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 학봉리 가마, 1927년 · 1992년 발굴품 최초 공개
ㅇ 전 시 명 : 테마전 “계룡산 분청사기”
Buncheong Ware from Mt. Gyeryong Kilns
ㅇ 전시 기간 : 2007. 9. 18 ~ 2007. 2. 17
ㅇ 전시 유물 : 학봉리 가마의 1927 · 1992년 발굴품 등 총 60건 304점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홍남)은 상설전시 미술관2 분청사기실에서
9월 18일(화)부터 2008년 2월 17일(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는
<1927년과 1992년 학봉리 가마 발굴품> 등 총 60건 304점이 공개된다.
“계룡산 분청사기”란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鶴峰里) 계룡산 기슭의 가마터에서 만든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말한다.
이번 전시는 조선총독부가 1927년에 조사했던 학봉리 가마 발굴품과
1992년에 국립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이 재조사한 발굴품을 최초로 특별 공개하여,
그간 분청사기의 생산지로만 알려진 계룡산 학봉리 가마의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숨겨진 면모를
종합적으로 조명하고자 하였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봉리 가마는 대체로 15세기 초에 시작되어 16세기 전반경까지
자기 생산이 활발했던 곳이다. 각종 기법의 분청사기, 회청사기, 백자, 흑유 등을 생산하였으며
‘예빈(禮賓)’ · ‘내자시(內資寺)’ · ‘내섬시(內贍寺)’ 등의 각종 명문자료가 출토된 바 있다.
학봉리 가마에서 만든 도자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철화 분청사기이다.
계룡산 철화 분청사기는 장인의 예술혼이 깃든 자유분방한 무늬와 흑백의 조화를 이루는
선명한 색채, 거칠고 빠른 붓놀림이 특징이다.
이번 테마전 《계룡산 분청사기》는 계룡산 학봉리 가마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자리이다.
학봉리 가마의 생산품을 1호부터 7호까지 가마 별로 공개할 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철화분청사기 명품과 발굴품을 비교 전시하여,
계룡산 학봉리 가마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 1927년 발굴과 1992년 재발굴의 주요 장면 및 발굴 성과를 담은 사진을 함께 전시하여,
그간의 조사 성과까지 일반에 공개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용산시대를 맞아 작년부터 미술관 테마전을 새롭게 기획하여
일반 관람객들과 관련 전문가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이번 테마전도 작년에 이어 10월중 도록을 발간하여 일반인에게 판매할 예정이다.
학봉리 6호 가마 출토품
1927년 발굴
학봉리 6호 가마에서는 ‘내자시(內資寺)’의 관청 이름이 쓰여진 인화귀얄 무늬 접시를 비롯하여
상감, 인화, 귀얄, 철화 분청사기와 함께 백자도 발견되어
계룡산 학봉리 가마의 다양한 제작 양상을 말해준다.
분청사기 넝쿨무늬 항아리
粉靑沙器 鐵畵 唐草文 壺
조선 15세기 후반-16세기
높이 15.8cm
넝쿨 무늬를 그린 힘찬 붓놀림이 끊어질 듯 유연하게 이어져 빠르게 흘려 쓴 초서(草書)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예술성 짙은 철화 분청사기는 충청남도 공주시 학봉리 계룡산 일대에 가마터가 집중되어 있다.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접시 조각
(粉靑沙器 鐵畵 魚文 楪匙 片)
학봉리 5호 가마 출토
1927년 발굴
귀얄로 힘차게 백토 분장을 하고 그 위에 두 마리의 물고기를 철사 안료로 그린 전접시 조각.
생동감 넘치는 두 마리 물고기는 철화 분청사기의 강렬하면서도 대담한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병
粉靑沙器 鐵畵 魚文 甁
조선 15세기 후반-16세기
높이 29.7cm
막 뛰어오를 듯한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활짝 펴진 모습으로 과장되게 표현되었고
비늘은 점을 찍어 나타냈다.
