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알아가며(자료)

연암 박지원

Gijuzzang Dream 2008. 6. 25. 11:19

 

 

 

 

 

 

[연암을 다시 본다]

 

 

 

 

1. 왜 연암인가

오늘날 왜 연암 박지원을 떠올려야 하는가? 그것은 금년(2005)이 연암 서거 200주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정약용과 더불어 실학의 두 축을 이룬 연암은

그가 이룩한 학문적 업적의 무게에 비하여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한 감이 있다.

‘양반전’ 등의 소설로 더 알려진 연암은 뛰어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회경제 사상가였다.

연암사상의 핵심은 이용후생을 바탕으로 한 북학론(北學論)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시 우리나라는 이른바 남한산성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에는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를 야만시하여 청(淸)의 실체를 부정하고

이미 망한 명(明)을 존숭하는 시대착오적인 사고가 깔려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을 ‘정벌’하는 것이 아니라 청을 ‘배우자’는 주장을 펼친 것은 매우 선진적인 이론이다.

그의 ‘열하일기’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북학론을 기초로 한 부국론이다.

그가 본 청나라는 전혀 야만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그곳의 발달한 기술과 유통구조를 배워서 낙후한 우리나라를 부강하게 하자는 것이 이 책의 주지이다.

 

명문거족의 자손으로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데도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실학에 몰두한 것도 나라의 부강을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던 당시에 기술과 상업의 발달을 힘주어 주장한 연암은

분명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연암은 문학적으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기왕에 잘 알려진 소설에서 그는 양반사회의 허위와 위선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리고 비생산적 논쟁만 일삼고 있었던 성리학의 예교주의와 명분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소설뿐만 아니라 일반 산문에서도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나타난다.

그는 마치 언어의 마술사와도 같이 어떠한 주제, 어떠한 종류의 글에도 생기를 불어넣는다.

모든 글이 연암이라는 용광로를 거쳐서 나오면 정채를 발한다.

이 마술적인 힘은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창조정신에서 나온다.

법고창신의 정신에 따라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그는 모방이 아닌 창조를 앞세웠다.

‘연암체’라 불리어질 정도로 독자적인 문체를 구사하여

정조 임금의 이른바 문체반정의 빌미가 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가 새로운 문체를 구사한 것은 그의 의식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내용을 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문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연암은 비록 한문으로 글을 썼지만 중화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민족주체성을 견지했다.

그가 이덕무의 시를 평하여 “조선의 국풍(國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말한 데에서

그의 주체의식의 일단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주체의식은 ‘열하일기’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자연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 우주론을 전개하여

중국이 결코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탈중화주의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조선인의 개성이 드러나는 독자적인 글을 쓰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연암이 살던 시대에는 중국이 곧 세계였다.

연암은 중국의 문화와 사상을 완전히 습득하고 한문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세계인’이었다.

그러한 그가 세계인이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민족의 주체성과 개성을 강조한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 값진 교훈이 되고 있다. 온통 세계화의 열풍에 휩싸여 있는 이 때,

연암의 사상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고 있다.
- 송재소 성균관대 교수

 

 

 

2. 열하일기
 

1780년, 40대 초반의 연암 박지원에게 뜻밖의 행운이 다가왔다.

삼종형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만수절(70세 생일) 축하 사절로 가게 되면서

연암을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동반하기로 한 것.

변방의 소수자 연암, 세계 제국의 지존 건륭제, 동북방의 요충지 열하 -

이 세 가지 이질적 대상들의 ‘우발적인 마주침’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여정의 기록이 바로 ‘열하일기’다.

애초의 목적지는 연경이었다. 압록강에서 연경까지의 거리는 2,300여리.

거리도 거리거니와, 가이없이 펼쳐지는 중원의 변화무쌍한 기상이변은 실로 만만치 않았다.

찌는 듯한 무더위,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폭우와 집채만한 파도 등등. 하여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벌판을 가로질러 성경(선양)으로, 다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은 스릴넘치는 모험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던 것.

연경에서 열하까지는 다시 700리. 열하로 가는 길 역시 수난의 연속이었다.

험준한 지세에다 황제의 불 같은 재촉이 이어지는 바람에

일행은 ’하룻밤에 아홉번이나 강을 건너는(一夜九渡河)’ 강행군을 감행하면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무박나흘’로 달려가야 했다.

