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우초(우표)를 아십니까

Gijuzzang Dream 2008. 5. 26. 22:46

 

 

 

 

 우초(우표)를 아십니까

 

'대조선국 우초'라 쓰인 문위우표와 표기가

우표로 바뀌어 있는 태극우표.

 

 

"우초 한 장 주세요”
요즘 우체국에 가서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우초? 그게 뭔데요”라는 반문이 돌아올 게 뻔하다.

‘우초’란 무슨 말인가.

이희승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초고(草稿)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고 돼 있다.

한자로는 '愚草'이며 다른 뜻은 없다.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도 없다.

그러니 “우초를 달라”고 하는 말 자체가 우리 언어생활에 없는 잘못된 표현이다.

그러나 시계를 124년 전으로 돌리면 “우초 한 장 주세요”라는 말은 자연스러운 대화문이다.

1884년 근대우편제도를 처음 도입하면서 지금의 우표(郵票)를 우초(郵)라 이름지었기 때문이다.

우표의 옛 이름이 우초인 것이다.

당시 우초라는 말을 사용한 기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만 해도

전면에 ‘COREAN POST’라는 영문과 함께 ‘대조선국 우초’라는 글자가 나온다.

최초의 우정관서인 우정총국 조직표에는 우초매하소(郵賣下部), 우초출납부라는 부서가 보인다.

 

우표에 관한 규정인 우정초표(郵征標)에는

‘우초는 우정초표 매하소에서만 매매한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우체국에 가서 “우표 한 장 주세요”라고 하면

오히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는 얘기다.

왜 우초라 명명했을까.

필자가 과문한 탓에 정확한 유래를 찾지 못했다.

초(鈔)라는 말에 ‘베끼다’라는 뜻과 ‘지폐’라는 뜻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유가증권의 의미를 담은 게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한자로 쓰인 우정총국의 현판.

1984년 체신부가 발간한 한국우정 100년사를 보면 우초라는 용어 자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나와 있다. 까닭은 이렇다.

 

이 땅의 우편제도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우정총국 초대총판인 개화파 홍영식이 고종에게 우편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한 것도 미국과 일본에 출장을 가 우편제도를 보고 자극받은 데서 비롯한다.

 

일본에서 들여오는 만큼 우편 용어도 일본 것을 그대로 가져올 법한 상황인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정 100년사에는

“당시 체신관계 용어 제정에 있어 우리 국권의 자주독립을 견지하여

적절한 용어를 창안했다”고 적혀 있다.

 

우표는 '우초'로, 우편(郵便)은 '우정(郵征)'으로,

서류는 '등기(謄記)'로, 특사배달(特使配達)은 '별분전(別分傳)'으로,

우편함은 '우정괘함(郵征掛函)'으로, 배달부는 '우체군'으로 바꾸어 표현했고,

그밖에 '집신(集信), 분전(分傳), 우낭(郵囊)' 등의 독창적 용어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국 우정사의 최고 전문가인 진기홍씨도 ‘구한국시대의 우표와 우정’이란 책에서

“우표를 우초, 우편국(郵便局)을 우정국(郵征局)이라고 하는 독창적 술어(述語)를 만들어

외국 모방을 피한 점은 훌륭한 태도”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러나 '우초'의 생명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지되었다가

10년 뒤인 1895년 우편사업이 재개될 때는 '우초' 대신 '우표'라는 말이 사용됐다.

 

그해 6월 중앙에 태극기, 4각에는 왕실의 문장인 이화(李花)가 그려진

4종의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이를 '태극우표(太極郵票)'라 칭한 것이다.

독창적 용어라고 평가받던 우초는 그렇게 역사 속의 용어가 되어버렸다.

우정총국에서 ‘우정’이란 한자가 지금 쓰이는 '郵政'이 아니라 '郵征' 이란 점도 특이하다.

일부 국어사전에까지 郵政總局이라고 잘못 표기할 정도로

'郵政'이라 써야 했을 것 같은 한자를 굳이 '郵征'으로 쓴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리 근대 우편에 관한 기록들이 갑신정변으로 불에 타 없어지는 바람에

역사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주변국을 살피면 중국은 '郵政局'이라 표시했고,

일본은 중앙기관을 '역체국(驛遞局)', 현업기관은 '우편국(郵便局)'이라 불렀다.

 

우리는 우정총국이 있기 전 우정사를 설치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한자를 '우정사(郵程司)'로 쓴 바 있다.

그러니까 郵征은 이도 저도 아닌 셈이다.

 

진기홍씨는 “정(征)의 자의(字義), 즉 ‘세 받는다’는 뜻을 생각할 때

요금을 받고 신서를 전달한다는 의미에서 '郵征'이라 쓴 것으로 보인다”며

“임금이 통치하던 시대 ‘다스린다’는 뜻의 '政'을 버리고 '征'을 택한 것은

그 자체로 획기적이며 민주주의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우정의 역사는 파고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흥미롭다.
-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 2008 05/27, 경향 뉴스메이커 776호

 

 

 

 

 

 

우표가 지우개로 지워진다?