연꽃과 함께 물고기가 그려진 그림은 '연년유여(延年有餘)'
즉, 해마다 여유 있고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내자시」가 쓰여진 분청사기 접시
「內資寺」銘 粉靑沙器 印花文楪匙
학봉리 6호 가마 출토
1927년 발굴
접시의 바깥면에 ‘내자시’라는 글자가 철사안료로 쓰여있다.
내자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쌀, 국수, 간장, 직조 등을 담당하던 관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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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물고기무늬 병(鐵畵 魚文 甁)
분청사기 철화 어문병 /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높이 29.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의 도자기 하면, 눈처럼 하얀 백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매끄러운 백자와는 달리 투박한 백토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흙냄새를 물씬 풍긴다. 문양에는 해학과 추상의 멋을 담고 있다. 공주 학봉리 계룡산 기슭에서 생산된 분청사기 역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으로 유명하다. 특히 물고기 문양이 그렇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공주목 토산조에는 공주의 토산물로 누치(訥魚)를 소개하고 있다. 누치는 생김새가 잉어와 비슷하여, 입가에 한 쌍의 수염이 있고 몸에는 옆줄 위에 6-9개의 점이 있다고 한다. 이 점들을 표현한 것인지 이 분청사기 물고기의 몸에도 점을 툭툭 찍었다. 또 입가에 수염은 화려한 당초문으로 장식했다. 지느러미는 마치 날개처럼 커서 몸통과 비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몇 개의 간결한 선으로 물고기의 생명력을 최대한 살렸다. 이 물고기는 계룡산 학봉리 가마 장인이 공주의 토산물인 누치를 도자기에 그린 것이리라.
이런 물고기가 그려진 분청사기 조각들이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수없이 많이 나왔는데 그 조각들과 비교해 보면 이 작품은 호적이 없더라도 계룡산 가마에서 제작된 것임을 곧 알 수 있다.
물고기는 도자기 표면이 마치 물속인 양 무척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이다. 우리가 도자기의 물고기를 감상하는 여유로움은 이 분청사기를 애장하는 동안 계속 누릴 수 있는 행운이다. 계룡산 장인 덕분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분청사기실 김영원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87회, 2008년 5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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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청사기에 관사(官司) 이름이 적힌 이유
분청사기에 등장하는 명문(銘文)은 사기장(沙器匠)의 이름, 공물이 납품될 관사, 만든 지방, 제작 시기, 사용처와 등급 표시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중앙에 바치는 공물용 그릇에 관사 이름을 적어 넣게 된 계기는 태종 17년(1417) 호조에서 국가에 필요한 공물을 수납, 관리하는 방안을 새롭게 마련한데서 비롯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공납용 사목기(砂木器)는 장흥고에서 도맡아 관리하였으나, 여러가지 폐단과 어려움이 많았다. 그 개선책으로 '각 해당 관사에서 필요한 물건을 직접 관리토록' 하여 방만했던 공물 관리의 책임 소재를 확실하게 하고, 향후 중앙에 납품될 공물에는 '각기 사호(司號)를 새겨서 제품을 만들어' 관물(官物)이 몰래 사장(私藏)되는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규제는 도자기 제작에 실제로 적용되었다. 전국의 가마터에서 출토되는 분청사기의 관사명은 중앙공납용 자기로 특별히 제작된 도자기임을 입증하는 일종의 심볼 마크였던 셈이다.
15세기 전반의 관사명 분청사기는 깔끔하고 정선된 인화분청사기에 상감 또는 인화기법으로 관사명이 표기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까지 조사된 분청사기의 관사명은 장흥고(長興庫), 인수부(仁壽府), 덕녕부(德寧府), 내섬시(內贍寺),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등이다. 충청도 지역에서는 내자시와 예빈시, 경상도 지역에서는 장흥고와 인수부, 전라도 지역에서는 내섬시, 덕녕부 등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
1467-1468년경 경기도 광주에서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가 설치되면서 국가가 관어용(官御用) 그릇을 분원 관요에서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는 체제로 변화하게 되자, 지방 가마에서 공물 수요가 점차 감소하게 되었으며 분청사기도 함께 쇠퇴하게 되었고 주 생산품이 백자로 바뀌었다.
