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신화기행] 광시(廣西)이야기
① 좡족 - 사람은 꽃이다 | ||||||||||
광시(廣西) 좡족(壯族)자치구의 중심도시 난닝(南寧), 공기도 맑고 햇살도 환하다. 중원 땅보다 베트남이 더 가까운 중국의 남쪽, 시원하게 뚫린 길의 양쪽엔 목면화(木棉花) 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봄이 되면 메마른 가지에 가장 먼저 피어나는 선홍빛 큰 꽃, 목면화는 좡족의 창세신 부뤄퉈(布洛陀)의 전사(戰士)였다. 그는 언제나 손에 횃불을 들고 싸웠으며 죽을 때도 그것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죽은 뒤에 가지가 온통 붉은 꽃으로 뒤덮이는 나무, 목면화가 되었다.
좡족이 사는 곳은 아열대지역에 속해 겨울에도 빛깔 고운 꽃들이 여기저기 피어 있다. 그래서 꽃들에 관한 신화가 많다.
좡족의 창세여신 무리우쟈(姆六甲)도 꽃에서 태어났다. 하늘과 땅이 갈라진 이후, 대지는 황량했다. 그 황량한 대지에 잡초가 생겨났고 그 땅에 꽃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 꽃 속에서 머리가 긴 여신 무리우쟈가 탄생했다.
무리우쟈는 화산(花山)에 있는 천상의 꽃밭에서 수많은 종류의 꽃들을 기르며 살았다. 이 꽃밭은 생명의 꽃을 비롯한 온갖 꽃들이 사는 우리나라 신화의 ‘서천꽃밭’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원래 천상의 꽃밭에 사는 꽃들이었다.
여신이 꽃의 영혼을 인간세상의 어느 집에 보내주면 그 집엔 아이가 태어났다.
천상의 꽃밭에는 붉은 꽃과 하얀 꽃이 자랐는데 여신이 붉은 꽃의 영혼을 보내면 여자아이가, 하얀 꽃의 영혼을 보내면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여신이 꽃밭의 꽃들에 물을 주고 잘 돌봐주면 인간세상에서 자라는 아이도 건강하고 생기가 있었다. 그러나 꽃들에 물이 부족하거나 벌레가 생기면 인간세상의 아이도 병에 걸렸다.
그럴 때 인간은 사공(師公: 좡족의 무당)을 청해 영혼여행을 하게 한다. 사공이 직접 천상의 꽃밭으로 가서 병에 걸린 아이의 꽃을 찾아내 꽃에 생긴 벌레를 없애거나 물을 주면 꽃이 생기를 되찾고, 아이도 다시 건강하게 되었다.
꽃의 여신이 하얀 꽃과 붉은 꽃을 함께 심으면 인간세상의 남자와 여자는 혼인하여 부부가 된다. 그리고 인간이 죽으면 다시 꽃이 되어 천상의 꽃밭으로 되돌아갔다. 하늘나라 꽃밭은 생명의 근원이며 동시에 영혼이 돌아가는 곳이었고 그곳에서 사람은, 한 송이 꽃이었다.
좡족 사람들에게 전승되는 노래 중에 ‘꽃을 바치는 노래(還花謠)’가 있다.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어 죽은 젊은 아내를 위해 남편은 무덤가에 파초를 심는다. 그리고 아홉 달이 지나 파초에 진분홍 꽃봉오리가 맺힐 무렵, 아내를 먼저 보낸 남편은 슬픈 이별의 노래를 부른다. 당신 떠난 지 아홉 달, 이제 먼 길 떠나요 당신 이제 씻어야지요 안개로 그대 얼굴 씻어주고 눈물로 그대의 발을 씻겨줄게요 사랑으로 당신의 영혼을 위로해요 이제 당신 이렇게 깨끗이 씻었으니 가장 크게 자라는 건 파초 어서 그 꽃을 가지고 가요 정결한 여인으로 다시 태어나요 이제 모두 푸른 연기로 변해버렸지요
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를 위해 무덤가에 파초를 심고, 그 파초에 꽃봉오리 맺히면 안개와 이슬과 눈물로 아내를 정결하게 씻겨 꽃봉오리 들고 천상의 꽃밭으로 돌아가라는 노래를 부른다.
