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통신사 길] 7. 조령=새재(장원급제길)를 간신히 넘어 문경에

Gijuzzang Dream 2008. 6. 15. 12:32

 

 


 ‘문경새재’ 간신히 넘었네

 

조선시대 민중의 한 넘나든 고갯길 …

일본 침략 대비한 1, 2, 3관문 관광지로 탈바꿈

옛길의 정취가 남아 있는

문경새재 고갯길.

 

<8월9일(계사) 아침에 비. 늦게는 흐렸다.

조령을 넘어 문경에 당도하였다.>

 

 

경북 문경시는 ‘옛길’의 도시다.

아니, 옛길의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만큼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비해 옛길의 존재감이 크다. 이는 옛길 유적이 많은 탓도 있지만, 그것을 문화재로 살리려는 시 당국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경에는 전국에서 하나뿐인 ‘옛길박물관’이 있다.

문경새재 밑에 자리잡은 이 박물관의 정식 명칭은 ‘문경시립 새재박물관’.

새재 주변의 유물들이 전시 대상이지만, 전시물의 절반은 옛길과 이에 관련된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나 같은 ‘옛길쟁이’에게는 꿈같은 볼거리들이다.

학예연구원에 따르면, 조만간 전면 개수해서 아예 ‘길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한다.

이런 곳을 경영할 수 있다면, 아니 이런 곳에서 일할 수만 있어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전국 유일 ‘옛길박물관’ 사람들 반겨

 

박물관 말고도 문경시는 최근 수년간 옛길에 관련된 문화재 복원에 엄청난 관심과 힘을 쏟고

어마어마한 예산을 세워왔다. 6년 전 내가 처음으로 문경 시내 영남대로를 조사했을 때

폐허가 된 채 버려져 있었고, 내 책을 통해서 개탄하기까지 했던 불쌍한 옛길 유적들이

─물론 내 책 때문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몰라보게 단장되고 있다.

 

물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유적도 많지만, 산간벽지 지자체 예산과 국가 보조금만으로 충당하고

있기 때문에 완성까지는 앞으로 몇 년 더 걸릴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강한 의지로 해마다 조금씩 추진해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니 마음이 놓인다.

 

옛길이란 전국 모든 시 · 군에 있던 역사 유적인데,

이에 대한 보존·복원 활동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벌이는 지자체를 나는 본 적이 없다.

안타깝게도 통신사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는 상태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조선시대 문경은 농토가 별로 없는 산촌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나마 평지가 있는 산양면 일대도 당시엔 문경 땅이 아니라 상주목의 월경지였다.

주민들은 쌀을 먹을 여건이 안 되어, 6·25전쟁 뒤까지도 도토리묵이나 조를 주식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 도토리묵밥이 지금은 문경시의 민속음식으로 지정돼 백반보다 비싼 값에 팔리고 있으니, 시대의 흐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 때 탄광이 개발되고

문경선(당시는 점촌-가은 간, 해방 후는 진남-문경 간 연장) 기찻길이 생기면서,

문경은 ‘석탄의 도시’로 변모했다. 탄질은 태백보다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한반도의 탄광이

대부분 북한에 있던 상황에서 문경 석탄은 남한의 산업화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나그네들의 숙소였던 조령 동화원 터(위),

새재 마루턱에 있는

문경의 관문인 조령관문.

하지만 1990년대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탄광은 자취를 감추고, 주요 산업을 잃은 문경시는 침체 상태에 빠졌다.

자연히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

이때 지자체가 시작한 것이 ‘관광산업’이다.

 

석탄박물관, 도자기박물관, 문경온천, 사격장, 태조 왕건 촬영장 등 관광객을 위한 시설이 속속 들어섰고, 정부도 ‘경북 유교문화권 개발사업’ 명목으로 부분적이지만 지원을 했다.

 

이 개발의 핵심사업이 유교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과거길’, 즉 영남대로 옛길의 복원이었던 것이다.

이 덕분에 문경은 개발사업의 ‘우등생’으로 불리게 되었다.

