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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마다 자녀교육 비결 있다

Gijuzzang Dream 2008. 6. 5. 21:01

 

 

 

 

 

 명문가마다 자녀교육 비결 있다

 

 

 

서신교육 · 일기쓰기 솔선수범 등 평범한 원칙 대대로 실천

요즘 자녀교육은 핵가족화로 인해 부모가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더 힘들다.

이전에는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3대가 살 경우 격대교육이 가능했다.

아버지가 신경을 덜 써도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돌볼 수 있었다.

자녀교육이 어려움에 처한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바람직한 역할 모델을 참고하는 것이다.

역할 모델 가운데 대대로 자녀교육을 성공적으로 해온 명문가들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지역 커뮤니티에 선행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해온 명문가라면 더할 나위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정신이 살아 숨쉬는 사의재.

다산 선생은 전남 강진 유배기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서 편지 주고받아

 

국내외 명문가들의 자녀교육법을 살펴보면 명문가마다 다른 자녀교육의 비결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진리가 그렇듯이 명문가들이 대대로 실천해온 그 노하우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이지만 그 속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동서양에 걸쳐 500년 명문가의 자녀교육 비결은 바로 ‘평범한 원칙’을 한두 대에 그치지 않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이어져오면서 실천해온 데 있다.

오늘날에도 유용한 명문가의 자녀교육법으로는 먼저 서신교육을 들 수 있다.

자녀교육에 편지를 활용하는 ‘서신교육’을 말할 때 퇴계 이황과 함께 다산 정약용을 빼놓을 수 없다.

 

다산은 자녀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39~57세)를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내

아버지로서 직접 자녀교육을 하지 못했다.

유배지에서 다산이 자녀교육을 위해 활용한 것이 바로 편지다.

18년여 동안 유배지에서 보낸 다산은 두 아들(학연 · 학유)과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자녀교육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다산은 비록 대역죄인의 가문이 돼 벼슬을 할 수 없지만

교육 환경이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학문으로나마 성공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않은 두 아들은 당대의 학자들에 뒤지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편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보다 감정을 순화시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고 한다.

아무래도 화가 날 때 얼굴을 보고 말하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녀 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면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잃을 수도 있다.

다산처럼 자녀에게 100통의 편지를 쓴다면 가정교육은 절로 이루어지 않을까. 

 

이황은 자녀교육의 대가였다

퇴계 이황 선생의 종택과 퇴계선생의 초상.

친인척 자제들까지 꼼꼼히 챙기는 인적 네트워크 중시

퇴계 이황은 ‘자녀교육의 대가’였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퇴계도 여느 부모처럼 자녀교육에 노심초사하며

공부법이며 재산관리, 인간관계 기술 등 자녀의 앞날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친

자녀교육의 표본이었다. 그야말로 퇴계는 요즘 회자하는 ‘슈퍼 대디’라고 할 수 있다.

300명이 넘는 제자와 90명이 넘는 후손의 멘토가 된 퇴계야말로

조선시대를 통틀어 자녀교육에 가장 열정적이었기 때문이다.

퇴계식 자녀교육의 특징으로는 우선 세심한 배려를 꼽을 수 있다.

“어제 너의 초사흗날의 편지를 보았다. 무사히 공부하고 있다니 위로가 된다. (중략)

스스로 자신을 잃고 붓을 꺾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은 1551년 퇴계 이황이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과거시험을 공부하는 아들의 성적이 좋지 않자 혹 실망해 공부를 포기할까봐 염려하는

아버지의 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퇴계는 과거제도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아들에게는 과거시험을 치를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과거시험 전문학원인 ‘거접(居接)’에 보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황은 아들과 손자를 당시 영주의 거접에 보내 시험을 준비하게 했다.

대학자인 퇴계도 자손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 심정은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퇴계는 자녀에게 충고할 때는 자녀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직접 말로 훈계하기보다

편지를 활용하는 방법을 주로 택했다.

