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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사도세자묘를 참배하고 돌아오는 정조 일행을 그린
‘수원능행도’의 일부.
정조는 “보지 않은 서적이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책을 좋아한 호학(好學)의 군주였다.
즉위하기 전 세손(世孫) 시절 ‘절강서목(浙江書目)’을 입수해
체계적으로 베이징(北京)의 서적을 수입했으며,
즉위 후 즉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구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가
대신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을 선발해 경전과 역사에 관한 강의를 주도했다.
이 호학의 군주가 남긴 거창한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는
그가 경학과 역사, 문학에 대한 당대의 쟁점을 요령 있게 파악하고 있는
최고의 학자였음을 입증하기에 족하다.
주자학과 배치되면 이단적 사유로 몰아
이런 정조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인식은 사뭇 긍정적, 동정적이다.
개혁군주 정조가 일찍 죽지 않아 그의 개혁 프로그램이 성공했더라면
아마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짐작은 가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정조는 근대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정조와 근대를 연결하는 그 생각조차 끔찍하다.
정조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이 주자학에 의해 완벽하게 작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책을 좋아하기는 했으되,
지배 이데올로기 곧 주자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유를 담은 책들을 철저히 탄압했던
인물이다. 나에게 정조는 책과 사상의 탄압자로 기억될 뿐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홍대용이 베이징에 들어갔을 즈음부터
베이징 유리창에서 막대한 양의 서적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 서적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사유들이 다량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 명말청초의 책들은 주자학과 대척적인 이단적 사유를 담고 있었다.
천주교 서적과 서양의 지리서, 과학기술서, 양명학과 양명좌파 서적, 고증학 서적,
그리고 문인 지식인들을 가장 혹하게 했던 ‘금병매’ 같은 소설과
현대의 수필에 가까운 소품문(小品文)이 그것이다.
소품은 비교적 사소한 제재를 경쾌하고 발랄하며 서정적인 문체로 쓴 산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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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초상화.
이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는
근원적으로 주자학과 불화의 관계에 있었다.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 서적과 양명학, 양명좌파, 고증학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금병매’ 같은 소설은 주자학이 은폐, 억압하려고 했던 성욕과 육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그것이 인간의 리얼리티였으니, 이 리얼리티 앞에서 조선의 독자들은 열광했던 것이다.
소품 역시 과거의 도덕적이며 장중한 산문이 언어화하지 않았던
세계를 미세한 눈으로 관찰하고, 그 결과를 언어화함으로써
주자학의 초월적 리(理)가 실제 세계에서 관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은근히 말하고 있었다.
주자학과 배치되는 사유들이 18세기 이래 베이징에서 쏟아져
들어왔음에도 이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전면적 대응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식인들이 먼저 그 사유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이단적 사유의 출현에 대해 가장 먼저 우려를 표한 사람이
다름 아닌 정조였다. 1784년 정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明)·청(淸) 이래의 문장은 난해하고 괴이하며,
뾰족하고 시큼함이 많아 나는 보고 싶지 않다.
요즘 사람들은 명·청인의 문집 보기를 좋아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재미가 있는데도 내가 그 재미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명말청초 문장의 특징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면서
그것을 탐독하는 현상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물리적 통제는 없었고, 또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런데 1785년 이승훈(李承薰)·정약전(丁若銓)·정약용(丁若鏞)·이벽(李檗) 등 남인의 자제들이
중인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고 의식을 거행하다가
형조의 금리(禁吏)에게 적발된 추조(秋曹·형조의 별칭) 적발사건이 일어나자 사정이 달라졌다.
학문적 호기심의 대상에 머물렀던 서학(西學)이 신앙으로 전환한 것은
결코 용납할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이 사건을 축소하여 덮는다.
적발된 인물의 대다수가 남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정조는 남인을 정권에 참여시키고 있었다.
남인을 치죄하면 남인 정권의 축이 무너진다는 점을 우려했던 것이다.
대신 서적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다.
정조는 이 사건이 중국에서 수입된 서적에 기인한 것이라 판단해서
1786년, 1787년에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단적 사유의 원천을 봉쇄하겠다는 의도였다.
이후 정조는 천주교 자체보다는 명말청초 문집의 문제를 일관되게 지적한다.
하지만 종교적 열정은 일단 불이 붙으면 쉬이 꺼지지 않는다.
1791년 진산군(珍山郡)에 살던 천주교 신자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이른바 ‘진산사건’이 터지자 정조는 권상연과 윤지충을 죽이고,
천주교 서적을 압수해 불살랐다. 불길이 책으로 번진 것이다.