열하는 당시 북방의 오랑캐들을 제어할 수 있는 ‘천하의 두뇌’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황제의 열하행은 애초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자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해마다 열하의 성지와 궁전이 날로 늘어 그 화려하고 웅장함이 연경보다 더하게 되었다.

과연 열하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연암은 이곳에서 온갖 진기한 인간군상, 기이한 동물, 몽고, 위구르, 티베트, 서양 등

이국의 낯선 문명들과 마주친다. 연암은 그 사이를 종횡무진 가로지른다.

마치 물을 만난 고기처럼. 특히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벽돌과 수레, 온돌 등

청나라 문명의 토대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청 문명의 핵심은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기와조각은 한갓 쓰레기지만 둘씩, 넷씩 잘 포개면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가 거기에서 나온다.

말똥은 지극히 더러운 물건이지만 정성껏 주워모아 다듬으면 누각이나 돈대의 모양을 이룬다.”

열하일기를 대표하는 이 구절에는 제국의 이면을 날카롭게 투시하는 연암의 시선이 담겨 있다.

열하에선 한족 출신의 재야선비들과 본격적으로 ‘접선’을 시도한다.

당시는 만주족 출신이 지배하던 시절이라 사회 전체에 한족과 만주족 사이의 팽팽한 갈등이

만연해 있었다. 연암은 이들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유머와 패러독스’다.

연암에게 있어 유머와 패러독스란 허심탄회하게 소통하면서

그와 동시에 익숙한 사유를 비틀어 전혀 다른 곳으로 인도하는 ‘지적 방편’이다.

중국선비들은 언뜻언뜻 속내를 보이고는

필담한 종이를 곧바로 불에 태우거나 먹어치우거나 찢어버린다.

팽팽한 긴장이 넘치는 필담이 엿새동안 이어진다.

이 과정에서 천하의 형세를 비롯하여, 주자학과 불교의 관계, 지전설과 지동설, 서양, 천주교 등

당대 지성사의 첨예한 이슈들이 총망라된다.

그런 점에서 열하일기는 18세기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어느덧 연암 사후 200년이 되었다.

우리가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그것을 ‘지금, 여기’로 호출하여

현재의 역동적 흐름으로 변환하기 위함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연암의 열광적 팬이면서도

나는 한번도 이 200년이라는 특별한 시간단위를 의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연암은 언제 어디서나 내게 고스란히 ‘현실’ 그 자체로 감응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내가 삶의 심연과 앎의 광활한 비전을 추구하고자 할 때,

연암은 그때마다 늘 ‘이미,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 고미숙/
‘수유+너머’ 연구원

 

 

 

3. 북학론
 

청나라가 명나라를 장악해 갈 당시 조선은 청을 적대시하는 입장이었다.

조선은 남으로 밀려난 명나라 정부가 중원 땅을 회복하기를 기대했다.

이때 청을 정벌하여 원수를 갚고 명 정부를 회복시키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자는 북벌론이 대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명을 완전히 정복한 청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고금도서집성’ ‘사고전서’로 대표되는 국가적 편찬 사업을 전개하며 문화적으로도 자신감을 보였다.

조선과 청의 외교도 정상적인 관계가 되었다.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들은 숙소를 벗어나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청의 발달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청의 물품을 구입하는 것도 자유로워져 손에 넣기 어렵던 천하지도까지 구했고,

북경의 천주당을 방문하는 조선인이 점차 늘어났다.

조선인들은 오랑캐인 청나라의 문화가 매우 빈약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목격한 청의 실상은 전혀 달랐다. 궁정에서는 군신간의 상하 질서가 잘 유지되었고,

시장에는 진귀한 상품이 넘쳐났으며, 서점에는 새로 출판된 서적들이 그득했다.

북경을 직접 본 사람이라면 청이 지닌 부유함과 높은 수준의 문화를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청에 대한 조선의 태도는 청을 제대로 알고 인정하자는 그룹과 여전히 적대시하는 그룹으로 나눠졌다.

연암 박지원은 전자에 속한 사람으로서, 청을 방문하기 전부터 홍대용과 같은 선배의 경험담이나

청에서 도입된 서적을 통해 그 실상을 알고 있었다. 연암은 자신이 청에서 본 것이

조선에서 동료들과 어울려 밤늦도록 토론했던 내용을 직접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사전 정보가 많았던 연암이었기에 현지의 실상을 파악하는 눈이 남달랐다.