 퇴계의 ‘안도에게 보낸다’는 서간집은 지금도 베스트셀러로 귀감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퇴계 이황, 아들에게 편지를 쓰다’가 출간돼 화제가 되고 있다.

 

제자 300명·후손 90명의 멘토 역할

둘째, 퇴계의 자녀교육의 두드러진 특징은

요즘 가장 필요한 덕목인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자녀뿐 아니라 먼 친인척의 자제들까지 꼼꼼하게 챙겼다. 그가 돌본 후손은 무려 90명이나 됐다.

퇴계는 이미 450여 년 전에 요즘 강조되는 덕목인 ‘인적 네트워크’ 교육을 실시했던 것이다.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던 것이다.

“김성일과 우성전이 지금 ‘계몽’을 읽으려 한다더구나. 너는 벌써 ‘주역’을 읽고 있지만

‘계몽’도 읽지 않을 수 없으니,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퇴계가 함께 공부하라고 권한 김성일과 우성전은 훗날 대학자가 되었다.

이처럼 퇴계는 지금 생각해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학식 있는 제자들끼리,

특히 자신의 아들과 손자, 조카들이 자신의 뛰어난 제자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권유했다.

 

굳이 스승이 제자를 위해 그런 일까지 신경 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들과 손자, 제자들을 각별히 챙긴 것이다.

특히 학문이 깊고 똑똑한 제자가 있으면 아들과 손자, 다른 제자들에게 소개해주고

함께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학문하는 사람은 좋은 벗을 얻어야 서로 도움을 주고 더욱 학문에 매진할 수 있다며

벗을 맺는 일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퇴계의 인적 네트워크는 그 이후 영남학파라는 조선시대 최고의 학파를 형성했다.

마지막으로, 퇴계는 자손들에게 ‘빚보증은 절대 서지 말고 또 이자놀이를 절대 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퇴계는 ‘이식(利息)으로 식산(殖産)하는 것,

즉 이자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금한다는 ‘금식산(禁殖産)’을 좌우명으로 남겼다.

고리대금업자같이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금한 것이다.

대학자인 퇴계지만 자손들을 위해서는 현실적인 지침도 마다하지 않았다.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다면 인간관계에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J·F 케네디 전 대통령이 생존 시

재클린 여사와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둘째, 식사시간을 잘 활용하자.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을 배출한 케네디 가문의 경우

아버지의 자녀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대통령감’이었다.

케네디의 아버지(조지프 패트릭 케네디)는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의 후원회장을 지낼 정도로

재력을 지닌 재벌 회장이었다. 9남매를 둔 조지프는 사업으로 바쁜 중에도 자녀들을 챙겼다.

특히 조지프는 아이들에게 사업상 일들을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었다.

집에 돌아오면 저녁식사 시간의 대화는 주로 그가 만난 유명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식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는 아이들이 세상의 일을 접하는 통로였고 세상에 대한 관점을 키우는 창이었다.

또 그는 출장 중에도 전화를 걸어 9명의 자녀와 차례로 통화하면서

부모자녀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케네디 형제들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드대는 케네디 가가 미국 사회에서 주류가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케네디 가의 어머니 역시 식사시간을 토론의 장으로 활용했다.

뉴욕타임스를 먼저 읽게 하고 주제를 잡아 토론을 유도했다.

이는 나중에 케네디가 정치가로 성공하는 데 큰 밑천이 됐다.

셋째, 부모가 좋은 습관을 솔선수범하자.

명문가들은 아버지가 솔선수범하면서 평생 자녀의 본보기 역할을 다했다.

 

 

톨스토이, 60년간 일기 쓰기 모범

 

톨스토이는 수많은 걸작만큼 값진 보물을 남겼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60여 년 동안 지속한 ‘일기 쓰기’ 습관이다.

두 살 때와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고아나 다름없이 자란 톨스토이는

독학으로 공부하다시피 했다. 이때 그를 지탱해준 것 중의 하나가 일기 쓰기였다.

19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 톨스토이는 죽을 때까지 60여 년 동안 계속 일기를 썼다.

