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순종, 순종황후(순정효황후)의 어차에 관련된 기사내용들

Gijuzzang Dream 2007. 11. 6. 11:32

 

 

 

 

 

 

■ “순종, 순종황후 어차 복원” 

현대자동차에 의해 복원, 수리되어 현재는 창덕궁 빈청에 전시된 
순종과 황후의 어차(御車) 수리, 복원을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10억7천만원이나 썼다는 현대자동차가 이 일을 맡은 내막은 이렇다. 

1991년 스즈키 료라는 일본인 희귀자동차 수집가가 
국내의 어떤 정치인을 통해 어차를 수리, 복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러나 일본인이 조선조 마지막 황제인 순종의 차를 수리한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있을 수 없는 일. 
그래서 문화재 당국은 국내 자동차 회사들을 상대로  어차의 수리, 복원계획을 맡아달라고 부탁했고
현대자동차가 선뜻 나선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작업과정에서 예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데다 
IMF 한파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었으나 끝까지 약속을 지켰다. 

1997년부터 본격 시작된 작업은 무려 4년을 끌었고 

예산도 당초 예상액(5억원)보다 2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라 복원계획도 2번이나 수정해야 했다. 

완벽한 1910년대식 자동차로 복원하기 위해 차체를 10여 번이나 붓으로 일일이 칠해야 했다. 
행여 먼지라도 끼어 자동차에 악영향을 끼칠까 역시 가는 붓으로 청소해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이들 어차는 총 38억원의 가치(대당 19억원 이상)를 지닌 문화재로 거듭났다. 
- 경향신문, 2001.11.30. 이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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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 황실 어차에 대하여


지금도 ‘자동차’는 현대 산업의 대표적인 이기(利器)이지만, 
근대기에 자동차가 갖는 상징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1971년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에
“꺼멓고 집채같이 큰 수레에 네 바퀴에 기둥 같은 테가 있고  뿡뿡하면 가고 뿡뿡하면 서되 
이것이 칠팔명의 사람을 싣고 높은 언덕을 총알 같이 길로 달리되어 대체 이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요술차이냐 신통차냐 제갈공명의 목우유마 같은 것이냐”
라는 내용에 그와 같은 인식이 단적으로 드러나 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 쇳덩어리가 저절로 움직인다는 사실은 
좀 과장한다면 패러다임의 전환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 상륙한 최초의 자동차는 1903년 선을 보인 고종의 승용차였다.

이 자동차에 대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되는 역사에 대해서는 관련 학자들간에 의견이 다르다. 
1903년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칭경식을 위해 
대신들이 미국공사에게 부탁해 미국에서 자동차를 수입하였다는 설과 
1911년에 처음으로 황실용 자동차를 들여왔다는 설이 있다. 

아무튼 이번에 등록예고된 대한제국 황실 어차와 관련된 기록이 없어 
언제 어떤 경위로 들여왔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황실에서도 일찍부터 자동차를 도입하였던 듯하다. 
차종은 포드라는 설이 유력하다. 

고종의 어차는 지붕이 없고 
마치 서양의 마차처럼 뒤에 왕을 호위하는 무관이 탈 수 있는 발판이 달려 있었단다. 
당시 백성들은 네 발 달린 차 모양이 경망스럽다 여겼고, 
황실에서도 휘발유와 운전사가 귀해서 고종의 어차는 이후 유야무야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한 시기는 대체로 1900년도 초로 추정된다. 
당시 서울이던 한성에 운수업으로 자동차회사가 설립된 것이 
1906년 5월경이라는 기록을 볼 때 그 이전부터 이미 자동차가 다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1906년 발행된 『버튼 홈즈 기행문』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교통사고가 난 기록이 보이고, 
그가 1901년대 서울에서 자동차를 타고 여행한 기록도 나온다.
당시 버튼 홈즈는 자동차를 직접 가지고 온 것이 아니고 
이미 국내에 들어와 있던 자동차로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버튼 홈즈가 들어오기 전 이미 국내에 자동차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가 작성한 1911년 통계에 의하면 이 해에 자동차 2대가 수입되었는데 
당시 우마차수는 30,337대이고 인력거는 1,217대라고 되어 있다. 

또한 1913년부터 세금 과목에 
자동차세(승합차 1냥 20원)를 징수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때 국내에 자동차 수(전국의 영업용 차 53대/ 1915년 기록)가 상당히 있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자동차가 증가하는 가운데 등록 예고된 어차도 수입되었던 듯하다. 
이 두 차는 외관의 형태가 비슷하나 
순종이 타는 어차(GM사 제작)가 순종황후가 타는 어차보다는 좋았다고 보여 진다. 
순종어차가 배기량에서 앞서며 차 내부의 편의시설도 우수하기 때문이다.