 

 

진짜 옛 오솔길은 ‘장원급제길’

 

문경새재, 즉 조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영남지방을 가는 데 중요한 관문이었다.

동쪽의 죽령이나 서쪽의 추풍령보다 험하지만 가장 짧은 경로였기 때문이다.

 

문경을 지나면 길은 경상도 각지로 갈라진다.

경상도 어느 고을을 가든 문경은 반드시 거쳐가야 할 교통 요지였던 것이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때 새로 개척된 경로다.

그 전에는 안보역에서 동쪽으로 갈라지는 계립령(하늘재)이 있었다. 그리고 괴산 연풍 방면에서는 이화령(지금의 3번 국도)이 나란히 백두대간을 넘었다.

 

그러나 넘는 고개는 달라도

이들이 모두 향하는 곳은 문경읍이었다.

그러한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이 지역은 6·25전쟁 때도 격전지가 되었다고 한다.

 

사실 지금 관광지가 돼 있는 ‘문경새재길’은 전쟁 때 전차가 지나갈 수 있게 새로 닦인 것이고,

진짜 옛길인 오솔길은 군데군데 단절되면서 ‘장원급제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채 남아 있다.

그 길은 탱크는 고사하고 수레도 다니지 못할 정도로 좁은 오솔길이다.

 

이에 대해 통신사 조엄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갯길이 질어 거의 사람의 무릎이 빠지므로, 간신히 고개를 넘어 문경에 도착했다.

거듭 고갯길을 찾아 다시 영남 백성들을 대하고 보니,

세 해 만의 물색이 눈에 의의(依依)한데,

다만 한 가지 혜택도 도민들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조령에서 시 두 수를 지었다.>

 

 

새재의 충청도 쪽은 별로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아 그냥 시멘트길이다.

길이 그다지 길지 않을 뿐더러 주변에 연계할 만한 관광지도 없어 내버려두고 있는 듯하다.

반면 경상도 쪽은 주변이 ‘새재도립공원’에 지정되어 있어 시원한 계곡과 함께 분위기가 좋다.

옛날 나그네 숙소이던 원터 · 주막터 등도 복원됐고, 백두대간과 마주치는 고갯마루,

즉 충북에서 경북으로 넘어가는 지점에는 성벽과 관문도 자리잡고 있다. 이것이 제3관문이다.

 

‘3’이라는 숫자가 예고하듯 문경읍 쪽으로 내려가면 차례로 제2관문과 제1관문이 나온다.

그런데 이 이름들을 보다 보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조선시대 수도는 서울이고, 그렇다면 서울에서부터 차례대로 1, 2, 3관문 번호를 매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 관문의 목적을 생각해보면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때 이 관문을 세운 이유는 서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방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 상대는 일본이었다.

일본군이 남쪽에서 쳐들어온다고 가정하면 이 순서가 맞는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맞은 신립 장군은 이곳에서 성을 지키지 않고,

넓은 충북 충주 중원평야, 탄금대 근처까지 적을 끌어들인 다음 전투를 벌였다.

평지전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옛길 연구의 성지인

새재박물관 전경(위),

문경새재 곳곳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새재를 넘으며 지은 시 20편이 담긴 시비들이다. 

 

아무튼 오늘날 이 관문들은 훌륭한 관광지가 되었다.

제1관문까지 나가면 태조 왕건 촬영장이 있고,

또 신구(新舊)의 경상 감사가 임무 교대식을 했던 정자도 복원되어 있다.

 

경북도립공원 어귀부터 문경 읍내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

이 길가에는 문경의 또 다른 명물인 도요지(陶窯址) 간판들이 많이 보인다. 이미 도시의 중심을 점촌에 빼앗긴 옛 읍치는 한적하지만, 남쪽에 인접해서 만들어진 문경온천 관광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세 사신이 동헌에 모여 활 쏘는 것을 보며 이야기했는데,

본관 송준명, 상주목사 김성휴, 김천찰방 이종영,

유곡찰방 최창국, 안기찰방 김제공이 보러 왔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도도로키 히로시/ 숭실대 일본학과 강의교수 hstod@hanmail.net
발행일 : 2005년 04월 05일 (479호) 62~63쪽
주간동아 [일본인이 쓰는 조선통신사 길]

 

 

 

 

 

 

 400년전, 한류 원조 조선통신사

 

 

 

사진없던 옛날엔 여권 어떻게 만들었나?