불온한 책 읽은 유생은 과거 기회도 박탈
진산사건 직후인 1791년 10월19일 정조는
동지정사 박종악(朴宗岳)과 성균관 대사성 김방행(金方行)을 접견한다.
정조는 “선비들의 문장이 점점 비속해져 과문(科文)까지 패관소품의 문체에 물들고 있고,
유교 경전은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한 뒤,
“문체와 사상의 오염은 중국 서적에 그 원인이 있다”고 덧붙인다.
또 박종악에게 베이징에서 패관소기(稗官小記)는 물론 경전과 역사서라도 중국판은 절대로
수입하지 말게 하고, 귀국 때 철저히 수색, 압수해 책을 국내에 유포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지시한다. 경전과 역사서 수입까지 막는 것은 심한 조처가 아닌가? |
하지만 정조에 의하면 국내에도 경서와 역사서는 많이 있으며
지질이 질기고 글씨가 커서 보기 편한데도 굳이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은 중국판을 원하는 것은
‘누워서 보기’에 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경서를 누워서 보는 것은 성인의 말씀을 존경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한다.
김방행에게도 이렇게 지시한다.
“성균관 유생들의 시험 답안지에 조금이라도 패관잡기와 관계되는 말이 있으면,
주옥같은 작품이라도 가장 낮은 점수를 주고,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정거(停擧)해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불온한 책을 읽은 흔적이 유생의 답안지에 나타나면, 과거 응시 자격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사상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시범 사례로 두 사람이 걸려든다.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이옥(李鈺)은 소설체를 썼다는 이유로
매일 사륙문(四六文)만 50수를 짓게 하여 몹쓸 문체를 완전히 고친 뒤에야 과거 응시를 허락했고,
각신(閣臣) 남공철(南公轍) 역시 대책문(對策文)에 소품을 인용한 구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지제교(知製敎)의 직함을 떼고 반성하기 전에는 경연(經筵)에 나오지 말며
집에서는 가묘(家廟)를 배알하지 말 것을 명받았다.
남공철의 아버지 남유용(南有容)은 정조의 스승이었다.
그런 남공철이 불온한 서적의 문체를 따른다면 될 법인가 하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이상황(李相璜)과 김조순(金祖淳)도 걸려들었다.
1787년 두 사람은 예문관에서 숙직하면서 당송(唐宋) 시대의 각종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 등 청나라 소설을 보다가 정조에게 발각돼 질책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정조는 두 사람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다.
이상황은 ‘힐패(詰稗)’란 연작시를 써서 명말청초 문인들과 소품문, 소설 등을 맹렬히 비난했다.
김조순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서 막 중국으로 떠나는 참이었으나,
정조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반성문을 써내라고 지시해 기어코 반성문을 받아냈다.
불똥은 심상규(沈象奎)에게까지 튀었다.
심상규의 반성문에 대해 정조는 “구두가 떨어지지 않으니 국문으로 번역하고 주해를 달아
올리게 하라”고 명령하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
정조는 네 사람에게 내린 전교와 그들의 반성문 내용을 ‘조보(朝報)’에 실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정책을 선전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리고 성균관의 반시(泮試)에서부터 자신의 전교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성균관의 학칙에 따라 선비들이 모이는 곳에 그 죄과(罪過)를 기록한 판자를 매달아둘 것,
아주 심한 자는 북을 치며 성토할 것, 더 심한 자는 매를 치고 사실을 기록하여
괄목할 만한 실효가 있도록 할 것을 명령했다.
나아가 자신이 결정한 사항을 대과·소과의 과거 규정에 기록해둘 것을 예조에 거듭 지시한다.
과거 문체에 소품이나 소설 문체를 구사하거나 이단적 사유를 섞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으름장이었다.
과거야말로 조선의 지식인들을 옭아매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였기 때문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정조의 타깃에 걸려
정조는 이어 성대중(成大中)·오정근(吳正根)·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의 문체를 거론하여
성대중과 오정근의 문체는 정도를 따른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는 반면,
박제가·이덕무의 문체는 소품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이 두 사람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거두고 있는 것은 그들이 결코 잘나서가 아니라,
그들의 처지(두 사람은 庶派였다)를 고려해 ‘배우(俳優)’ 곧 광대로 여겨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
두 사람에 대한 자신의 속내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소심한 이덕무는 정조의 지적에 충격을 받고 고민하다가 이내 세상을 뜬다.
마침내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가 걸려들었다.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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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의 건릉(健陵).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오늘날 문풍(文風)이 이와 같은 것은 그 근본을 캐보건대,
박모(朴某)의 죄가 아님이 없다.