톨스토이의 일기는 그에게서 끝나지 않고 그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부인과 9명이나 되는 톨스토이의 자녀, 심지어 사위까지 일기 쓰기를 본받았다.

대부분 이들은 톨스토이 사후에 회고록을 펴냈는데 톨스토이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퇴계나 다산, 케네디, 톨스토이 등

동서고금 명문가를 일군 이들의 자녀에 대한 가르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세심하고 열성적이었다.

요즘 아버지들은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자녀교육에 나 몰라라 하는 동안

가정에서는 점점 입지가 좁아져가고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당장 이번 주말에 도시락을 준비해 아이의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나들이를 가보자.
- 최효찬, 객원기자, 자녀경영연구소장,
romai@naver.com

- 2008 06/10, 경향, 뉴스메이커 778호

 

 

 

 

 

 

 

 

 

케네디 가문 ‘저주’는 끝나지 않았다

 

집안의 좌장 역할하던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 뇌종양으로 또 ‘죽음의 그림자'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생전 모습.

미국에서 케네디 가문은 단순한 가문(clan)이 아니라 ‘왕조’(dynasty)다.

왕정이나 봉건제의 경험이 없는 ‘젊은 나라’ 미국에서 ‘케네디’라는 이름은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갖고 있다.

케네디 집안 사람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그래서 늘 세인의 관심을 끈다. 선망에서든, 질투에서든, 동정에서든….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롤라인 등 일가 대부분이 버락 오바마 지지를 선언하면서 경선에 큰 영향을 미친 것만 봐도 ‘케네디’가 함축하고 있는 힘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케네디 가문의 ‘좌장’이라고 할 만한 에드워드 케네디 민주당 상원의원(76)이 최근 악성 뇌종양 진단을 받으면서 ‘케네디 가의 비극’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5월 17일 갑작스러운 심장 발작으로 보스턴의 한 병원에 입원한 그는 정밀 검사 결과 악성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특히 언어와 감성을 담당하는 뇌 부분에서 종양이 발견돼 치료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케네디 상원의원은 응급 치료를 받고 나흘 만에 퇴원했지만,

그가 치명적인 질환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한 시대의 ‘종언’을 예고하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형제 3명이나 사고 · 암살로 숨져

 

케네디 집안의 역사는 19세기 중반 아일랜드인 패트릭 케네디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보스턴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패트릭 케네디는 존 F 케네디(JFK) 형제들의 증조부다.

 

패트릭은 그러나 30대에 죽고, 그 아들인 P. J. 케네디가 집안을 일으키는 주역이 된다.

술장사로 돈을 벌어 자리를 잡은 P. J. 는

아들 조지프(JFK 형제들의 아버지)를 하버드대에 보내 신분 상승의 기반을 마련한다.

조지프는 보스턴 시장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와 결혼하고

아일랜드계 이민자 중 최초로 은행장에 오르는 등 눈부신 성공 신화를 쌓아간다.

또 엄청난 부를 바탕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후원자가 되고 영국 주재 대사까지 지낸다.

조지프는 그러나 자신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았다. 자신은 대사를 지내는 데 그쳤지만

네 아들 중 한 명은 반드시 대통령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그가 가장 기대를 건 아들은 총명하고 의젓한 맏이 조지프 2세였다.

하지만 장남은 제2차 세계대전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1944년 전사하고 말았다.

조지프는 낙심했으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차남 JFK가 1960년 가톨릭 신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낸다.

그러나 장남의 전사로 막을 올린 케네디 家의 비극은 2막, 3막으로 계속 이어진다.

1948년 JFK의 바로 아래 여동생 캐슬린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지고,

1963년에는 JFK가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총탄에 쓰러진다.

5년 후, 형의 뒤를 이어 백악관 입성을 노리던 셋째 로버트마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도중 암살되자 사람들은 ‘케네디 가의 저주’를 입에 올리게 된다.

 

최근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자신의 완주 이유로

“로버트 케네디가 6월 캘리포니아에서 암살당했다”고 말했다가

오바마의 암살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논란에 휩싸인 것도 이런 케네디 형제의 비극과 관련돼 있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 순) 존 F 케네디 2세와 부인 캐럴린 베셋의 생전 모습.