그가 열하산장에서 머무는 짧은 기간 청과 몽고, 서장의 미묘한 국제관계를 분석한 것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청의 실상을 확인한 연암은 청의 우수한 문물을 도입하자는 북학론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북학론이 설득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토록 조선의 강토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청의 산천에는 오랑캐의 비린내가 나고 그 백성은 개나 양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암은 이 모든 것이 편협한 기풍을 가지고 학문을 제대로 하지 못한 병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학문이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누구에게나 묻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청의 제도가 조선보다 훌륭하다면 그들을 스승으로 섬기며 배워야 했다.

 

연암의 북학론은 청이 오랑캐이지만 나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그들에게 배우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청의 문물은 여진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중원 땅에 면면히 계승되어 온 중국의 문물이었다.

연암의 북학론은 여기에서 더욱 힘을 받았다. 오랑캐에게라도 배워야 할 상황인데

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연암은 농사, 양잠, 상업, 그릇이나 철물의 제조법에 이르기까지 청의 발달된 문물을

모두 배우자고 역설했다.

연암의 북학론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은 부국강병이었다.

조선이 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원활히 하여 국가의 부를 증진시키고,

청이나 일본이 다시 침략할 가능성에 대비해 군대를 양성하자는 구상이었다.

연암은 조선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청에 맞설 정도가 되어야

‘중국에는 볼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고 했다.

조선이 우물 안 개구리식의 자기만족에 머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부강한 국가로 우뚝 서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 김문식/
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4. 연암의 소설
 

그의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쉼 없이 문제의 작가로 지목되는 이를 들라 하면

단연 연암 박지원을 꼽을 수 있다. 당대에 이미 대단한 명성과 요란한 비방을 함께 불러왔던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성한 말을 부른다.

젊은 시절 연암은 과거장에서 백지 답안지를 내거나 늙은 소나무와 바위를 그리는 파행을 일삼더니,

일찌감치 관료의 길, 출세의 삶을 단념했다.

‘과거공부 밖에 문장이 있고, 문장 위에 학술이 있다’는 것이 연암의 생각이었다.

과거공부 밖의 문장이란 바로 우리가 그를 작가로 부르게 만든 문학을 이름이요,

문장 위의 학술이란 조선의 사대부들 대부분이 소홀히 했던 이용후생과 경제명물의 실학을 이름이다.

연암은 “나는 문장에 있어서 다른 장점은 없고 오직 사실을 기술하고

물태(物態)를 형상하는 재주만큼은 지금 사람들보다 조금 낫다”고 했다.

또 “아프지도 않고 가렵지도 않은 글이 쓸데없이 너저분하고 길기만 하다면 그런 걸 어디에 쓰겠는가?”

했다. 이런 저런 사실을 불러내 물태를 형상화하는 글이 바로 소설적 글쓰기요,

가렵고 아픈 곳을 찔러대는 글이 곧 비판적·풍자적 글쓰기이다.

이러한 글쓰기의 실천 결과가 연암의 소설작품인 것이다.

연암이 청년기에 지은 작품 가운데서

특히 ‘예덕선생전’  ‘양반전’  ‘광문자전’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덕선생전’의 엄행수는 도성의 분뇨를 수거해 근교의 채소 농가에 거름으로 내다 파는 일을 하였다.

엄행수의 일은 남들에게는 더럽고 천한 것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연암은 그의 건실한 생활태도와 인생철학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미덕이라 투시했다.

 

‘양반전’은 경제적 몰락으로 인해 양반 신분을 상품으로 팔아야 했던 정선양반을 희화화했다.

이 속에는 조선 후기 양반들의 무능과 허식을 폭로하는 한편,

양반이 진취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인으로 새롭게 변화하기를 기대하는 염원이 스며들어 있다.

‘열하일기’의 ‘호질’과 ‘허생전’은 연암의 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호질’의 핵심은 의인화된 범이 가공의 북곽선생을 꾸짖는 대목에 집중된다. 범은 인의 도덕을

표방하면서 실상 사욕을 위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해온 인간의 문명을 통렬하게 꾸짖는다.

유가 경전의 유명한 구절들을 패러디해 다시 유학자를 풍자하는 역설이 이 작품의 독특한 묘미이다.

 

‘허생전’은 허생이라는 일개 가난한 선비가 매점매석으로 번 거금으로 이상촌을 건설하여 빈민들을

구제하는 이야기와 어영대장 이완을 상대로 당시 북벌을 주장하던 집권 사대부층의 무위무능을

추궁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경세제민의 역량을 갖춘 인물 허생을 통해

연암이 본격적으로 북학론을 피력한 문제의 작품이 바로 ‘허생전’인 것이다.

