구입했던가. 18세기 후반이면 당연히 유리창을 떠올릴 테지만, 1720년 연행일기에서 유리창이란 지명은 보이지 않는다. 요컨대 그는 인사동과 교보문고를 방문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서적과 서화를 구입할 수 있었던가.
‘경자연행잡지’ 끝 부분에서 그는 구입했던 서적의 목록을 죽 나열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 중에서 잡서(雜書) 몇 가지는 서반(序班)들이 사사로이 준 것이다.”
즉 점잖은 체면에 좀 무엇한 책들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아니라, 서반들이 공짜로 주기에 받은 것이라는 해명이다.
바로 이 서반이 서적의 공급자다. 서반에 대한 그의 증언을 보자.
서반이란 곧 제독부(提督府)의 서리다. 오래 근무하면 간혹 승진해 지현(知縣)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람이 북경의 사정을 알려면 서반을 통해 알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집은 거개 남방(南方)이다. 서책은 모두 남방에서 오고, 이자들이 매매를 맡는다. 우리나라의 거간과 같다. 역관들이 중간에 끼여 있어, 사신이 책을 사려 하면 반드시 역관들을 시켜 서반에게 구하게 한다. 이들은 서로 이익을 보기 때문에 친분이 아주 깊다.
곧 서반이란 우리나라의 서리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우리나라 사신에게 서적을 전매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 사신이 구입한 책은 모두 서반을 통한 것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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