‘열하일기’는 내가 이미 숙람(熟覽)하였으니, 어찌 감히 속일 수 있으랴?
이 사람은 그물을 빠져나간 가장 큰 사람이다.
‘열하일기’가 세상에 돌아다닌 후에 문체가 이와 같아졌으니,
마땅히 결자(結者)가 해지(解之)해야 할 것이다.
정조는 박지원에게 ‘열하일기’와 같은 규모의 아정(雅正)한 작품을 지어 올릴 것을 명했다. 그럴 경우 과거에 합격한 일이 없는 박지원에게
명예롭기 짝이 없는 홍문관·예문관의 제학(提學) 자리를 줄 것이라
회유했다. 우리의 박지원, 거부했음은 물론이다.
정조가 신하들의 문체를 검열한 사건을 문체반정이라고 한다.
문체를 올바른 곳으로 돌려놓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속내는 성리학에 어긋나는 이단적 사유를 색출한다는 것이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8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의 사유에 스며들었던 명 · 청 이래 서적의
이단적 사유를 긁어내겠다는 것이었다.
문체반정은 왕권에 의한 사상통제요, 구체적으로는 책에 대한 탄압이었던 것이다.
문체반정은 효과를 보았다. 이옥은 별 볼일 없는 유생에 불과했지만,
이상황·남공철·심상규는 뒷날 모두 영의정에 올랐고,
김조순은 대제학을 지내고 순조의 장인이 된 사람이다.
양반 중의 양반이었던 것인데, 이들이 처벌당하는 것을 보고
누가 감히 왕의 명령에 저항할 수 있었으랴. 하지만 문체의 검열만으로 가능했을까.
이래서 다시 정조와 규장각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학문의 편협성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주자학에만 몰두, 고증학 · 양명학은 이단으로 몰아 철저히 탄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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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화성문화제의 일환으로
재연된 정조대왕의 능 행차모습.
문체반정은 사실상 사상투쟁이었다.
명말청초 문집, 서양학, 천주교, 고증학, 소설, 소품 등은
직·간접적으로 주자학이 독점한 진리를 해체하려 했다.
어떻게 이 이단적 사유의 유통을 막을 것인가.
베이징(北京) 유리창에서 책 수입하는 것을 막으려고
압록강을 건너는 사신단의 짐을 풀어헤치는가 하면,
천주교도를 때려잡았다. 왕이 신하들의 문체를 검열하고
과거의 답안지까지 조사했다.
그러나 이것이 장구한 대책이 되었을까?
정조(正祖)는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정조는 즉위하자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조선의 가장 명예로운 벼슬은 홍문관(弘文館) 벼슬이었다.
그런데 규장각이 설치되자 규장각 벼슬이 으뜸이 됐다.
이 좋은 벼슬자리는 정치권력을 독점한 노론 세력을 구슬리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울러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자신의 우익을 확보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규장각의 현실적, 구체적 역할은 학문연구와 서적의 발행이었다.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군주인 정조는
규장각을 축으로 문신(文臣)들을 불러 모아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열었다.
스스로 강의 프로그램을 짜고 신하들에게 과제를 내주어 발표하고 토론하게 했다.
경전과 역사에 대한 발표와 토론 과정을 통해
그는 신하들의 학문 수준과 그들의 대뇌에 담긴 생각을 점검할 수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정조는 당시 조선에 알려진 명(明)과 청(淸) 최신 학문의 유통 상황을
점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 지식인에게 이단의 싹이 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경사강의를 통해서였다. 당연히 그 결과는 사상탄압과 대안의 구축으로 이어졌다.
이제 여기서 잠시 방향을 바꾸어 모기령(毛奇齡, 1623~1716)과 고증학을 실마리로 삼아보자.
모기령은 굉박(宏博)하기로 소문난 학자였다.
그의 인물됨과 학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반주자(反朱子)’다.
모기령의 학문적 저술은 오로지 주자의 학설을 해체, 붕괴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는 고증학적 방법으로 주자의 저술이 갖는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고증학의 객관적이고 엄밀한 증거에 근거한 주장은 반박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기령의 주장에 주자가 쌓아올렸던 거대한 사유의 탑이 흔들렸다.
하지만 모기령은 주자를 지나치게 공박(攻駁)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요즘 말로 ‘싸가지가 없다’는 인상을 남겼다.
그리하여 그는 인품 때문에 도리어 비판의 대상이 된다.
조선에 모기령의 학설이 수입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모기령의 저술은 지식인들 사이에 큰 충격을 던졌다.
조선에도 주자의 경전 해설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박세당(朴世堂)과 윤휴(尹휴)의
전례에서 보듯 주자를 잘못 건드릴 경우 사문난적으로 매장을 당한다.