 

명칭

연식

제작처

차체색상

크기(㎝)

엔진

배기량

순종 어차

1918년

GM

마론(검붉은색)

(h)  211

(w)  173

(ㅣ) 474

4기통

40 마력

5,153cc

순종황후

어차

1914년

DAIMLER

마론(검붉은색)

(h)  204

(w) 178

(ㅣ) 440

6기통

30 마력

3,309cc


     

전상운 문화재위원에 따르면 
다임러 리무진은 제작당시 10대밖에 만들지 않았고 
현재 전 세계에서 3대, GM 캐딜락은 20대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원래 이 어차는 창덕궁 빈청에서 장기간 보관되어 왔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부식에 따른 차체 녹이 슬고 칠이 떨어지는 등 박락현상과 
녹이 발생하는 노후화가 심해 보존대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92년부터 어차 복원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졌으나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관계전문가의 검토를 거쳐 
(주)현대자동차 주식회사의 부담(5년간 10억7천만원)으로 수리 복원하게 되었다. 

어차 복원 용역업체로는 
고식(古式) 자동차 복원 전문회사인 영국 윌데(WILDAE)사가 1998년에 확정되어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영국으로 반출되어 복원(Coach, 도색 등)되었으며,
복원된 후 2개월간 현대자동차에서 조립(엔진, 샷시 부분)을 완성하였다. 
복원계획 수립 당시 주행 가능한 복원도 검토되었으나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충실한 원형 복원만을 하기로 하였다.

수리 방향은 원형을 최대한 보존 유지하기 위하여 
부품은 원래의 것을 최대한 재생하여 사용하였고, 
손상되거나 망실된 부품은 관계전문가의 고증 및 기술자문을 통해 해외중고시장에서 구입하였으며, 
수리나 구매가 불가능한 것은 설계 도면을 작성하여 동일한 형태의 것으로 제작, 사용하였다. 

이러한 수리를 거쳐 2001년 11월부터 현재까지 
항온항습시설이 설치된 창덕궁 어차고(빈청)에서 전시 보존되고 있다. 
(항온항습시설 설치비 1억원)


현재 어차가 전시돼 있는 창덕궁에는 재미있는 역사가 있다. 
당시 초석 때문에 정문인 돈화문으로 차가 드나들 수 없자 
황실에서는 문을 가로지르는 초석을 없애고 착탈식 문지방을 만들어 
차가 들어올 때마다 문지방을 빼냈던 것. 
창덕궁 희정당에는 아직도 자동차가 정차할 수 있는 현관이 남아 있다.
- 매일경제, 2006년 11월 3일
- 全相運,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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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 순종황후 어차 수리복원모습(과정)

 

문화재청의 2006년 9월4일 '문화유산 e-이야기'에 
어차고(빈청) 안의 어차 수리복원에 관한 내용이 있어서
참고로 올립니다.

http://blog.daum.net/munhwajaecheong/6135995

 

 

  

 

 

 

 

 


■ 순종, 순정효황후 어차(御車) 문화재 등록예고  (2006년 10월20일)

문화재청은 지난 2006년 10월 20일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1874-1926)과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사용했던 어차(御車)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순종이 주로 사용하였다고 알려진 어차는 미국 GM사가 1918년경에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며, 
순종황후가 탔던 어차는 영국의 다임러사(DAIMLER) 1914년에 제작한 것이다. 

두 차량 모두 7명이 탈 수 있으며 차체(나무로 만들어졌다) 색상(마론색, 검붉은 색)도 비슷하다. 
또한 두 차의 문에는 황실의 상징인 이화문(李花紋, 오얏꽃 무늬)의 금도금 장식이 붙어 있으며 
내부에는 이화문으로 된 황금색 비단이 붙어 있고 
바닥에는 고급 카펫이 깔려 있어 당시 사람들에게 황실의 최고급 차임을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차체는 지금과는 달리 철제가 아닌 목제이며 외부 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고
전체적인 형태면에서 아직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성을 갖고 있다.

원래 이 어차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분적으로 많은 훼손이 있었으나 
1997년부터 수년에 걸쳐 국내외 전문기관에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하여
2001년도부터 항온항습 시설이 되어 있는 창덕궁 빈청에 전시되고 있다.

이 자동차는 황실 관련 유물이라는 역사성과 현재 전 세계적으로 남아 있는 차가 많지 않다는 희소성 
그리고 당시 근대의 시대적 상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에 등록 예고되었다.