몸집 크고 표정이 준엄했던 연암의 풍모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도 자리를 압도했다 한다.

특히 담장 밖 수십 걸음 되는 곳까지 들릴 정도로 크고 밝은 목소리를 지녔던 연암은

웃음과 해학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담론을 즐겼는데,

웃음과 해학 사이로 비판과 풍자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한다.

자기 시대의 현실 문제를 냉철하게 인식할 줄 아는 사람,

새로운 사회 질서를 이루기 위한 개혁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던 연암은,

당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글쓰기 방식으로 종횡무진 그러한 의지를 실천했던 것이다.

연암처럼 강렬한 현실비판 정신과 개혁 의지가 웃음과 역설의 붓끝에서 비수처럼 날을 세운,

우리 시대의 글쓰기가 절실한 때이다.
- 강혜선 성신여대 교수

 

 

 

5. 연암의 산문
 

연암의 문체는 불온하다. 그는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믿던 가치를 거부했다.

거꾸로 보고 뒤집어 보고, 바꾸어 보았다.

듣고 나면 당연하고 생각해 보면 지당한데,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말을 안 했다.

그래서 늘 금기를 건드렸다. 알면서도 입 다물고 싶어 하던 생각을 그는 서슴없이 말했다.

연암이 글을 한 편 발표할 때마다 젊은 문사들이 술렁거렸다.

그 생각의 진취성에 움찔했고, 발상의 참신함에 열광했다.

그들은 환호하며 연암을 뒤따랐다. 그 말투를 흉내내고, 그 생각에 동조했다.

 

정조는 그의 문체가 지닌 불온성을 진작에 간파했다.

그래서 그가 빼든 카드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문체를 바르게 되돌려 놓음으로써 지식인의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과연 동서고금 어떤 임금이 문체를 카드로 내세워 사회 기강을 확립하겠다고 나선 경우가 있었던가?

이 듣도 보도 못한 사태의 중심에 연암이 있었다.

한 사람의 문체가 지닌 파괴력이 이토록 의미심장했던 예를 달리 찾기가 어렵다.

연암의 글은 오늘날 읽어도 여전히 펄펄 살아있다. 200년도 더 된 옛글이란 생각이 전혀 안 든다.

지금 코앞의 현실에다 대고 날리는 직격탄처럼 읽힌다.

그때 젊은이들이 그랬듯이 읽는 사람을 격동케 하고, 눈과 귀가 번쩍 뜨이게 한다.

그의 글은 난공불락의 성채 같다. 그는 치고 빠지는데 명수다.

묵직하니 걸렸다 싶은데 건져 올리고 나면 바람처럼 그물을 빠져 나간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재미있고 경쾌하다. 재미있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다.

다 읽고 나면 다시 오리무중이다. 연암 문장의 묘미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그가 똑 부러지게 말하지 않고 빙빙 돌려 말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은

시대의 터부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그는 빗대어 말하기의 명수다.

 

길 가다 눈을 뜨는 바람에 제 집을 못 찾고 울고 있는 장님에게 그는 “도로 눈을 감으라”고 말한다.

평생 장님 주제로 살란 말이 아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 기본 좌표축을 설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서구 이론에 붙들려 주체를 돌아볼 겨를이 없던 우리가 이 우화를 읽다가 정신이 번쩍 든다.
귀울음과 코골기에 현혹되고, 짝짝이 신발을 신어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코끼리를 통해본 기호의 의미, 밤중에 강물을 건너며 귀와 눈이 지어내는 헛소문의 세계에 대해

들이대는 그의 날카로운 해부. 그의 이야기는 얼마나 참신하고, 예리하고 또 통렬한가!

그는 돌려서 말하고 비유로 말하지만, 비겁하게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글자는 병사요, 제목은 적국이며, 주제는 장수와 같다.

병법과의 유사성을 통해 글쓰기의 핵심을 찌르는 그 놀라운 통찰력하며,

나뭇단을 지고서 ‘소금 사려!’ 하는 식의 글을 쓰지 말라는 매서운 질책은

한문 문장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언컨대 그의 몇 편 글만 제대로 읽으면 오늘날 논술교육이 다 쓸데없게 된다.

그는 무겁지도 않고, 더더구나 가볍지도 않다.