하지만 중국 본바닥의 학자 모기령이 주자를 비판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모기령의 학설은 금방 조선 지식인 사회에 퍼졌다.
18세기 후반의 학자들, 예컨대 정조 주변에 모였던 정약용(丁若鏞), 서유구(徐有) 등
당시 일류급 학자들은 모두 모기령의 경학에 공감하고 고증학적 방법을 수용했다.
정조의 경사강의 역시 모기령의 학설에 대한 검토가 큰 줄기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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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색과 수작업을 거쳐 다시 만들어진 정조의 화성행차 ‘반차도’.
문체 수준 격하를 고증학 탓으로 돌려
모기령류의 고증학 침투는 주자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는 조선 체제로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새로운 반주자학적 학문의 유행에 최초로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이 정조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사람들이 가장 박아(博雅)하다고 일컫는 것은 고거(考據) 변증(辨證)의 학문이다.
억지로 고인(古人)이 이미 한 말을 베껴 새로운 견해로 만들어내는데,
이것은 학문이 낮은 시골 샌님이야 속일 수 있겠지만
학문이 넓은 사람이 본다면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대개 이른바 근래의 명유(名儒)란 모두 이런 부류이니 배우려는 사람들은
그 학문의 방법을 잘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문체가 날이 갈수록 수준이 떨어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된 것은
고증학이 실로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다.
자신만의 견해를 제출해서 작가의 울타리에 들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이에 고인의 저술 중에서 지리(地理)나 인명과 세대, 계보로서 착오가 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증거를 갖다 대고 부풀려 학설을 세운다.
이런 것으로 한 편의 글과 한 권의 책을 가득 채우는 것을 최후의 법으로 삼고 있다.
‘고거(考據) 변증(辨證)의 학문’이란 다름 아닌 고증학이다.
정조는 고증학의 유행과 말폐(末)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정조가 비판한 것은 고증학의 쇄말적 폐단일 뿐 그것의 생산적 본령은 아니다.
정조가 이렇게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 것은
고증학이 주자학의 진리성에 칼끝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증학 서적의 유입과 국내에서 고증학적 방법의 유행이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책은 책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정조는 1794년 12월 ‘주서백선(朱書百選)’을 간행한다.
주자의 편지글 중에서 100편을 뽑아 인명, 지명, 훈고(訓), 출처 등에 대해 두주(頭註)를 단 책이다.
그는 ‘주서백선’의 인쇄본을 호남, 영남, 관서 등의 감영에 보내 번각본(飜刻本)을 찍게 하여
광범위하게 보급하고, 전국의 향교에 뿌려 유생들이 학습토록 할 것을 지시했다.
주자학 교육을 강화함으로써 이단적 사유를 퇴치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따지고 보면 정조만큼 주자학을 깊이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세손(世孫) 시절에 이미 ‘주자회선(朱子會選)’(1774, 48권),
‘자양자회영(紫陽子會英)’(1775, 3권)을 엮었으며,
1781년에는 ‘주자선통(朱子選通)’(3권)을 엮었던 것이다. ‘주서백선’은 이런 작업의 연장이었다.
1798년에 정조가 경·사·자·집에서 선별, 편집한 ‘사부수권(四部手圈)’ 시리즈 안에
‘오자수권(五子手圈)’이란 책이 있다. 오자란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장재(張載)·주자 등 성리학을 창시하고 완성한 다섯 학자다.
정조가 이들의 문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글을 뽑아 편집한 것이 바로 ‘오자수권’이다.
그리고 이 중 하나가 주자의 글을 편집한 ‘주문수권(朱文手圈)’이다.
‘주문수권’은 1798년 11월30일에 필사본이 완성됐고, 1801년 7월19일 교서관에서 인쇄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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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친필이 담긴 ‘대로사비(大老祠碑)’ 탁본. 송시열 사당에 내려준 비문으로
정조 어필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주자와 주돈이를 위시한 성리학자들의 저작을 편집하고 간행한 것은,
고증학을 비롯한 여러 이단의 도전에 대해 다시 주자학의 가치를 천명하려는 의도의 산물이었다.
정조 만년의 최대 기획은 이단의 도전에 응하여 주자가 남긴 모든 저작을 망라해 편집, 보급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799년 7월16일에 베이징으로 떠나는 진하부사(進賀副使) 서형수(徐瀅修)에게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원본을
구해오라고 명령한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주부자(朱夫子, 朱子)는 곧 공자 이후 유일한 분이다.
