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신화기행] ‘구이저우(貴州) 이야기’
④ 거미여신 싸톈바, 햇살이 되다 | ||||||||||
구이저우성 충장현 부근의 잔리(占里) 마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 마을의 각 가정이 거의 모두 1남 1녀를 유지하고 있으며 1949년 이래 인구 증가율이 0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곳의 우나이건(吳乃根) 할머니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비방에 의해 환화초(換花草)라는 약초를 사용하여 아이의 성별을 바꿔주기도 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을 위해 중절수술을 해주기도 했다.(이 비방은 여성을 통해서만 전승된다)
최근 환화초라는 신비로운 약초의 비밀에 대해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그 비밀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속시원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세상과 떨어져 있는 깊은 산속, 자원이 한정된 마을에서 한 부족이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래서 아이가 태어나면 숲 속에 삼나무를 심었다.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도 산에 가서 나무를 심는 것이다. 숲은 그들에게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인구가 많아지면 경작지가 많이 필요하게 되고, 개간을 위해 숲을 훼손하면 그것은 곧 부족의 생존을 위협한다고 믿었던 지혜로운 잔리 사람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인공적으로 인구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땅에서 거둘 수 있는 찰벼가 많은 사람은 아이를 하나 더 낳아도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하나만 낳아야 했다. 그런 규정 역시 부족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원치 않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약초를 사용하여 안전하게 중절수술을 해주었던 것도 그런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잔리 마을의 여성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남자 아이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없는 마을, 여자도 혼인을 할 때 자신 몫의 논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곳, 혼인을 일찍 해도 남편 집으로 가지 않고 몇 년 동안은 친정에 머무는 습속 등이 여성에 대한 그들의 배려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동족 사람들이 조상신으로 모시는 위대한 할머니 여신, 싸톈바(薩天巴)와 관련되어 있다. ‘천 명의 고모를 낳은 할머니’라는 뜻을 갖고 있다.
싸톈바는 싸마(薩瑪)라고도 불린다. ‘싸’는 ‘할머니’, ‘마’는 ‘크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싸톈바, 즉 싸마는 퉁족의 대모신(大母神)이다.
싸톈바를 조상으로 모시는 그들에게 있어서 부족 모두를 감싸고 품어주는 여성성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이다.
노래를 통해 부족의 법칙을 배우는 잔리 퉁족 마을에서의 형사사건 발생률 역시 수십 년 동안 0이다.
달과 여성성, 노래로 대표되는 그들의 온화함은 직조의 여신이자 태양의 여신인 싸톈바로 형상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싸톈바는 따뜻한 태양의 여신이다. 싸톈바의 신단은 하얀 돌과 반쯤 접힌 검은 우산으로 만들어진다. 우산의 모양도 태양을 닮았고 하얀 돌의 빛깔도 태양을 닮았다. 퉁족의 중심 광장인 고루(鼓樓) 마당에는 자갈로 만들어진 커다란 둥근 원 문양이 있다. 싸톈바, 즉 싸마를 모시는 제삿날에는 그 마당에서 우산을 든 여인들이 모여 제사를 올린다. 우산살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햇살을 의미한다. 비를 막아주는 우산은 또한 마을에 닥치는 재앙을 막아주는 싸톈바의 상징물이다. 태양의 여신 싸톈바가 지상으로 내려올 땐 황금거미로 몸을 바꾼다. 거미가 자아내는 투명한 거미줄은 눈부신 햇살을 닮았다.
아득한 옛날, 하늘기둥이 흔들려 하늘이 무너지려 할 때 싸톈바가 입에서 옥 같은 거미줄을 쏟아내어 그물을 만들어 하늘이 무너지는 걸 막아주었으며, 옥 거미줄 기둥을 만들어 하늘을 받쳤다. 여신이 자아내는 거미줄은 옷감을 짜는 여신의 이미지와 겹쳐지며 그것은 또한 물레를 잣는 서양 동화 속의 마녀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그리고 천의무봉한 직조 솜씨를 뽐내던 아라크네가 오만하다고 하여 신들의 징벌을 받아 거미가 되었다거나, 중세 유럽에서 ‘마녀’로 낙인 찍혔던 여성들의 대부분이 약초를 모아 뭔가 알 수 없는 약을 만들거나 물레를 자아 실을 뽑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왜 마녀는 늘 약을 만들고 물레를 잣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여성을 유혹자로 생각했던 중세 유럽의 남성들이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었던 지극한 여성성의 상징이다. 생명을 잉태하고 태어나게 하는 능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을 자아 옷감을 짜는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며, 약초를 끓여 약을 만드는 마녀의 능력은 치유의 힘을 보여준다. 치유의 힘과 생명을 잉태하는 힘,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외적의 침입에서 부족을 보호해주는 강인한 여성의 힘이 겹쳐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원시적 대모신의 모습이다.
