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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룸비니동산에 '평화기원비' 세우다

Gijuzzang Dream 2008. 6. 5. 22:01

 

 

 

 

 

 룸비니 동산에 '평화기원비' 세우다

 

네팔 총리와 정 · 관계 고위관료 “감사”… 한국불교 위상 드높여

열린 ‘불사리 이운 평화기원대법회 기념비'

제막식을 마친 뒤 선묵 스님과 콜리랄라 총리(왼쪽)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네팔 룸비니에서)


칠흑 같은 밤. 버스에서 내리자 이내 후덥지근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라마 승려들이 멀리 동방의 끝,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맞는다.

 

카바이트 불을 밝히고 묵주나 탱화(이곳에서는 ‘탕카’라 부른다), 붓다 조각상 등을 팔던

입구의 주민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일행을 쳐다본다.

도선사 주지스님인 선묵 혜자 스님이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앞섰다.

한국에서 온 100여 명의 ‘108산사 순례단’이 합장을 하고 길게 뒤를 잇는다.

인도 국경에서 4㎞ 떨어진 네팔 룸비니(Lumbini).
2552년 전 붓다는 이곳 룸비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곳에서 태어날 예정은 아니었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친정에 가던 중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기를 출산했다.

출산 후 마야 부인은 이곳 연못에서 목욕을 했는데, 목욕 직후 커다란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종이컵에 쌓인 촛불이 한국 순례단을 인도했다.

마야데비 연못을 둘러싸고 수백 수천 개의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연못 앞, 커다란 보리수 나무 앞에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은 좌정했다.

먹구름 사이로 휘영청 밝은 달이 자태를 드러냈다.

2552년 전에 해산을 하던 마야 부인도 저 달을 봤을까.

한국과 네팔의 초파일은 다르다.

네팔은 매년 음력 4월 15일을 기준으로 석가탄신일을 잡는데,

보름달이 뜬 날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올해는 음력 16일인 5월 20일이 석가탄신일이었다.

마야데비 사원. 붓다가 탄생한 자리에 들어선 사원이다.

탄생 표시석을 가운데 두고, 유적 전체를 빨간 벽돌로 에워싼 건물이다.

신발을 벗고 사원에 들어간 108 순례단 일행은 탄생표지석 바로 앞에서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2분 30여 초 동안 명상에 잠겼다. 정적이 흘렀다.

붓다의 진신사리를 안고 정좌한 선묵 스님은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붓다 진신사리 2552년 만의 귀향

 

붓다를 낳은 뒤 어머니 마야부인이 목욕했다는

마야데비 연못 위에 솟은 보름달.

붓다 진신사리의 귀향(歸鄕)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2월, 역시 선묵 혜자스님을 비롯한 불자 300여 명이 붓다 진신사리와 함께 네팔을 방문했다.

 

당시 네팔 정부는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아니, 환대 정도가 아니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거리에는 태극기와 네팔 국기를 들고 환영 나온 여학생들이 도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기를 빌린 300여 명의 단체 방문은 네팔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 붓다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지만,

그의 탄생지이자 고향이 있는 네팔 방문은 지난 2월 도선사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3개월. 지난 방문과 한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제가 선포되었다.

총선을 통해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당이 네팔의 다수당이 되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의회 구성을 두고 네팔 정가는 한창 시끄러웠다.

네팔 현지 방송들은 민주주의의 실현 방도를 두고 옥신각신 격론을 내놓는 시민 인터뷰를

뉴스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총선이 끝난 지 2개월이 지났지만,

거리에는 여전히 낫과 망치가 교차된 마오이스트 당의 로고가

정치 구호와 함께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져 있다.

수도 카트만두에 비해,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이 낫과 망치 로고는 흔하게 눈에 띄었다.

우려와 달리, 네팔 사람들의 호의는 여전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네팔민주당 최고위원 수크라 라지 사르마씨와 경찰 부총장 아말 사하씨,

국제상공회의소 의장 라제쉬 카지씨 등은 합장을 하며

“네팔은 15년 만에 선거를 치렀고, 한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네팔이 본받아야 할 열린 교과서다”

라며 환대했다.

 

‘사적 소유의 철폐’를 핵심 공약으로 내건 마오이스트들은

네팔 국민, 특히 서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는 듯했다.

공항에서 짐을 나르던 한 노동자는 “마오이스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마오이스트들은 도시보다 농촌, 북부 산악지대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반면 카트만두 등 도시에 거주하는 상공인 · 중산층은 마오이스트가

여전히 테러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도선사 108순례단 일행이 도착하기 며칠 전,
한 기업가가 마오이스트 당원들에게 뭇매를 맞고,

적절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석가탄신일 다음 날인 21일,

네팔민주당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역시 공산당 계열이지만, 마오이스트들과 노선은 다르다)을

비롯한 일단의 투쟁위원회가 일몰 전까지 오토바이 · 차량통행을 금하는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기업가를 살해한 마오이스트들에게 항의하기 위한 스트라이크였다.

이튿날 신문엔 1면 머리기사로 스트라이크 소식과 함께

“내 아들은 당신들에게 표를 찍었다”는 죽은 상공인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모습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네팔에서 15년째 여행사를 하는 양준호씨는

“선거 후 기름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항의하는 과정에서 버스 몇 대가 불타기도 했지만,

네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한다.

 

비록 만년설이 덮힌 히말라야 산 8개 봉우리가 네팔에 있지만,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네팔은 무덥다.

1년에 삼모작을 짓는데, 그해의 작황 상황에 따라 식탁에 오르는 주식은 다르다.