이번 예고는 좀 더 다양한 근대문화유산을 문화재로 등록, 보존하기 위하여 
2005년 7월 28일 문화재보호법을 개정한 이래, 
본격적으로 근대동산유산을 등록을 알리는 첫 번째 유물로서도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에서는 등록 예고된 근대문화유산에 대하여 
앞으로 30일 동안 문화재의 소유자·관리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문화재 등록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 다임러(DAIMLER) -
영국회사가 아니라 현재는 독일회사이다.
고트리브 다임러와 칼 벤츠의 회사를 합병 -> 다임러 벤츠 -> 메르세데스 벤츠社 -> 다임러-크라이슬러 社가 되었다.
참고 : 다임러 社에서 동업자로 일했던 사람이 
현재 벤츠社 최고급모델 마이바흐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빌헬름 마이바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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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의 자동차를 찾아라 ! 


한국 과학사를 전공한 문화재위원 전상운(전 성신여대 총장)씨는 요즘 세상 달라진 걸 느낀다. 
조금 과장해 한국 사회가 '야만'에서 '문화'로 들어섰다고 생각한다. 
자동차도 문화재로 인정받는 시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40여 년 전을 생생히 기억한다. 
대한제국 순종이 탔던 것으로 전해지는 캐딜락 리무진이 창덕궁에 비바람을 맞으며 방치돼 있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자동차에 들어가 뛰놀았고, 차내의 비단 시트도 뜯어갔다. 
그는 즉각 어차(御車)의 보존. 복원을 주장했다. 하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보릿고개를 넘기기도 힘겨웠던 시절 문화를 얘기하는 게 배부른 사치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 어차가 최근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1918년께 미국 제너럴모터스가 제작한 7인승 리무진이다. 
국내외 전문가가 2001년 복원한 것이다. 
순종 황후가 탔던 영국 다임러의 리무진 역시 문화재 등록이 예고됐다. 
근대 동산(動産) 문화재 1호가 탄생한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문화재는 등대. 간이역 등 부동산 일색이었다. 

문화재가 됐다고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이번 어차는 종전처럼 창덕궁에서 볼 수 있다. 
갑자기 국보급 유물로 격상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땅과 하늘의 차이가 있다. 
문화유산을 보는 시선을 180도 돌리는 전환점이 됐다. 
근대 공산품의 '문화재 입성'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순종의 어차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다. 
문화재청은 당초 어차와 함께 북한 김일성이 탔던 리무진의 문화재 등록도 추진했다. 
1948년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선물한 승용차로, 
1950년 10월 육군 제6사단이 평남 영변 일대에서 노획한 것이다. 
제작사는 구(舊)소련의 ZIS사. 현재 경남 사천의 항공우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문화재청은 해당 차량이 한국전쟁의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희귀한 유물이라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했다. 
문화재청은 국민 여론을 감안해 김일성 리무진의 문화재 등록을 보류했다.
문화재적 가치는 인정하더라도 시기가 좋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대신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이용했던 승용차를 조사하기로 했다. 
청와대에 자료 협조를 요청한 상태다. 
기자가 취재한 결과 서울전쟁기념관과 육군박물관에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이 각각 탔던 캐딜락 리무진이 한 대씩 남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리무진은 복원 과정을 거쳐 지난주부터 매주 금요일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다. 
문화재청이 이승만 대통령의 승용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미리 파악했다면 
순종 어차와 함께 문화재로 등록됐을 가능성이 컸다. 
당국 내부에서조차 관련 자료가 정리되지 않았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취재 도중 전두환 대통령 이후의 통치권자가 탔던 관용차 서너 대가 
외교통상부에 남아 있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통령의 승용차 찾기는 상징적 사건이다. 
각 대통령의 공과와 관계없이  20세기 한국인이 살아왔던 행로를 복원하는 촉매제가 되지 않을까. 
예컨대 '한강의 기적'으로 통칭되는 우리의 경제성장을 후세에 증언해 줄 유물이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지 반성할 일이다. 그간 우리가 잊거나 잃어버린 게 한두 개가 아닐 터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지난 세기의 교통, 통신 유물을 집중적으로 조사할 계획이다. 
기차, 오토바이, 자전거, 전화, 전보, 우체통 등등 평소 허드레로 여겼던 물건이 
대거 문화재로 등록될 전망이다.  먹고사는 게 다 보물인 것이다. 
부끄러운 ‘과거 청산’이 아닌 자신감 넘치는 '과거 회복'의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 
-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2006. 11. 15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