케네디 형제들이 1948년 함께 포즈를 취했다. 왼쪽부터 존, 로버트, 에드워드.

존 F 케네디가 1960년 11월 대통령에 당선한 다음 날 촬영한 가족 사진.


비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형들에 이어 정치에 투신한 넷째 에드워드는 1969년 매사추세츠 주 채퍼퀴딕 섬에서

여비서와 자동차를 타고 가다 강물 속으로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다.

당시 에드워드는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여비서가 숨지면서 비난에 휩싸였다.

이른바 ‘채퍼퀴딕 스캔들’이다.

11년이 지난 1980년, 에드워드가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을 때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는 이 스캔들로 결국 대통령의 꿈을 접었다.

JFK 2세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케네디 家의 불행은 JFK 세대에서 마감하지 않았다.

아래 세대 역시 사고로 숨지거나 중병과 싸워야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JFK의 아들인 JFK 2세다.

그는 집안의 후광에다 잘 생긴 외모를 겸비해 대중의 선망을 받았다.

피플지가 ‘현존하는 가장 섹시한 남성’으로 선정하는가 하면,

유명 여성 연예인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등 화려한 삶을 누렸다.

패션업체 캘빈 클라인에서 홍보 업무를 하던 금발 미인 캐럴린 베셋과 결혼하면서

‘완벽한 커플’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치 입문을 마다한 것은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로버트)의 불행한 말로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여, JFK 2세는 암살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또 다른 곳에서 드리웠다.

1999년 7월 직접 경비행기를 몰고 매사추세츠 주의 마서스 비녀드 섬으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해 숨진 것이다. 아내 캐럴린, 처형 로렌 베셋과 함께였다.

36년 전 JFK의 장례식 날 영구차가 지나갈 때 거수경례하던 3살짜리 꼬마를 기억하는 미국인들은

큰 슬픔에 잠겼다.

당시 워싱턴 포스트에는

“만약 셰익스피어가 살아 있었다면 케네디 家의 불행을 주제로 비극을 썼을 것”

이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앞서 JFK 2세의 사촌인 마이클(로버트 케네디의 아들)은

1998년 콜로라도 주에서 스키를 타다가 나무에 부딪혀 숨졌다.

 

또 에드워드 케네디의 자녀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암과 전쟁을 벌였다.

아들 에드워드 케네디 2세는 12살 때던 1973년 골육종에 걸려 한쪽 다리를 잃었다.

딸 카라는 42살 때던 2002년 폐암 진단을 받았다.

완치 판정을 받기는 했지만 지금도 암이 재발할까 우려해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있다.

막내 패트릭은 20살 때인 1988년 양성 종양에 걸렸다.

다행히 암은 아니었지만, 한 달 이상 입원 치료를 받았다.

에드워드의 전처인 조안 역시 2005년 유방암으로 치료를 받았다.

에드워드는 이처럼 비운에 시달려온 케네디 가문에서 ‘지킴이’ 노릇을 해왔기에,

그의 악성 뇌종양 판정은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케네디 가문과 오랫동안 친교를 맺어온 도리스 킴스 굿윈은

미국 일간 보스턴 글로브와 인터뷰에서

“에드워드는 집안의 정치적 구심점이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를 잃은) 조카들에게 아버지 역할도 대신해왔다”고 전했다.

케네디 家의 비극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또 그들은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

케네디 가문에 대해 많은 저작을 해온 토머스 왈렌 보스턴대 교수는

“비극이 일어날 때마다 케네디 집안 사람들은 서로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구성원 간의 연대와 결속으로 지뢰밭 같은 삶을 버텨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얘기다.
- 2008 06/10, 경향 뉴스메이커 778호, 국제부 김민아 기자
makim@kyunghyang.com

 

 

 

 

 

 

- Gheorghe Zamfir(팬 플룻 연주 모음) / The Lonely Shepherd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