아직 사진이 발명되기 전인 400여 년 전에는 여권을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3권에는 400년 전에 만들어진

검문소 통행증(여행증명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선통신사들이 여권을 가지고 일본 여행을 한 것은 아니지만,

통신사들이 가는 길에 있는 일본내의 검문소를 살펴보는 대목에서

당시 일본에서 내국인 여행객을 엄격히 통제하던 여행제도에 관한이야기가 소개되어있습니다.

"특히, 여성에 대한 검색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격했다고 한다.

세키쇼(검문소)를 통과하는 반드시 '세키쇼 통행증'을 가져와야 통과할 수 있었으며,

그 증서에는 여성의 신원부터 여행의 목적, 행선지, 머리 모양, 얼굴과 손발의 특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성에 대한 검색은 '히토미온나'라고 불리는 할머니가 담당했는데,

심지어 여성의 음부를 검색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일본에서는 400년 전에도

오늘날 여권과 같은 문서를 만들어서 여행객들을 철저하게 검문하였다고 합니다.

특히 여성에 대한 검문이 철저하였던 것은 에도에 인질로 거주하고 있던 영주의 부인이

허락없이 영지로 돌아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국가기밀 누출이나 막부에 대한 모반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하는군요.

400년 전에도 국가는 통행세를 걷고 국민을 통제하기 위하여

여권과 같은 신분증명서를 소지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3 >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진

조선통신사의 일본 행로를 따라가는 답사기입니다.

한 번 사행은 대체로 1만1470리 정도의 먼 길을 육로와 해로, 강로, 다시 육로를 거쳐서 다녀오는

먼 길이었다고 합니다.

아울러, 조선에서 출발한 300~400여 명에 이르는 통신사 일행뿐만 아니라

쓰시마 번에서 차출된 호위무사와 안내인, 일꾼을 포함하면 2000여 명에 이르는 행렬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당시 일본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여정이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조선통신사 여정을 쫓아가는 3번째 답사기인데,

2007년과 2008년에 각각 1, 2권이 먼저 간행되었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3권은 3년 계획으로 진행된 세 번째 조선통신사 옛길 답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제 3권에는 여정은 나고야에서 시작하여,

당시 막부가 있던 에도(도쿄)를 지나서 닛코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책은 조선통신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주는 책이며,

아울러 조선통신사가 지나는 곳마다 경험하였던 그곳 일본인들의 옛 모습에 대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앞서 소개한 악명 높은 아라이 세키쇼(검문소), 하코네 세키쇼를 비롯한 악명높은 일본내 검문소를

그냥 통과한 사람은 에도 막부와 조선통신사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이묘나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도 가마의 문을 열고 모자를 벗은 채 지나가야 할 만큼

엄중한 세키쇼를 검문없이 지나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조선통신사들이 '국빈'의 예우를 받았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인간 둑을 쌓아 강을 건너는 '사로승구도' ⓒ 한울

 

 

인간 둑을 쌓아 건너는 '오이강'

나고야에서 에도로 가는 길에는 '오이강'이라고 하는 유속이 빠른 강이 있었다고 합니다.

