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형 도자제기 - 상준(象尊)과 희준(犧尊) | ||||||
도자제기(陶磁祭器)는 자기(磁器)로 만들어진 제사(祭祀)에 사용되는 기명(器皿)을 뜻한다. 액체를 담는 용기인 준(尊)과 결합하여 형상화한 동물의 이름을 붙여서 코끼리 형태를 본 떠 만든 것은 상준(象尊), 소의 형태를 본 떠 만든 것은 희준(犧尊)이라 한다.
이 상형제기들은 궁중의 종묘나 향교를 비롯한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례에 사용되어지던 제기이다. 상준과 희준의 용도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액체를 담는 그릇이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이러한 제례와 관련된 제도정비를 통해 국가의 지도이념을 세우려하였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에는 제기의 형태와 무게, 크기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서(禮書)』,『사림광기(事林廣記)』『석전의(釋奠儀)』 등에 언급되고 있으며 여기에 대한 내용들이 『세종실록(世宗實錄)』 오례 ‘제기도설’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희준(犧尊)은 주(周)나라의 준을 본뜬 것이다. 소는 큰 희생(犧牲)이고, 기름이 향내가 나므로 봄의 형상에 적당하고, 코끼리는 남월(南越)에서 생산되니, 이것이 선왕께서 희준과 상준을 봄 제사와 여름 제사에 사용했던 까닭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림광기(事林廣記)』에는 “희준(犧尊)은 소[牛]를 준(尊)의 배 위에 장식한 것이니, 아가리의 원경(圓徑)이 1척 2촌이요, 밑바닥의 원경이 8촌이며, 위 아래의 구멍 지름[空徑]이 1척 5푼이요, 발[足]의 높이가 2촌이다.”라고 하였으며 (도면 1)
“상준(象尊)은 코끼리[象]를 준(尊)의 배 위에 장식한 것이니, 아가리의 원경(圓徑)이 1척 3촌이요, 밑바닥의 원경이 8촌이며, 위 아래의 구멍 지름[空徑]이 1척 5푼이요, 발[足]의 높이가 2촌이다.” 라고 하였다. (도면 2) 위의 내용을 정리하면,
제례시 희준에는 예제 즉 감주(甘酒)를 담아 봄, 여름의 초헌례에 올렸으며 상준(象尊)에는 앙제라 하여 후주(後酒) 즉 막걸리를 담아서 봄, 여름의 아헌례를 행할 때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석전의(釋奠儀)』에는 상준과 희준의 형상에 대한 설명과 구체적인 크기와 무게와 함께 동(銅)을 부어서 만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991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발굴조사 한 광주 충효동요지에서 확인된 분청사기선각희준편(粉靑沙器線刻犧尊片)이 있으며 1457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유물이라고 한다. 또 다른 희준과 상준의 모양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도해를 살펴보면, 모두 소와 코끼리의 형상을 준(尊)의 배에 그렸다고 하였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에서는 주자의 『석전의(釋奠儀)』에 따라 소와 코끼리의 형상을 만들어 등을 파서 준(尊)으로 만들고 이후 예서에는 모두 이를 따랐다고 한다. 희준과 상준의 형태는 처음에는 <도 1, 2>와 같은 발형(鉢形)의 그릇 외면에 음각으로 소나 코끼리의 형태가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었으나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1474년)가 간행되고 난 이후 상형(像形) 즉 동물의 형상을 표현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사진 1) 15세기 후반이후부터 희준과 상준의 제작은 분청사기로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백자로 만들어지게 된다. 백자로 만들어진 희준과 상준의 장식에 있어서 16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철화기법이 사용되었고 형태의 변화에 있어서 희준의 목이 길어지는 모습으로 변화하게 된다.(사진 2)
현재 도자기로 제작된 희준과 상준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으며 현재 남아있는 유물들은 대부분 18세기에 구리로 주조된 것이다. 도자기로 제작된 희준과 상준은 제기도설 내용에 맞추어 형태로 제작되었고 그 형태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상준과 희준의 형태는 16세기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그 이전 시기에는 소와 코끼리의 특징만을 차용해서 표현했다면 그 이후 시기인 18세기에는 대부분 구리로 주조되었고 동물의 묘사에 매우 충실한 희준과 상준의 몸통 위에 뚜껑이 있는 발형(鉢形)의 준(尊)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변화한다. (도면 3, 사진 3) 조선시대의 도자제기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계속되어진 금속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금속기 사용이 규제되자 제기들을 비롯한 특수기종들이 자기로 번안되어 제작되었다.
상준과 희준을 포함한 금속기를 번안하여 제작된 도자제기에 대한 기록으로 세종 5년에는 각 지방에서 사용하는 제기들이 법식에 맞지 않다고 하여 봉상시의 각종 제기를 각 도로 내려 보내어 견양(견본)으로 삼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이러한 내용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주로 관청관련 건물지인 객사나 향교, 제사유적 등에서 확인되며 가마터에서도 일부 파편들이 남아 있다. 그 파편들은 주로 희준과 상준의 다리부분이 남아 있어서 전체적인 형상에 대한 의문점들을 생기게 한다.
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제기에 대한 정보는 기록에 남아있는 것 이외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실제 조사현장에서는 제기로 추정되는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파편들이 출토되고 있어서 앞으로의 좀 더 많은 관심과 연구들이 진행되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 2008-05-19, 문화재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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