당요(唐堯)·우순(虞舜)·하우(夏禹)·상탕(商湯)의 도는 공부자(孔夫子)가 있고 나서야 밝혀졌고, 공자·증자·자사·맹자의 학문은 주부자가 있고 나서야 전해졌다.
주부자가 높아진 뒤에야 공부자가 비로소 높아지게 되는 법이다.
천지를 위해 중심을 세우고, 백성을 위해 천명을 세우고,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한 시대를 열고, 우주에 윤리를 밝히고, 영원한 법도를 당대에 베풀어 이단을 종식시키고 민심을 안정되게 하는 방법은 유학을 밝히고 바른 학문을 굳게 지키는 데 있다.
나아가 그 근본적 방법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주부자를 높이는 것이 있을 뿐이다.
주자의 진리성을 강변하던 송시열이 부활한 것처럼 정조는 주자의 진리성을 설파한다.
이어 그는 자신이 편찬했던 ‘자양자회영’ ‘주자선통’ ‘주서백선’ ‘주서절약(朱書節約)’ ‘주자회선’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 주자가 남긴 모든 문자를 모아 거대한 전집을 만들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밝힌다. 그가 이처럼 새삼 주자학의 진리성을 강변하면서
주자학 서적의 간행과 보급을 최대 사업으로 삼았던 것은 누차 말했듯
반주자학적인 양명학과 고증학이 중국 사상계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근래에 중국을 휩쓸고 있는 학문은 왕수인(王守仁)과 육구연(陸九淵)의 여파로서
백사(白沙, 陳獻章)에게서 넘쳐나고 서하(西河, 毛奇齡)에 와서 극단에 이르렀다.”
육왕학(陸王學)에서 모기령의 고증학으로 이어지는 반주자학의 계보를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 저작 망라한 ‘주자전집’ 제작 추진
정조는 주자의 모든 저작을 망라한 주자 전집을 만들기 위해
먼저 알려진 주자의 저술을 모두 모으게 하는데,
가장 문제가 있는 것은 ‘주자어류’와 ‘주자대전’이었다.
‘주자어류’는 지본(池本), 요본(饒本), 미본(眉本), 휘본(徽本), 건안본(建安本) 등 여러 본이 있어서
서로 어긋나는 점이 없지 않았으며, ‘주자대전’의 경우도 여러 판본이 있어
수록한 글에 출입이 무상했다.
정조는 ‘어류’와 ‘대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찍은 ‘대전’ ‘어류’의 중국판 원본을 구입해올 것을 명한다.
서형수는 베이징에 도착해 당시 조선의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던 중국 최고의 학자
기윤(紀윤)에게 정조가 말했던 책들을 구입해줄 것을 부탁한다.
사실 중국 땅에도 주자의 저작에 대해 포괄적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오직 기윤만이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기에
주자의 저술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기윤은 가장 선본이라고 할 ‘대전’과 ‘어류’를 추천한다.
하지만 서형수가 이 두 책을 즉각 갖고 온 것은 아니었다.
기윤은 책을 구입해 사신편에 부쳐준다고 약속했고, 뒤에 1801년과 1802년 조선 사신을 통해
‘주자어류’의 건안합각본(建安合刻本)과 ‘주자문집대전류편(朱子文集大全類編)’의 민각본(刻本)이 서울에 도착했다.
서형수는 4개월 뒤인 1799년 11월에 귀국해 정조에게 자신이 구입한 ‘주자대동서(朱子大同書)’와 ‘주자실기(朱子實記)’ 등의 참고서적을 올리고, 주자 서적 구입 전반에 대해 보고한다.
하지만 정조는 그로부터 불과 7개월 후인 1800년 6월 사망한다.
당연히 주자대전집 편찬도 없던 일이 됐다.
정조 외에 누가 이 거창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참고로 말하면, 주자의 전집은 2002년 중국에서 27책으로 간행됐다.)
정조는 주자전집의 간행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의도는 성공했다.
정조의 의도를 알아차린 보수적 학자들이 성장했고,
또 그중 극단적인 세력들은 정조의 죽음 직후 신유사옥(1801)을 통해
이단적 사유의 첨병이라 할 천주교도를 일거에 제거함으로써
18세기 후반 새로운 사유들을 질식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좀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다.
모든 출판과 인쇄 기구를 국가가 독점하고 있는 조선 사회에서
과연 새로운 사유의 출판과 유통이 가능했던가. 생각해보라.
문체반정의 된서리를 맞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결코 당대에 인쇄되어 유통되지 않았다.
또 하나.
새로운 사유에 철퇴를 내리고, 주자학 서적의 보급에 골몰한 정조는 여전히 개혁군주로 보이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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