대부분 힌두교도인 네팔 국민들은 그것이 다 ‘신의 뜻대로’라고 생각한다.

이게 좋은 건만 아니다. 양씨는 덧붙인다.

“혹시 물건을 잃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물건을 발견해도 남의 것을 손댄다는 의식이

없고, ‘아, 내가 열심히 일하니 하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나’라고 생각하거든요.”

2008년 5월 20일 부처님 오신 날. 이날은 한국이나 네팔 양쪽 모두 불교사에 뜻 깊은 날이다.

룸비니 동산 초입에 ‘불(佛)사리 이운 평화기원 대법회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비 주위로 ‘한·네팔 우정의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첫 삽을 뜨는 날이기 때문이다(박스 참조).

 

오전 11시 30분. 이곳에서 열리는 평화비 제막식과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리자 프라사드 콜리랄라 총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룸비니까지 날아왔다.

쉬운 걸음은 아니었다. 애당초 11시에 총리가 탄 헬기가 룸비니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그의 병색이 짙어 시간은 연기됐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다시 인근에서 링거를 맞는 투혼(?)을

발휘한 끝에 행사장에 나타났다.

 

이날 행사엔 스바스넴방 국회의장, 외무부 장관 등 정 · 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잠깐 얼굴만 비치고 돌아갈 것”이라는 현지 진행요원의 양해와 달리

콜리랄라 총리는 오랜 시간 머무르며 평화의 비 제막식을 선묵 혜자 스님과 함께 진행하고,

이날 참석자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랜만에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수상에 대한 네팔 신문, 방송 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룸비니 성역화 초입 한·네팔 우정공원 들어서


사실 룸비니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7년)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 성역화 개발이 진척되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는 마야데비 사원을 중심으로 연못이 조성되고, 차량은 진입하지 못한다.

방문객들은 도보나 배를 타야만 탄생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모든 방문객은 조성될 성지 초입에 ‘평화의 비’와

한국 · 네팔 우정의 공원을 거쳐 들어가야 한다. 한국 불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다.

선묵 혜자 스님은 “이 모든 게 부처님이 하신 큰 일”이라며, 그 공덕을 돌린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룸비니에서 국제공항이 있는 수도 카트만두까지는 다시 9시간이 걸린다.

깊은 계곡, 천길 낭떠러지 옆에 바싹 붙어 있는 2차선 도로다.

고된 여행길의 막바지, 곯아떨어지는 게 수순이리라.

하지만 귀로의 버스에선 넉넉한 이야기 꽃이 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쉽게 오기 힘들 것 같아’

하던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잠시 맡기고, 남편과 함께 왔다는 전태옥(53·서울 우이동)씨는

“안 왔으면 후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냐는 질문에 전씨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 탄생지를 봤을 때 너무 벅차

희열을 느꼈다”면서 “부처님 성지에서 가족 건강과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고 덧붙였다.

모두 하나 가득 ‘마음의 선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부처님 덕분에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진신사리 모시고 룸비니 방문한 ‘108산사 순례단’ 선묵스님

“기념비를 세우기까지 사실 완전히 '부처님 빽'이었어요.

불보살님의 가피(加被 : 불교용어로 사전적인 의미는 부처님의 옷을 입었다는 뜻으로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준다는 말)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드라마였습니다.

제가 무슨 힘이 있나요. 108산사를 찾아 신행 단체가 다니겠다는 대원력을 세우니 부처님이 그런 인연을 내려주신 거지.”

 

소회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선묵 스님은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을 강조했다.

 

지난 2월, 선묵스님은 붓다의 열반지인 인도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 진신사리를 붓다의 탄생지인 네팔 룸비니로 돌아왔다. 불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석가탄신일 다큐멘타리를 찍다 쿠시나가라와 인연을 맺었고, 인연이 또 인연을 낳았다.

 

2월 룸비니에서 연 ‘불(佛)사리 이운 평화기원 대법회’에 대한 감사 표시로

네팔 정부는 기념비와 평화공원 조성을 제안했다.

이 점은 선묵 스님 일행이 3개월여 만에 다시 네팔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20일 저녁 9시, 네팔 최대의 민영방송인 칸티푸르 방송은

한국의 석가탄신일에 방영한 다큐멘타리 ‘2552년 만의 귀향’을 네팔 현지어로 더빙해 방영했다.

그동안 ‘선묵 스님과 함께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순례단’은

불교계를 넘어 잔잔한 화제가 돼왔다. 5000여 명의 회원이 경향 각지의 사찰을 찾을 때마다

순례단은 새로운 보시(報施)문화를 만들어냈다.

사찰 인근엔 지역특산 농산물 직거래 장터가 열렸고,

군부대에는 4000여 개의 초코파이 상자가 쌓였다.

한 둘이 아닌 4000여 불자의 참여이기 때문에 파급 효과는 엄청났다

(뉴스메이커 744호 관련기사 참조).

 

한편, 지난 5월 30일부터 이틀간 진행된 108산사 21차 대구 동화사 순례기도회부터는

북한 어린이에게 우유 보내주는 캠페인을 전개, 지속적으로 돕기로 했다.

그리고 인연의 끈은 이제 네팔까지 이어졌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을?

 

“마음 속으로 부처님과 약속했어요. 108산사를 전부 돌려면 7~8년은 걸릴 거 아니에요?

그 후 108탑을 세워 부처님을 모시게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어요.

불보살님이 또 지혜를 주시겠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 2008 06/10  경향 뉴스메이커 778호, 룸비니·카트만두(네팔)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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