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비니 동산에 '평화기원비' 세우다 | |||||||
네팔 총리와 정 · 관계 고위관료 “감사”… 한국불교 위상 드높여
라마 승려들이 멀리 동방의 끝, 한국에서 온 순례단을 맞는다.
카바이트 불을 밝히고 묵주나 탱화(이곳에서는 ‘탕카’라 부른다), 붓다 조각상 등을 팔던 입구의 주민들이 호기심어린 눈으로 일행을 쳐다본다. 도선사 주지스님인 선묵 혜자 스님이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앞섰다. 한국에서 온 100여 명의 ‘108산사 순례단’이 합장을 하고 길게 뒤를 잇는다. 원래 이곳에서 태어날 예정은 아니었다. 어머니 마야 부인은 친정에 가던 중 이곳에서 산기를 느끼고, 아기를 출산했다. 출산 후 마야 부인은 이곳 연못에서 목욕을 했는데, 목욕 직후 커다란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종이컵에 쌓인 촛불이 한국 순례단을 인도했다. 마야데비 연못을 둘러싸고 수백 수천 개의 촛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연못 앞, 커다란 보리수 나무 앞에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은 좌정했다. 2552년 전에 해산을 하던 마야 부인도 저 달을 봤을까. 한국과 네팔의 초파일은 다르다. 네팔은 매년 음력 4월 15일을 기준으로 석가탄신일을 잡는데, 보름달이 뜬 날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올해는 음력 16일인 5월 20일이 석가탄신일이었다. 탄생 표시석을 가운데 두고, 유적 전체를 빨간 벽돌로 에워싼 건물이다. 신발을 벗고 사원에 들어간 108 순례단 일행은 탄생표지석 바로 앞에서 붓다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2분 30여 초 동안 명상에 잠겼다. 정적이 흘렀다. 붓다의 진신사리를 안고 정좌한 선묵 스님은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붓다 진신사리의 귀향(歸鄕)은 이번이 두 번째다.
지난 2월, 역시 선묵 혜자스님을 비롯한 불자 300여 명이 붓다 진신사리와 함께 네팔을 방문했다.
당시 네팔 정부는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아니, 환대 정도가 아니었다.
네팔 수도 카트만두 거리에는 태극기와 네팔 국기를 들고 환영 나온 여학생들이 도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세기를 빌린 300여 명의 단체 방문은 네팔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 붓다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지만, 그의 탄생지이자 고향이 있는 네팔 방문은 지난 2월 도선사 선묵 혜자 스님 일행이 처음이었다. 총선을 통해 마오이스트(마오쩌둥주의자)당이 네팔의 다수당이 되었다.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의회 구성을 두고 네팔 정가는 한창 시끄러웠다. 네팔 현지 방송들은 민주주의의 실현 방도를 두고 옥신각신 격론을 내놓는 시민 인터뷰를 뉴스 머리기사로 다루고 있었다. 거리에는 여전히 낫과 망치가 교차된 마오이스트 당의 로고가 정치 구호와 함께 붉은색 페인트로 그려져 있다. 수도 카트만두에 비해,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이 낫과 망치 로고는 흔하게 눈에 띄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네팔민주당 최고위원 수크라 라지 사르마씨와 경찰 부총장 아말 사하씨, 국제상공회의소 의장 라제쉬 카지씨 등은 합장을 하며 “네팔은 15년 만에 선거를 치렀고, 한국의 민주주의 시스템은 네팔이 본받아야 할 열린 교과서다” 라며 환대했다.
