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01.583호 (p 78~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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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와 古書] |
영어 원서 읽으면서도 우리 책에 무한 애정 |
“신지식 배우되 옛 책도 아껴야” … 외국 문명 취한 세태엔 강력 비판 |
대한민국 사람으로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를 모를 리 없다. 만일 모른다면 그 사람이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거나 학교교육이 잘못됐을 것이다.
신채호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 외곬의 민족주의자요, 철저한 비타협적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언론인, 문필가다. 또 그는 크로포트킨(Pyotr Alekseevich Kropotkin, 1842~ 1921)에게서 사상적 세례를 받은 아나키스트이기도 했다.
단재의 공식적 사회활동은 1905년 장지연(張志淵)의 주선으로 황성신문사에 입사해 계몽적 논설을 쓰면서부터 시작됐고, 그 다음 해 대한매일신보사로 옮겨 애국·항일(抗日)의 격렬한 필봉을 휘두른다. 1910년 4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될 것을 예측한 그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다. 그 후 이역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한국사 연구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은 여기서 굳이 췌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열 살에 사서삼경 외던 천재
단재의 사상과 학문은 대단히 넓은 스펙트럼을 갖지만, 그 지적 토대는 한학(漢學)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단재는 어렸을 때 조부 신성우(申星雨)에게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에 이미 ‘사서삼경’을 외우고 한시와 한문을 지을 수 있었다 하니, 그야말로 무사자통(無師自通) 수준의 천재였던 것이다.
그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그가 18세 때 조부의 주선으로 당시 대단한 장서가였던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서재에 들어가 며칠 만에 장서를 다 보고 나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학에서 지적 토대를 마련한 단재였지만,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지식의 범위는 확장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에 전해진 중국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 1873~ 1929)의 저술들을 읽고 세계 변화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여기까지는 조선의 계몽지식인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단재가 어렵다고 정평이 난 영어 원서를 줄줄 읽을 정도로 영어에도 능통했다는 것이다. 단재가 영어를 배운 것은 상하이 망명 시절이었다.
이광수가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단재는 김규식(金奎植, 1881~1950)에게 영어를 배웠다. 김규식이 누군가. 미국에 유학해 프린스턴대학원(Princeton Academy)에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인물이다. 이런 사람이니 본토 발음을 까다롭게 가르칠 수밖에. 깐깐하게 발음을 따지는 김규식에게 진절머리가 난 단재는 영어책을 가지고 이광수를 찾아왔다. “나, 고주(孤舟 · 이광수의 호)한테 배우겠소. 발음은 쓸 데가 없으니 뜻만 가르쳐달라 해도 그 사람이 꽤 까다롭게 그러는군.”
새 사조(思潮)에 취한 나머지 자신을 몰각하는 풍조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다.
단재는 이어 자신의 경험을 말한다. 어느 유명한 학교 졸업생과 대화를 하다가 일본 역사를 물으니 족리시대(足利時代), 덕천시대(德川時代) 등을 얼음에 박 밀듯 좔좔 외우고, 유럽 역사도 제법 알기에 한국의 역사를 물었더니 신라, 백제가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동명왕(東明王)과 온조(溫祚)가 어느 시대 임금인지 모르더라는 것이다.
단재는 이제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에 들어선다.
자국의 서적은 수천 년 동안 국민 선조 선배의 사상 심혈이 결집한 것이라 국민의 정신도 여기서 보고 국민의 성질도 여기서 찾을 것이며, 그 밖의 산천 인물 풍속 정치 등의 연혁도 이것을 근거로 삼아야 할 것이니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구서는 곧 ‘민족’을 담은 책이다. 따라서 ‘민족’ 됨을 잃지 않으려면 구서를 적극 수집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단재는 민족주의자였다. 오늘날 ‘민족’이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구성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 나는 단재처럼 열렬히 민족주의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단재의 시대에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인간 해방의 사상이었다. 나는 그런 점에서 열렬한 단재의 민족주의에 찬동한다.
단재의 구서를 수집하자는 주장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거의 성공하지 못했다. 막대한 양의 구서가 해외로 거침없이 유출됐다. 아니 약탈됐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에 와서 구서를 수집해간 일본 서적상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급히 귀가하여 여장을 차리고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일로 경성(京城)에 왔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 경영의 고본옥(古本屋, 古書店)을 내리 훑었다. 촌구(村口·일본인 서적상) 씨가 착목한 것은 주로 고간당본(古刊唐本·중국에서 찍은 책)이었다. 그 가운데는 송판(宋版)의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 있었다. 이러한 것에는 조선의 고본옥은 전혀 눈뜨지 못했는지 61책 송판을 겨우 3원 남짓으로 입수했으니 꿈같은 이야기다. 당본의 옛것은 거의 1책 6전 정도로 살 수 있었고, 조선본이 비교적 비쌌다.
촌구 씨는 이들 송판이나 원판(元版)의 귀중본을 가지고 경성을 떠나 도쿄(東京)로 돌아오니, ‘육신주문선’만으로도 천 몇백원에 팔렸고, 기타 희구본(稀購本)도 곧장 팔렸으므로 풍부한 자금을 준비해가지고 재차 도선(渡鮮)해 어느 한 서포(書鋪)의 재고품을 전부 사자고 할 정도의 배포로 흥정하였는데, 때마침 만철(滿鐵)이 그 일을 듣고는 “조선본은 만철에서 수집하고 있으니, 일절 손대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당본은 그대에게 일임하고 만철 자신도 일절 손대지 않겠다”고 타협해왔기에 응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河東鎬, ‘近代書誌攷類叢’, 탑출판사, 1987, 13~14쪽)
조선의 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긴 일본인 서적상과 일제가 조선과 만주, 중국의 식민지배를 위해 세운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가 조선 서적의 수집 영역을 분할하고 합의하는 대목이다. 마치 제국주의자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한 것처럼 말이다.
조선 서적 일본인들이 헐값에 대량 구입
지난해 12월 나는 일본 천리대학을 방문했다. 천리대학은 일본에서 서열이 많이 낮은 대학이다. 하지만 도서관만큼은 일본 전체에서 몇 손가락에 드는 규모다. 마침 인큐내뷸러(incunabula, 구텐베르크 인쇄술 발명 이후 약 100년 동안 인쇄된 초기 간본들)를 전시하고 있었다.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도 비록 낙장(落張)이기는 했지만, 특별히 유리장 속에 얌전히 누워 있어 내 눈은 뜻밖의 호사를 했다.
한데 천리대학 도서관 직원의 안내와 해설을 들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한히 쓰라려왔다. 천리대학 도서관은 한국 고서를 많이 수장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천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학’ 아닌 ‘조선학’을 연구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수집한 책들이 모두 이 도서관의 소장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일본의 관변 학자인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등이 수집한 막대한 책도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어떤가. 단재가 살아 있어 천리대학 도서관의 한국 고서들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
- 주간동아
- 강명관 부산대 교수, 한문학 hkmk@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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