평균수심 70cm, 폭 2km의 얕은 하천이지만 평균 강수량이 3000mm에 이르기 때문에

물 흐름이 빨라 건너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당시에는 수위가 3척5촌(약 104cm)이면 말로 건너는 것이 금지되고,

4척5촌(135cm)을 넘으면 도강 자체가 금지되었으며,

도강 인원도 350명으로 제한하는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도 오이강 도강을 앞두고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불어난 물 때문에 1711년에는 나가에에서 하루, 1748년에는 카케가와에서 이틀을 더 묵어야 했고,

1636년에는 강을 건너던 쓰시마 번주의 짐을 실은 말 5마리가 떠내려가서 2마리가 죽기까지 했다"

이 책에는 1748년 조선통신사에 참여했던 이성린이 그린 '오이강을 건너며'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과

조명채가 쓴 <봉사일본시문견록>에 도강 모습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림과 글에는 사신행차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수백 명의 인부가 몰려나와서

강물의 흐름을 늦추기 위하여 손을 맞잡고 인간둑을 쌓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인부들은 사행에 참가한 사람들의 직책에 따라서 50여 명이 1사람을 받침대에 태우고

강을 건너기도 하고, 한 사람씩 목말을 태워 강을 건너기도 합니다.

수 백 명의 인부가 일제히 들것에 사람들을 떠메고 '물노래'를 부르며 강을 건너는 모습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당시에는 한 겨울에도 '가와고시'라고 불리는 이 인부들이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에

철망처럼 얽은 대나무 바자 울타리에 이들을 가두어두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답니다.

이 강에 배를 띄우거나 다리를 놓지 않는 것은 에도 바위를 위한 전략적 이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권력자의 정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강제노역의 고통을 당한 셈입니다.

'가와고시'라는 인부들이 강을 건너 주는 오이강 도강은 메이지 시대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400년 전, 일본 사회를 뒤흔든 한류 원조

또한 조선통신사 길을 따라가는 여정에는 수많은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로 참여하였던, 조선 관리들이 빼어난 경관을 보고 지은 시와 수려한 자연을 담은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통신사 일행은 오늘날 한류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바람'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특히, 이 책에는 후지산이 바라다 보이는 에도의 관문인 하코네 지역을 지나면서 남긴

여러 편의 시문과 글씨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중 하코네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박남간이 쓴 '금탕산조운선사십경'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쌍유봉은 웅대한 호숫가를 눌렀고 남병산 아래는 속진을 피할 만하네

온천궁은 옛날 자취인데 장차 달을 맞을 만하고 비설암은 높아서 봄을 기다릴 만하다네

멀리 사봉을 가리키되 뜻을 두기 어렵고

가까이에서 대통으로 구기질을 하니 족히 용납할 만하네

금탕산의 형승은 모두 감상할 만하여 독목교 가에서 바라보니 눈이 새로워지네

 

이 외에도 신유한, 조엄, 강홍중, 임광 등이 남긴 여러편의 시문이

하코네의 절경을 노래하는 글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 여정을 따라가는 길에는

조선에서 전해 준 여러 가지 기념물들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특히, 린노지 삼불당에는 효종이 쓴 친필이 귀하게 남아있고,

인조 때 만들어 보내 준 범종도 전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조선통신사들이 일본에 전해준 여러 가지 기념품들도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교류는 국가뿐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참가하는 대규모 사회문화 교류 행사로

에도시대 270여 년 동안 한일 양국 평화의 초석이 되었다는 하는 것이 필자들의 평가입니다.

에도는 물론이고 일본 전국의 민중에 이르기까지 큰 환영을 받았던 조선통신사 열풍은

그 후 각 지역의 마쓰리(축제) 문화 속으로 스며들어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 책을 쓴 '조선통신사 탐방단'은 불행했던 역사적 고난 시대를 뛰어 넘어

한일 양국간에 친선과 우호의 시기를 찾아내기 위하여 통신사 교류의 발자취를 찾아 나섰다고 합니다.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서 3>은 400년 세월을 뛰어넘어 전해지는 통신사 파견을 통해 이루어진

한일 양국의 문화교류의 흔적을 차분하게 쫓아가고 있습니다.

부록에는 조선통신사 옛길을 따라가는 여행 계획을 세우는 이들을 위한 교통편, 연락처,

간략한 소개와 입장료, 각각의 시설 개관시간과 같은 여행정보들도 담겨있습니다.

<조선통신사> 라고 하는 역사 속 길을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일본여행 계획을 세워보는 좋은 기회를 열어주는 특별한 책입니다.

 2009.04.13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