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건칠불상의 미소

Gijuzzang Dream 2008. 5. 26. 21:51

 

 

 

 

 어느 건칠불상의 미소  

 

 

몇 년전 동아대학교 박물관 유물 문화재 지정신청 조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물론 보조 조사자였지만 좋은 유물을 직접볼 수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움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유물 중에 유난히 관심을 주는 불상 한 구가 있었다.

불상은 세월을 머금은 듯 금빛은 퇴색되었지만

장신구들의 정교함이나 부드러운 조형감이 온 몸으로 배어 나왔다.

박물관 측에서 전하는 구입경위는 이러하였다.

어느 대학 모교수님이 1950년 6.25 사변 당시부터 집에 모시고 계시던 것을

개인 사정으로 인해 이 대학교 총장님께 인수하도록 부탁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불상에 대해 소재의 중요성이나 그 시대 불상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던 당시로서는

단지 예사롭지 않은 오래된 유물로만 생각하고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만약 대학 박물관에서 입수하지 않고 개인에게 주어졌더라면

정말 다시 보지 못할 ‘고아유물(孤兒遺物)’이 되어 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 듯 생겨났다.

최근 이 불상은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불상을 제작하는 재료는 동이나 철과 같은 금속류나 석제 혹은 목제를 사용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물론 건칠을 재료로 불상을 제작한다는 사실은

문헌이나 중국의 사례로 알려져 있었으나 불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탓인지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옻칠이나 베 혹은 종이를 여러 겹 둘러 조형된 불상을 건칠상(乾漆像)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건칠’의 용어는 시대별로 그 뜻을 달리하는데

『고려사(高麗史)』에는 약재의 한 이름으로 분류되었고(『高麗史』 卷9, 世家 9, 文宗33년 7月),

실제 예술작품의 용어로 등장하는 것은

1936년 동아일보 기사 ‘건칠화병습작(乾漆花甁習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근대이후에 사용된 어휘이다.

건칠의 용어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서도 달리 사용되었는데

고대 일본은 ‘즉(卽)’ 혹은 ‘색(塞)’의 용어로 건칠을 대신하였고, 명치시대 이후 건칠로 사용되었다.

또 칠로써 불상을 제작할 경우 중국과 우리나라는 ‘협저상(夾紵像)’ 혹은 ‘칠상(漆像)’으로 불렀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원풍연간(元豊年間 : 1078-1085) 송으로부터 고려 흥왕사(興王寺)에 협저상(夾紵像)을 내렸음을

기록하고 있고(『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卷17, 祠宇 王城內外諸寺),

 

조선시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효종 10년(1659) 淸州 安心寺 漆像이 땀을 흘렸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는 칠상(漆像)으로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承政院日記』 제155冊, 효종 10년 閏3월 癸亥).


동아대학교 건칠상은 내 힘으로도 옮길 수 있는 비교적 가벼운 무게였다.

일반적으로 등신대의 목상인 경우 혼자서 움직이기란 매우 버거운 일이다.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다른 불상과 다른 장신구의 정교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현재 조사된 우리나라의 건칠불상은 대부분 탈활건칠(脫活乾漆)기법으로 조성된 것이다.

이 기법은 대략의 불상을 만들고 그 위에 포를 두르는 것과 옻칠을 반복한 후 건조시켜

내부의 형상을 깨끗하게 제거하는데 이 때문에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다.

 

리나라 건칠 불상은 10-12겹의 베를 돌린 것이 많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건조된 탓인지 두께가 1cm 이하로 나타나고 겹수에 비해 얇다.

 

보계와 손은 따로 제작하여 끼우며,

안면은 호분으로 보안하고, 머리카락과 장신구, 군의의 띠매듭은 호분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다.

이러한 제작 과정이 다른 재료의 불상과 구별되는 섬세함과 부드러운 특징을 드러내게 한다.

 

건칠상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눈동자를 수정과 같은 다른 재료로 감입한다는 것이다.

눈동자의 감입은 중국 당대 건칠상이나 일본에서는 나라시대부터 출현하는데

특히 일본의 경우는 이를 ‘옥안(玉眼)’ 이라 하여

불상 안에 사리를 넣으면 영험이 깃든다는 생신사상(生身思想)의 유행에 따른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옥안 제작과정은 불상 내부 눈의 위치에

수정과 같은 다른 재료를 아교와 같은 접착제로 붙인다.

붙인 눈동자의 뒷면에 채색을 하고 그 뒤에 눈동자보다 크고 얇은 목판을 대고

竹釘 등으로 나무를 고정시켜 작업을 완료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본과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해남 강진에서 발견된 머리만 남은 소조 나한상은

눈동자에 홈이 파여 있었는데 여기에 아마도 다른 재료를 감입하고

눈두덩이 부위를 흙으로 발라 눈동자를 고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은 건칠상의 눈동자에도 비슷하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즉 눈동자 부위를 홈을 파고 다른 수정과 같은 물질을 감입하여

눈두덩이를 호분 등으로 발라 고정했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일본과 같이 눈동자 뒤에 목판을 대고 죽정으로 고정한 사례가

엑스레이 상으로 발견된 것이 없어 이러한 생각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우리나라 건칠상중 눈동자를 감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일본 大倉集古館 건칠보살좌상, 심향사 건칠여래좌상,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죽림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등이 있으며,

눈동자의 감입은 건칠상에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안동봉정사 목조보살좌상, 서산 개심사목조아미타불좌상 등 목불에서도 확인되어

이 방법이 건칠상과 목조상 그리고 소조불상까지 다양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시실에 혼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세지보살상과 똑같이 생긴

또 하나의 입상이 남원 실상사에 있다.

동아대학교 건칠상의 자세가 약간 엉거추춤하고 보관의 모양이 다르지만

얼굴이 주는 인상이며, 장식, 착의법 등은 같다.

이런 차이는 구입하고 일년뒤 보수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박물관 측에서는 전한다.

실상사의 짝 잃은 또 하나의 불상,

이 불상이 이렇게라도 존재하고 있음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그리고 이 불상은 이렇게 지난 시간을 우리에게 전한다.
- 문화재청 김해국제공항 문화재감정관실 이희정 감정위원
- 사진 : 마산 시립박물관 김광희

- 문화재청, 2008-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