피를 흘리며 죽어간 아내는 깨끗한 몸으로 화산으로 돌아가 다시 세상에 태어나기를 기다리게 되고 아내를 보낸 남편도 이제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좡족 사람들에게 꽃은, 영혼이다. 혼돈의 우주에 홀로 생겨나 천지를 만들고 인류와 만물을 만들었다. 숨을 내쉬어 하늘을 만들었고 하늘에 구멍이 나자 목화솜으로 막았다. 그것이 흰 구름이 되었다. 하늘이 작고 땅이 커서 하늘이 땅을 다 덮지 못하자 땅의 가장자리에 바느질을 하여 실을 당겨 땅에 주름을 잡아 하늘과 땅의 크기를 맞췄다. 그때 튀어나온 부분은 산이 되었다. 그리고 두 개의 큰 산을 딛고 앉아 오줌을 누었고 오줌에 젖은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
그러나 사회 형태가 바뀌면서 무리우쟈는 위대한 신성을 잃었고 남성 신인 부뤄퉈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한없는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뤄퉈는 ‘바오롱퉈’라고도 불리며(부뤄퉈의 고향이라고 하는 톈양 사람들 발음), 물고기 잡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쳤고 불을 발견했으며 식물을 심고 가축 기르는 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문화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태어난 우레신을 하늘로 쫓아버렸으며 뱀 혹은 악어처럼 생긴 투어를 물속으로, 사나운 호랑이를 숲 속으로 쫓아 인간들을 편히 살 수 있게 해주었다.
부뤄퉈가 늙어 나이가 들자 부보가 그의 후계자가 되었고 부보 역시 비를 내려주지 않는 우레신과 싸운다. 우레신은 바람과 불을 손에 쥐고 있는 비의 신이다. 논농사를 짓는 좡족 사람들에게 우레신은 무시무시한 권위를 지닌 신이었다. 수탉처럼 생긴 머리를 가진 우레신은 부보가 피운 불에 그슬려서 얼굴이 검푸르게 되었다. 부보한테 패해서 발이 잘린 후 급한 마음에 닭발을 갖다 붙이는 바람에 우레신의 발은 닭발이다. 우레신과 부보는 신화 속에서 치열한 전쟁을 벌였고 결국 우레신이 대홍수를 일으키는 바람에 부보가 패하여 죽어 샛별이 된다. 물론 그 홍수 속에서 살아남은 남매가 다시 인류의 시조가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부뤄퉈는 창세 여신인 무리우쟈의 위치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고 좡족의 시조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2004년, 난닝 서북부 도시 톈양에는 거대한 좡족의 성지가 만들어졌다. ‘한족의 황제(黃帝)에 맞먹을 만한 좡족의 인문시조’ 부뤄퉈를 위한 공간이 간좡산(敢壯山)에 조성되었는데 그 규모가 놀라울 정도로 크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제사에는 수십만명이 몰려든다.
신화 속의 인물을 역사 속의 실존인물로 만들어 숭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그것이 고고학 등과 결합하여 이데올로기가 될 때 얼마나 큰 문제를 일으키는지에 대해 필자는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책세상, 2007)에서 상세히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소수민족인 좡족(사실 좡족의 인구는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많은 1500만명이다)에게서도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 착잡하다.
신화 속의 신은 그냥 신화의 공간에 남아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 신들이 신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실존했던 역사 속의 인물로 끌어내려질 때 신화의 영원한 생명력은 사라지고 만다. 신화의 생명력은 새롭게 조성되는 거대한 공간들과 그곳을 향해 몰려드는 인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소박한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것임을. 해가 떨어지면 세상이 너무 어두워졌고, 소녀는 등불을 하늘에 걸어 세상을 밝히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소녀는 등불과 짚신 짜는 도구, 깨 한 자루를 들고 길을 떠났다.
하늘에 도착하려면 얼마를 가야 하는지 몰랐으나 가다보면 언젠가는 도착할 거라고 믿었다. 소녀는 짚신이 떨어지면 만들어 신고 하루 끼니를 깨 한 톨로 때우며 한없이 걸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깨는 반으로 줄고 소녀는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계속 걸었다. 어느 날, 물이 말라버린 바닷가에 도착하여 커다란 둥근 돌판 위에 앉아 짚신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마른 바다에 갑자기 물이 생기고 파도가 치더니 소녀가 앉아 있는 둥근 돌판이 물 위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한참 후에 짚신을 만들던 소녀가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이미 망망한 하늘에 올라와 있었다. 소녀는 기뻐하며 들고 온 등불을 밝혔고, 돌판은 환하게 빛났다. 그것이 바로 달이다. 소녀가 남은 반 자루의 깨를 하늘에 뿌렸더니 그것은 모두 초롱초롱한 별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바라보며 소녀가 정말 하늘에 올라가 등불을 켰음을 알고 함께 기뻐했다.
-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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