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명문(銘文) 도자기

Gijuzzang Dream 2008. 5. 26. 22:01

 

 

 

 

 

 도자기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



중국의 경덕진 자기는 이미 16세기부터 유럽인들에게 고급자기로 인식되었다.

일본의 아리타 도자기 역시 17세기부터는 유럽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일본 취미 열풍(Japonism)”으로 이어지면서 일본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우수한 도자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지만, 그 실체는 세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거창하게 세계까지 나가지 않아도, 도자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도

고려청자, 분청사기, 조선백자 등과 같은 고유명사 정도가 맴돌 뿐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자체가 진정한 흥미나 감상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무관심에서 오는 낯설음의 단계를 벗어나야

한국 도자기의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도자기에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글이 도자문화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들은 흔히 옛 그림을 감상할 때

그림 자체의 화풍(畵風)뿐만 아니라 작가의 서명(書名)이나 관서(款書),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남긴 감상평인 제발(題跋) 등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옛 그림 뿐 아니라 근현대 작품에서도

작가의 서명이 작품의 가치와 진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도자기에도 이런 서명이나 관서에 해당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자기에 기록된 명문(銘文)은 굽바닥이나 굽주변에 남아 있어,

대부분 뒤집어 보지 않으면 쉽게 볼 수 없는 위치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명문은 새기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도자기를 만들 때부터 미리 명문을 새기는 것으로

음각(陰刻, 칼로 글씨를 새김)과 상감(象嵌, 칼로 글씨를 새기고 색이 다른 흙을 채움),

그리고 청화(靑畵) 안료로 글씨를 쓴 것 등이 있다.

 

두 번째는 도자기를 구워낸 후 명문을 새기는 것으로 점각(點刻, 정으로 점을 쪼아 새긴 글씨)이 있다.

 

첫 번째 방식의 경우 처음부터 수요처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고,

두 번째 방식은 제작된 후에 수요처가 결정된다는 차이가 있다.

 

 번째 방식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두 번째 방식은 19세기 중후반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도자기의 명문은 주로 사용될 수요처, 제작년도, 용도 등을 기록한 것이 많다.

명문이 기록된 도자기는 대부분 왕실이나 관청에서 사용된 것으로

공물(貢物)로 진상(進上)되거나, 국가에서 관리한 관요(官窯)에서 특별히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제작될 당시에 고급품에 속하는 물건이었고,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공물로 진상되는 과정에서 빼돌려지는 양이 매우 많았던 것 같다.

이런 손실을 막기 위해 사용될 수요처를 기록하였고,

일부는 제작된 지방의 이름과 수요처가 함께 보이기도 한다(도 1).

(도 1) <분청사기「언양 인수부」명 대접>, 조선 15세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수요된 관청이 운영되었던 기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도자기의 제작년도를 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런 명문은 고려초기에 제작된 청자에도 보이는데,

특이한 점은 도자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장인의 이름을 함께 새긴 것이다(도 2·2-1).

(도 2) <청자 「순화사년」명 항아리>, 고려 993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도 2-1) <청자 「순화사년」명 항아리> 명문


이 청자 항아리는 굽바닥에 음각으로 「淳化四年癸巳太廟第一室享器匠崔吉會造」라는 글이

새겨져 있어, 최길회라는 장인이 993년에 고려 태조의 묘에 제사지내기 위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솜씨를 가졌을 최길회라는 인물은

이 항아리 한 점으로 인해 천년이 넘은 현재까지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안바닥에 「福」자를 반듯하게 쓰고, 외면에 보상당초문을 돌려 그린 접시는

형태와 문양이 같아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보인다(도 3).

(도 3) <백자청화 보상당초문 접시>, 조선 1863년 이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그런데 이 접시의 뒷면 굽바닥에는

「齊壽」·「上室」·「雲峴」의 각기 다른 명문이 청화 안료로 쓰여 있다(도 3-1).

(도 3-1) <백자청화 보상당초문 접시> 명문


이 중 주목해 볼만한 것이 바로 「雲峴」이란 글씨이다.

운현은 운현궁(雲峴宮)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종이 즉위(1863년)하면서 생가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거처로 쓰였고,

대원군이 별세한 후(1898년)에도 계속해서 한동안 운현궁으로 불린 것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접시들은 운현궁이란 명칭이 생긴 1863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운현궁에서 사용하기 위해 관요에서 공을 들여 만든 것으로 보인다.


「福」자와 「壽」자로 장식된 화형대접은

한자가 아닌 한글로 제작년도, 도자기의 용도, 사용처, 제작량을 기록하고 있어 흥미롭다(도 4·4-1).

(도 4) <백자청화 수복자문 화형대접>, 조선 1897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도 4-1) <백자청화 수복자문 화형대접> 명문


굽바닥에 정으로 점을 쪼아 「뎡유가례시큰고간이뉴일?팔」이란 명문을 새겼는데,

1897년 정유년 가례(嘉禮) 때 대전(大殿) 곳간(庫間)에서 쓰기 위해 만든

동일한 열 개의 그릇 중 여덟 번째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그릇을 용도에 따라 구분할 때

점각으로 표시한 것은 19세기 중후반에 집중적으로 사용된 방식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도자기에 새겨진 명문은

제작자와 제작된 곳, 제작년도와 사용처 등 많은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래서 도자기의 역사를 연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굽바닥을 습관적으로 뒤집어 보게 된다.

도자기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  인천항국제여객터미널 문화재감정관실 최윤정 감정위원
- 문화재청, 2008-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