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순종황제의 어차 기사(매일신보, 1917년 11월11일)

Gijuzzang Dream 2007. 11. 6. 11:48

창덕궁 이왕전하, 1917년 대조전 화재때 자동차로 피신하다

       

                ▲ 창덕궁 화재의 피해현황을 알리는 <매일신보> 1911년 11월 11일자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사진은 불타기 전의 '대조전' 풍경을 담은 것이다.


창덕궁에서 이른바 어차(御車)를 들여놓은 것이 1914년 이전인 것은 분명히 확인되나, 
정작 순종의 거동이나 행차(능행 포함) 때에 이 자동차가 이용되었다는 흔적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1918년 10월에 서오릉 능행 때 자동차가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그나마 매우 빠른(?) 시기의 기사일 뿐 나머지는 대개 예전처럼 마차를 이용했다는 내용 일색이다. 
물론 이 마차란 것도 원래의 교통수단은 아니고 대한제국 시절에 일본 등지에서 수입하여 들여온 물건이다.
 
그리고 창덕궁 자동차(어차)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료는 
아래에 나오는 창덕궁 화재 관련기사이다. 
여기에는 1917년 11월에 발행한 대조전 화재 때 순종이 창경원 식물본관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자동차를 이용하여 비원 연경당을 거쳐 인정전 동행각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참고가 될 듯하여 그 내용의 전부를 여기에 옮겨둔다. 
  

(1) 대조전 회록(大造殿 回祿)
      처참(悽慘)의 극(極), 불측(不測)의 화(禍) - <매일신보> 1917년 11월 11일자

이미 호외로 보도한 바와 같이 창덕궁안 이왕 동비 양전하의 기거하오시는 대조전에 실화되어 동전 전부와 부근의 전각을 소실하였음을 황송하기 이를 데 없는 바어니와 지금 당시의 처참한 광경과 양전하의 어동정을 기록하건대

응봉 아래 복치혈에 축융이 감히 침범하였도다. 
첫겨울 처음 추위 맹렬한 서북풍이 북한 인왕으로부터 경성 천지를 흔들던 십일의 오후 다섯 시 삼십 분 창덕궁 대조전의 왕비전하 처소되는 지밀 옆 여관대령처소의 온돌로부터 불이 일어나며 마침 불어오는 서북풍에 대조전 전부를 화염으로 싸가지고 이왕전하의 기거하옵시는 흥복헌(興福軒)에 옮겨 붙어 즉시 남편복도로 양심합(養心閤) 희정당(熙政堂)까지 전소하게 되었더라. 
처음에 불이 서온돌(西溫突)에 퍼지매 왕비전하께오서 창황히 피난하옵시고 흥복헌으로 건너오며 이왕전하께오서 임변피난하사 양전하께서는 일시 비원 안의 연경당에 좌정하옵셨으며 
일변 창덕궁 상비소방대가 달려오고 조선보병대 이백 명이 출동하여 전각을 문흐며 소화에 진력하는 중 시엇의 각소방대가 달려와서 힘을 다하였으나 원체 화력이 맹렬하여 어찌할 수 없이 내전 전부를 소실하고 다행히 소방대와 경관의 죽을 힘을 다한 활동으로 선정전과 인정전은 회록의 재앙을 면하였더라. 
이날 왕십리, 마포 등의 소방대까지 출동하여 경성 용산의 헌병 경관이 전부 출동하여 소방에 진력하며 궁내 궁외의 경호에 진력하였으며 
또한 궁내인고로 잡인이 많이 들어오지 못한 까닭에 소방대의 활동도 여의히 되어 다행히 연접된 부분만 소실하였으며 또한 불길 중에도 다행한 일은 양전하께서 무사히 피난하옵심이오, 그 외에 별로 사상이 없었더라. 
오후 일곱시 경에는 불붙은 전각은 거의 다 문헛으며 또는 좌우편에 연소될 곳은 모두 끊은 까닭에 진화에 가까웠으나 오히려 활화산의 분화와 같은 화광은 밤새이도록 비원의 동산에 비추어 그 광경이 극히 처참하였더라. 

 
(2) 양전하의 어기거(御起居)

이왕전하께서는 성정각에, 왕비전하는 약방에 듭심

불이나도 다른 곳과 달라 양전하의 침전에서 일어났음으로 양전하의 신상에는 더욱이 황송한 일이 많았었다. 
왕전하의 처소는 동온돌과 및 접속된 흥복헌이오, 왕비전하의 처소는 서온돌인데 
불은 서온돌의 여관처소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왕비전하께오서 제일 먼저 놀라시와 말씀하기도 황송하지만은 비전하께서는 신 신으실 사이가 없이 대조전 아래까지 내리사 여관이 올리는 스립바를 신읍시고 즉시 협문으로 나셨으며 
왕전하께서도 옥색주의를 입으신 대로 권연구자 한 개만 듭시고 궁감의 부축으로 대조전에 내리사 피난하옵셨는데 
그때 약방처소인 보춘정(報春亭)으로 넘으시려 하셨으나 거기는 남편과 가까워 위험하므로 넘지 못하고 박물본관 있는 낙선재 편으로 넘으시려 하셨으나 서북풍에 날리는 불똥이 비오듯하여 도로가 위험하므로 일시 식물본관 앞 수정에 넘어셨으나 너무 추운 연고로 다시 자동차로 비원 연경당에 이어하옵시기를 배정하였다가 
대강 진화된 아홉시 후에 다시 자동차로 근시 제인을 데리시고 인정전 동행각되는 성정각(誠正閣)에 듭시와 좌정하옵신후 
오전 세시경에 왕비전하께서는 약방처소인 보춘당에 넘어시고 
왕전하께서는 성정각에서 밤을 지내옵셨는데 
아직 기거하옵실 처소로는 대조전 동편있는 낙선재를 쓰시기로 결정되시와 가수리를 행하고 
십일일 오후에는 양전하께서 낙선재로 넘으실 예정이라 승문하였더라. 