그는 ‘지금 여기’를 살면서 ‘그때 거기’나 ‘지금 저기’만 기웃대는 현실을 답답해했다.

우리가 우리 것을 할 때 비로소 우리가 될 수 있다고 외쳤다.

고전이 되려면 옛것을 흉내 내지 말고 자기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

때로 그의 외침은 절규로 들린다. 그가 느꼈던 답답함은 지금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그의 글 속에는 움베르토 에코도 있고 루쉰도 있다.

그의 글이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유효한 까닭이다.
- 정민 한양대 교수 · 국문학

 

 

6. 연암그룹

 

 

“일찍이 비 내리는 지붕 아래, 눈 내리는 처마 밑에서 연구하고, 술기운이 거나해져

등 심지가 가물거릴 때까지 맞장구치면서 토론하던 내용을 한번 눈으로 확인한 결과이다.”

연암 박지원이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에 쓴 서문의 한 대목이다.

자신이 쓴 ‘열하일기’와 비교해서 ‘북학의’가 비슷한 주장을 담은 이유가

바로 술잔을 주고 받으며 밤늦도록 토론한 결과라는 해명이다.

 

조선시대 고전 중의 백미(白眉)인 두 저작은 연암의 말처럼

학자들 사이의 진지한 토론과 학문적 교감의 바탕에서 출현했다. 어디 이 두 저작뿐이랴!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유득공의 ‘발해고’ 등등 책 이름만 들어도 시대를 초월한 명저임을 알 수 있는

책들도 그러한 토론과 사고 공유의 산물이었다.

사상적 특징이 너무도 분명한 북학파(北學派)가 등장하게 된 배경에는

이렇게 학자들간의 교유와 토론이라는 단단한 토대가 있었다.

이들의 학문세계는 구성원들의 인간적 유대와 활발한 토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중심에 바로 연암 박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연암이 이들 모임의 유일한 구심점일까? 그렇지 않다.

홍대용 · 박제가 · 이덕무 · 유득공을 비롯하여 유명무명의 많은 학자와 문인이

각자의 재능과 열의를 가지고 동참하여 각자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했다.


이렇게 형성된 학자와 문사 그룹을 학계에서는 연암그룹 또는 백탑파(白塔派)라 부른다.

18세기 중엽 당시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의 인사동 부근에 모여서

서로의 서재를 방문하고 서울 주변의 산천을 탐방하여 논쟁하고 토론하는 과정 속에

그들의 학문은 성숙해졌고, 문학은 참신한 개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케케묵은 고루한 학문과 지식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 그룹에 속한 문인과 학자들은 그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적 지성으로 성장했고,

그들의 저작은 불후의 고전으로 현재까지 생생한 의미를 던진다.

이들 그룹의 정체성은 개방성과 진보성에서 찾을 수 있다.

신분상 서얼들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신분을 따지지 않고 양반과 서얼들이 자유롭게 모였다.

벼슬을 하지 않거나 낮은 관직에 있었고, 중국과 일본을 여행한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그들은 조선의 개방과 선진적인 외국문물의 수입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주장을 펼쳤다.

불순하고 파격적인 주장을 소외된 지식인 집단으로 구성된 그룹이

공유하고 개인 저술의 형태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이들 그룹은 현대적 입장에서 보면, 각자의 학문적 다양성을 유지하면서 공통의 노선 아래 펼친

진보적 학술과 문학 단체로서, 활성화된 토론문화를 지향하고,

국제적 동향에 민감한 대안적 모임의 초보적인 형태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실 청나라 문화를 배우자는 위험한 발상이 용감하게 주장으로 제기되는 것은

한 개인으로는 힘에 부치겠지만 그룹에서 공유된 생각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연암과 초정의 주장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들에 대한 질시와 반목이 적지 않았던 것도

한 두 학자가 아닌, 그룹의 차원에서 펼쳐져 여론 형성의 힘을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의 주장과 활동은 서유구나 김정희, 조수삼 등 뒷시대의 학술과 문화를 주도하는 학자들과

개화기의 진보적 학자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그뿐 아니라 현대에서도 그들의 주장은

한국적 현실의 초시대적 분석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생생한 의미를 지닌다.

학문과 문학의 내용뿐만 아니라, 그들의 존재와 활동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닌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 안대희/ 명지대 교수 · 국문학

- 2005년 04월 12일 19, 26, 05월 04, 10, 17일, 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