거미 여신이면서 태양의 여신이고 동시에 치유의 여신인 싸톈바는 세월이 흐르면서 싸쑤이(薩歲)와 합쳐진다.
싸쑤이는 천년 전쯤, 퉁족 사람들이 이 지역에 정착할 때 한족들의 압박에 맞서 부족들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우다가 중과부적으로 절벽에 떨어져 죽었지만 죽은 뒤에 퉁족 사람들의 보호신이 된 여성 싱니(杏女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싸쑤이는 늦게 생겨난 여신이지만 원시적 대모신 싸톈바의 이미지와 중첩되면서 하나가 된다. 퉁족뿐 아니라 많은 소수민족 여성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성을 다해 고운 무늬를 수놓아 그것으로 아기를 업는다. 아기를 보호해주는 그 포대기에 퉁족 여성들은 태양 무늬를 수놓는다. 가운데 큰 원이 있고 가장자리에 여덟 개의 작은 원이 있으며 거기서 햇살 같은 방사선 무늬가 퍼져 나온다. 그들이 우스개로 ‘팔채일탕(八菜一湯 : 여덟가지 요리와 하나의 탕)’이라고 부르는 그 문양은 바로 태양의 여신 싸톈바의 상징이다. 이것은 자애로운 싸톈바가 9개의 태양을 만들어 홍수에 휩쓸린 대지를 마르게 해주었다는 또 다른 전승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싸톈바는 해무리가 되기도 하며 거미가 되기도 한다. 신성한 싸톈바가 하늘에 해무리의 형태로 나타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함부로 손가락질해서는 안 된다. 황금빛 거미가 나타날 때 역시 마찬가지, 그것을 가리키거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싸톈바는 퉁족의 수호신이기 때문이다.
바사 먀오족이 보여주는 ‘양(陽)’의 강인함과 달리 ‘음(陰)’의 부드러움을 보여준다. 퉁족 마을의 고루 앞 광장에 세 마리 물고기 문양이 등장하는 것 역시 물고기가 갖고 있는 생식과 번영의 이미지가 달이나 여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신화에서도 드러난다. 싸마가 낳은 알 네 개를 거북할미 싸빈이 품었고, 그중 좋은 알 하나에서 인류의 시조 쑹언과 쑹상이 태어난다.
그들이 결합하여 장양과 장메이 남매를 낳았고 장양과 재주겨루기를 하다가 장양이 피운 불 때문에 새 옷이 타고 다리 한 쪽이 그슬린 천둥할미(퉁족의 천둥신은 역시 여신이다)가 하늘로 올라가 은하수 물을 퍼서 지상에 쏟아 붓는다. 홍수에 휩쓸린 세상에서 조롱박 속에 숨었던 장양과 장메이가 유일하게 살아남아 다시 인류의 조상이 되는데, 이상한 살덩이를 낳게 되자 그것을 잘라 여기저기 버린다.
그 뼈가 강인한 먀오족이 되었으며, 살은 온화한 퉁족이 되었고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내장은 오색찬란한 옷을 입는 야오족(瑤族)이 되었다. 주변 민족들이 모두 하나의 조상에게서 나왔다고 믿는 그들은 지금도 주변 민족과 대립하기보다는 함께 어울리면서 우아하고 품위 있게 깊은 산 물가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 김선자, 중국신화연구가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수민족 신화기행 - 구이저우(貴州)이야기 (2) 단풍나무의 후손을 찾아 下 (0) | 2008.06.13 |
---|---|
소수민족 신화기행 - 구이저우(貴州)이야기 (3) 달이 뜬 밤하늘의 빛깔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1) 나시족의 창세기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2) 나시족 흑백전쟁 (0) | 2008.06.13 |
소수민족 신화기행 - 윈난이야기 (3) 바이족의 창세기 (0) | 2008.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