 
(3) 전루손해(殿樓損害)만 삼십만원(三十萬圓), 이번이 세 번째의 화재, 무려 팔백평의 소실
     이왕직 기사(李王職 技師) 김윤구씨담(金倫求氏談)

이번의 화재는 실로 놀라운 일로 다만 황송할 뿐이올시다. 
불은 당초 대조전의 서온돌에서 일어나서 대조전과 연결된 건축물은 전부 소실되었는데 
소실된 전각은 대조전으로부터 보면 서온돌 불난 부근에 있는 목욕실, 여관처소와 대조전 전부와 대조전 옆에 붙어 있는 흥복헌과 그 위에 새로이 이왕 전하의 서재로 건축중이던 천운재도 전소하고 
그 앞 복도로 붙어서 양심합 창고, 희정당이 전소하였는데 그 중 중요한 처소로 말하면 

대조전, 희정당, 징광루, 경훈각, 양심합, 흥복헌, 정묵당, 청향각, 옥화당, 욕실, 여관처소, 찬시처소, 건축중의 천우재와 기타로

건축물의 평수로 말하면 무려 팔백여 평이오, 건축물에 대한 손해만 무려 삼십만원이상 될 줄로 생각하며 
이십여만 원의 화재보험을 붙여있는데 이 건축물의 대부분은 모두 거금 팔십이년전 순묘조시대에 소화되어 다시 이전대로 건축한 것인즉 삼백여년전 임진난리의 화재를 합하면 이번이 제삼회의 화재이라.

<> 평시의 소화설비로 말하면 전각주위에 수다한 수도 소화전을 설비하였을 뿐 아니라 조그만 처소이라도 일일이 소화기를 설비하였으며 궁감, 야경, 기타 불을 경계하는 사람도 다수하였으며 기외에도 굉대한 전각일 뿐 아니라 양전하의 기거하옵시는 지밀안인 고로 화재의 예방에 대하여는 물론 힘을 다하였건만은 맹렬한 바람에 사나운 불길은 평시의 고심이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경성의 소방기관이 힘을 다하여도 이만한 재화를 면치 못하였으며 특별히 여러 처소가 서로 연첩된 까닭에 손해가 더욱 크게 된 것이로다.

<> 장래의 복구공사 에 대하여는 물론 아직 아무 계획도 결정되지 아니하였는데 하여간 급속히 공사가 시작될 줄로 생각하나 아마 소실이 큰 만큼 복구를 하려면 아무리 하여도 매평에 삼백 오십 원 이상의 건축비용이 들 줄로 생각하며 그 중에는 대조전과 징광루 같이 또는 건축학상으로도 가치있는 전각도 그대로 못 지을 것은 아니나 불여간 근백년된 건축물을 일야에 소실함은 실로 황공한 일로 소조를 알지 못하노라. 

 
(4) 보물몰소(寶物沒燒) 손해는 수백만원 
  
내전 부근에 감추었던 보물은 전소되었다. 
불이 한 채에서 차차로 붙어 나와야 여간 세간이라도 구하여 내일 터인데 대조전의 화재는 한번 불이 바깥으로 나오며 걷잡을 사이 없이 나란히 잇는 세 채가 함께 붙었는 고로 귀중한 보물과 장식품은 물론이오 양전하의 좌우에 쓰시던 조조품과 기타의 대금침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집어내이지 못하고 전부 소실되었으므로 그 손해는 실로 수백만 원일 뿐 아니라 그 중에 금전을 주고도 사지 못할 왕가의 귀중품이 다수함은 물론이라. 
여관처소의 뒤편 언덕 위에 철근콩크리트로 방화설비가 충분한 창고를 새로이 지어놓았으나 내전과 거리가 조금 격원한 고로 여관들은 일상 소용되시는 물품의 출입에 불편하여 내전 조조의 제반 귀중품은 대조전과 징광루, 경훈각과 양심합과 접속되어 있는 창고와 희정당 등에 넣어 있었으므로 인정전 선정전에 비부한 물품 이외에 내전에 장치하였던 전부 귀중품은 하나도 건지지 못함이 애석한 중에도 애석한 일이더라. 
(이하에 나오는 기사는 생략함.) 

 

 

(5) 서오릉 능행(西五陵 陵行) - <매일신보> 1918년 10월 16일자

창덕궁 이왕전하(昌德宮 李王殿下)께서는 기예정(旣豫定)과 여(如)히 15일 오전 10시 자동차(自動車)로 돈화문 어출문(敦化門 御出門)하사 민장관(閔長官), 국분차관(國分次官), 윤찬시(尹贊侍), 무등제사과장(武藤祭祀課長)의 호종(扈從)으로 고양군 신도면(高陽郡 神道面)의 서오릉(西五陵)에 능행(陵行)하시와 친(親)히 봉심전알(奉審殿謁)하옵시고 주찬(晝餐)을 료(了)하옵신 후 오후 2시 환궁(還宮)의 로(路)에 등(登)하사 중도(中途) 덕수궁(德壽宮)에 문안(問安)하옵시고 오후 4시 환궁(還宮)하옵셨더라. 
 
(정리 : 2005.12.2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추가 : 2007.6.5,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