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조선통신사 길] 9. 한티고개 넘어 안동에서 의성 땅으로

Gijuzzang Dream 2008. 6. 15. 12:30
 

 

 


 

문소 별칭 역사 깊은 의성 땅에 도착

 

빨간 바위에 터널 뚫어 왕래

한티 넘어 암산 ‘나제통문’과 비슷 …

암산유원지 안에 있는

바위터널.

 

<8월14일(무술) 맑음. 의서에 닿았다.>

 

이번에는 안동에서 중앙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게 된다.

안동읍성 남문을 나가 바로 낙동강을 건넌다.

서울의 한강진 이후 두 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다. 옛길은 가능하면 강을 건너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상선이든 나룻배든, 교통량이 많은 간선도로 다리에는 많은 시설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성으로 가는 길은 험하지 않지만 고개 또 고개의 연속이다.

신작로는 강의 굴곡을 따라 가는데, 옛길은 강을 따라 가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지름길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벼랑이 많은 강변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먼저 한티고개를 넘어 미천이란 곳에서 다시 물과 마주친다.

신작로는 동쪽, 암산유원지로 돌아간다.

이 길은 이 길대로 재미가 있다.

이 길은 암산이라고 불리는 빨간 바위에 터널을 뚫은 것이다.

차량 두 대가 엇갈려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구멍이 나 있는데 시멘트 보강 등은 전혀 해두지 않았다. 전북 무주의 ‘나제통문’과 비슷한 모습이다.

일제강점기 때 생긴 것인지 8·15광복(1945) 후에 생긴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지금 벌여놓았다면 ‘자연파괴’ 낙인이 찍혔겠지만, 주변경관과 적절히 어울려 뭐라 하는 사람 없다.

 

 

석현고개 · 구미시장 흔적 없어

 

벼랑길을 피해 갔지만, 옛 고갯길은 바위산을 무시하고 곧장 나아간다.

이 고개는 광음재, 혹은 광재라고 한다. 시멘트로 포장된 1차로가 이어지고 있다.

조금 큰 승용차라면 옆으로 빠져버릴 것 같은 길이다.

 

광재 정상은 시멘트 포장공사 중이었다. 시멘트는 아스팔트와 달리 양생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동네 어르신은 “가도 괜찮아~” 하셨지만, 막상 덜 마른 시멘트 위를 밟고 서니

멀리서 인부 아저씨가 “안 돼요, 나가요!”라고 외친다. 할 수 없이 신작로를 돌아가기로 했다.

고개 반대쪽은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이다.

 

 

<낮에 일직에서 쉬는데 청송부사 유건, 영양현감 이언신이 보러 왔다.>

 

중앙선 기찻길과 나란히 있는 오야현 고개(왼쪽). 광음재로 올라가는 옛길(오른쪽).

 

광음마을을 지나면 옛길은 다시 신작로와 합쳐지고, 얼마 안 가서 일직면 소재지에 도착한다.

일직역은 남안동IC 방향으로 조금 간 송리리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옛 안동의 속현이었던 일직읍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통신사 일행은 보통 이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실은 면 소재지로 진입하기 직전에 석현이라는 작은 고개를 넘게 되어 있는데,

4차선으로 확장되면서 석현은 아예 평지가 되어버렸다.

 

옛길은 미천을 건너 강가를 따라 간다.

옛 지도에는 평지가 끝나는 지점에 ‘구미시장’이라는 꽤 큰 장터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논과 제방만 있을 뿐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홍수 때문에 떠내려간 것인가.

 

여기서부터 다시 고갯길이다. 오야현 고개인데, 도중에 기찻길이 만든 벼랑 때문에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신작로를 돌아가서 반대쪽에서 걷기 시작한다.

비포장 옛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쪽도 기찻길 때문에 약간 변경된 듯하다.

기찻길은 신작로와 달리, 터널을 통과하면서 직선을 택하며 간다.

 

단촌면 소재지를 지나면 마지막 고개인 재릿재가 나온다.

이 고개는 길 자체가 없어져 그냥 풀을 헤치면서 가야 한다.

철파역 터인 철파리를 지나면 드디어 의성읍이 나타난다.

의성읍 초입에 있는 동네는 북원동이다. 이름 그대로 고을 북쪽에 원이 있었던 자리다.

남원동도 있었는데, 현재 지명에 남아 있지 않다.

 

의성은 원래 소문(召文)국이라는 독립국가였다.

그때 수도는 현 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탑리리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신라 벌휴왕이 소문국을 멸망시켜서 소문현으로 만들었고,

이후 경덕왕 때 문소(聞召)로 바뀌었다. 의성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고려 태조 때다.

지금도 문소라는 명칭은 의성의 별명으로 통한다.

의성읍의 서쪽 언덕 위에는 ‘문소루’라는 누각이 서 있다.

이 누각은 원래 읍내의 객사와 동헌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문소지도에 의성 옛 모습 간직

 

원래 객사 옆에 있었던 의성 문소루.

의성읍의 옛 모습은, ‘문소지도’라는 고지도가 전해지고 있어 지금도 상세히 알 수 있다.

지도를 보면 현재 의성초등학교 자리가 객사였고,

의성군청 자리가 동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를 보면 의성이라는 명칭이 말해주듯 둘레 4720척에 이르는 큰 성곽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의성읍성은 토성이었기 때문에 안동이나 충주읍성과 달리 조선 말기에 자연스레 자취를 감춰버렸다.

 

의성읍 옛 객사 터에서 아사천을 복개한 도로를 건너면, 남쪽으로 의성시장이 있다.

그리고 거기보다 더 남쪽, 그러니까 의성읍 남쪽 끝자락에는

의성다운 색다른 도매시장이 있다. 바로 마늘시장이다.

 

의성마늘은 조선 중종 21년(1526)부터 의성읍 치선리 성암마을에서 재배되기 시작했다고 하니,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지역 특산물의 기원설은 으레 과장이나 왜곡이 따라오게 마련인데,

의성마늘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역사지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의 문헌을 자주 보는데,

당시 향토지에도 마늘의 특산지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조선시대 지리지에도 기술되어 있으니, 당시부터 의성은 마늘의 특산지로 인정받아온 것이다.

 

 

<저녁에 의성현에서 자는데, 주수 김상성이 들어와 뵈었다. 이날은 70리를 갔다.>


도도로키 히로시/ 숭실대 일본학과 강의교수 hstod@hanmail.net
발행일 : 2005년 05월 24일 (486호) 60~61쪽

 주간동아 [일본인이 쓰는 조선통신사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