‘사적 소유의 철폐’를 핵심 공약으로 내건 마오이스트들은 네팔 국민, 특히 서민들에게 상당한 지지를 받는 듯했다. 공항에서 짐을 나르던 한 노동자는 “마오이스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마오이스트들은 도시보다 농촌, 북부 산악지대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반면 카트만두 등 도시에 거주하는 상공인 · 중산층은 마오이스트가 여전히 테러리즘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적절하게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석가탄신일 다음 날인 21일, 네팔민주당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역시 공산당 계열이지만, 마오이스트들과 노선은 다르다)을 비롯한 일단의 투쟁위원회가 일몰 전까지 오토바이 · 차량통행을 금하는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기업가를 살해한 마오이스트들에게 항의하기 위한 스트라이크였다. 이튿날 신문엔 1면 머리기사로 스트라이크 소식과 함께 “내 아들은 당신들에게 표를 찍었다”는 죽은 상공인의 어머니가 울부짖는 모습이 스케치되어 있었다.
네팔에서 15년째 여행사를 하는 양준호씨는 “선거 후 기름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항의하는 과정에서 버스 몇 대가 불타기도 했지만, 네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없다”고 설명한다.
비록 만년설이 덮힌 히말라야 산 8개 봉우리가 네팔에 있지만, 적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네팔은 무덥다. 1년에 삼모작을 짓는데, 그해의 작황 상황에 따라 식탁에 오르는 주식은 다르다. 대부분 힌두교도인 네팔 국민들은 그것이 다 ‘신의 뜻대로’라고 생각한다. 이게 좋은 건만 아니다. 양씨는 덧붙인다. “혹시 물건을 잃어버리면 곤란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물건을 발견해도 남의 것을 손댄다는 의식이 없고, ‘아, 내가 열심히 일하니 하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나’라고 생각하거든요.” 룸비니 동산 초입에 ‘불(佛)사리 이운 평화기원 대법회 기념비’를 세우고, 기념비 주위로 ‘한·네팔 우정의 평화공원’을 조성하는 첫 삽을 뜨는 날이기 때문이다(박스 참조).
오전 11시 30분. 이곳에서 열리는 평화비 제막식과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기리자 프라사드 콜리랄라 총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카트만두에서 룸비니까지 날아왔다. 쉬운 걸음은 아니었다. 애당초 11시에 총리가 탄 헬기가 룸비니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그의 병색이 짙어 시간은 연기됐다. 공항에 도착한 그는 다시 인근에서 링거를 맞는 투혼(?)을 발휘한 끝에 행사장에 나타났다.
이날 행사엔 스바스넴방 국회의장, 외무부 장관 등 정 · 관계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잠깐 얼굴만 비치고 돌아갈 것”이라는 현지 진행요원의 양해와 달리 콜리랄라 총리는 오랜 시간 머무르며 평화의 비 제막식을 선묵 혜자 스님과 함께 진행하고, 이날 참석자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랜만에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수상에 대한 네팔 신문, 방송 기자들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아직 성역화 개발이 진척되지 않은 상태다.
앞으로는 마야데비 사원을 중심으로 연못이 조성되고, 차량은 진입하지 못한다. 방문객들은 도보나 배를 타야만 탄생지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모든 방문객은 조성될 성지 초입에 ‘평화의 비’와 한국 · 네팔 우정의 공원을 거쳐 들어가야 한다. 한국 불교의 위상을 드높이는 일이다. 선묵 혜자 스님은 “이 모든 게 부처님이 하신 큰 일”이라며, 그 공덕을 돌린다. 깊은 계곡, 천길 낭떠러지 옆에 바싹 붙어 있는 2차선 도로다. 고된 여행길의 막바지, 곯아떨어지는 게 수순이리라. 하지만 귀로의 버스에선 넉넉한 이야기 꽃이 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쉽게 오기 힘들 것 같아’ 하던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잠시 맡기고, 남편과 함께 왔다는 전태옥(53·서울 우이동)씨는 “안 왔으면 후회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냐는 질문에 전씨는 “룸비니 동산에서 부처님 탄생지를 봤을 때 너무 벅차 희열을 느꼈다”면서 “부처님 성지에서 가족 건강과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고 덧붙였다. 모두 하나 가득 ‘마음의 선물’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 2008 06/10 경향 뉴스메이커 778호, 룸비니·카트만두(네팔) /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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