15세기 후반을 기점으로 관사명 분청사기가 소멸된 것은 조선 전기 요업 체제의 변화에 따른 당연한 결과이다.
2. 학봉리 가마의 관사명 철화 분청사기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는 내자시(內資寺), 예빈시(禮賓寺), 내섬시(內贍寺)의 관사명 철화분청사기가 확인된 바 있다.
그런데 학봉리 출토 관사명 분청사기는 앞서 언급한 15세기 전반의 관사명 분청사기와 눈에 띠게 다른 점이 주목된다. 우선, 관사명을 그릇 바깥면에 철사안료로 표기하였다는 점, 그릇 전면에 인화문을 압인하였으나, 귀얄로 거칠고 두텁게 백토분장되어 무늬가 정갈하지 않다는 점,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어 번조하여 그릇의 질이 조잡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15세기 3/4분기와 4/4분기로 추정되는 <광주 충효동 가마> W2 지역의 6층위와 3층위 출토품과 부합되고 있어 학봉리의 관사명 철화분청사기는 1467-1468년 관요 설치 후에 제작된 것들이 분명하다.
학봉리 출토 관사명 철화분청사기의 사용처를 두고서 중앙 공납용 또는 지방 관아용으로 해석하는 여러 견해들이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2004년 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경복궁 소주방지(燒廚房址)에서 결정적인 자료가 출토되었다. 소주방은 조선시대 대궐 안의 음식을 만들던 곳으로, 연향, 접빈연회(接賓宴會) 등 왕실과 조정의 크고 작은 잔치에 필요한 음식 마련을 담당하였다. 이곳에서 예빈(禮賓), 내섬(內贍), 울산인수부(蔚山仁壽府), 내자(內資)의 관사명 분청사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內資'명편과 '禮賓'명편은 15세기 후반에 속하는 것으로 '禮賓'은 백토 분장면에 음각되었고, '內資'명편은 학봉리 관사명 철화분청사기의 특징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다.
학봉리 출토 관사명 철화분청사기에 등장하는 예빈시, 내섬시, 내자시의 업무 중에는 내연, 외연, 접빈 연회 등에 쓰이는 음식을 조달하는 비중이 컸으며, 상대적으로 다른 중앙 관사에 비하여 그릇의 수요가 많았던 곳이다. 따라서 관요가 설치되어도 관요의 생산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예빈시, 내섬시, 내자시는 그릇 수요량의 부족한 부분은 여전히 공물을 통하여 조달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요컨대, 관요 설치 이후에도 학봉리 가마에서 어느 기간까지는 중앙에 그릇을 공급한 것이 확실하다. 예빈시, 내섬시, 내자시와 같이 그릇의 수요가 많은 관사명이 출토된다는 점, 한양까지 운반이 용이한 지역이라는 점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건데, 학봉리 가마의 관사명 분청사기는 중앙 관사용으로 여겨진다. 다만 경주지역에서 지방 관사용으로 중앙 관사명 분청사기가 공급된 사례가 확인되고 있어, 학봉리의 관사명 철화분청사기가 지방 관사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분청사기실, 이애령 학예관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58회(2007년 10.17)
내자시(內資寺)銘 :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는 여러 식품, 직조(織造) 및 내연(內宴) 등을 담당하던 관사이다. '內資寺' '內資' '內 '(내섬일 가능성도 있음)라고 표기되고 있다.
예빈시(禮賓寺) 銘 : 고려, 조선시대 사신, 빈객의 연향 등을 관장한 관사.
내섬시(內贍寺) 銘 : 조선시대 여러 궁전에 대한 공상(供上), 왜인, 여진인에게 주는 음식물과 직포 등의 일을 맡은 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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