 

 

"우표가 지우개로 지워지네요.”
얼마 전 이메일로 이런 깜짝 제보가 들어왔다.

연필로 그린 것도 아닌데 지우개로 지워진다니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우정이야기를 3년 가까이 쓰고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제보자가 지목한 우표는 해병대창설 60주년 기념우표다.

제보자는 이 우표에 새겨진 ‘60주년’이라는 글씨를 지운 뒤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고 “이는 중대한 결함 아니냐”고 지적했다. 

                                                                                                                        지우개로 지워지는 우표

                                                                                                    
우표를 만든 제작진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표는 우정사업본부 우표팀에서 기획 · 제작하고

한국조폐공사에서 인쇄하는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다.

먼저 이기석 우표디자인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에 그는 한마디로 “에러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곧이어 송관호 우표팀장이 부연 설명을 해왔다.

“인쇄기법에 대해 오해한 때문”이라고 했다.

우표에 결함이 발견되었다고 하면 제작실무자로서 동요해야 마땅할 텐데 그런 기색이 없다.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말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우표는 거의 지우개로 지우면 지워집니다.

우리나라 우표만 아니라 외국 우표도 마찬가지지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다른 우표도 지워진다니.

몇몇 우표전문가에게 확인차 전화를 돌렸더니 “그게 사실이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한 전문가는 즉석에서 소장하고 있는 우표를 꺼내 지워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국내 우표든 외국 우표든 지우개로 몇 번 문지르니 금세 색이 변했기 때문이다.

“아, 이럴 수가. 정말 지워지네.” 우표전문가들도 우표를 모으고 아낄줄만 알았지

지우개 실험을 해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하긴 어느 누가 우표를 지우개로 지울 생각을 했을까.

영국에서 우표를 처음 도입한 이후 1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우표가 지워진다는 점 때문에

문제된 적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우정사업본부에 따르면 우표가 지워지는 것은 인쇄기법상 불가피하다.

우표는 그라비아 인쇄와 평판(平版) 인쇄, 요판 인쇄 세 가지 방법으로 인쇄한다.

이중 어느 기법을 쓸지는 우표 도안에 따라 결정한다.

진한 색조를 나타낼 때는 그라비아 인쇄, 담백한 도안을 표현할 때는 평판 인쇄가 적합하다.

일반인이 육안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대략 우표의 70%는 그라비아 인쇄, 30%는 평판인쇄로 보면 된다.

요판 인쇄를 하면 지워지지 않는다. 화폐를 찍어낼 때 이 기법을 쓴다.

하지만 인쇄 단가가 평판 인쇄의 4~5배에 달해 우표를 제작하는 데는 좀처럼 활용할 수 없다.

요판 인쇄로 나오는 우표는 그래서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 안 된다.

지난해 요판 인쇄한 것으로는 세계문화유산우표가 유일하다.

제보자가 문제삼은 해병대 창설 60주년 기념우표는 평판 인쇄한 것이다.

일명 오프셋(offset)이라고도 불리는 평판 인쇄는

물과 잉크의 반발을 이용한 화학적 인쇄법이어서 그라비아 인쇄지보다 더 잘 지워진다.

이렇게 해서 우표가 지워진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지워지는 우표’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이론상 위 · 변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령 100원짜리 우표를 하얗게 지우고 그 위에 250원짜리 도안을 새겨넣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날 확률은 제로(0)에 가깝다.

기껏해야 몇백 원밖에 안 하는 우표를 위 · 변조하느라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호기심에서 너도나도 우표를 지워보면 어쩌나 하는 게 우정사업본부의 고민이다.

우표가 지워진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또한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우(杞憂)에 가깝다.

이미 사용한 우표를 지워본다면 누구에게도 해(害) 될 게 없으며,

아직 사용하지 않은 우표를 지운다면 지우는 사람만 손해다.

어느 경우든 우표의 공신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표도 화폐처럼 안 지워지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워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단지 지워지지 않는 우표를 만드느라 비싼 돈을 들일 필요까지는 없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필자도 사용필 우표를 찾아 지우개로 지워보는 것으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말았다.
-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 2009 05/19  위클리경향 825호 [우정이야기]

 

 

 

 

 

 

 

 

 국내 첫 우표의 아픈 인쇄 역사


사용되지 않은 문위우표 5종.


 

얼마 전 우표가 지우개로 지워진다는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인쇄기술이 낙후해 그런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는 독자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의심이다. 한국조폐공사의 우표 인쇄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 우표인쇄책임자회의가 매년 여는 국제우표품평회에서

우리나라는 2002년 3개 부문 최우수, 2004년 전 부문 최고상을 받았고

지난해 11월에는 특이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국제대회 수상이 인쇄 기술의 보증수표는 아니라고 해도 하나의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기술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만 ‘우표 인쇄’라 하면 사실 우리에겐 뼈아픈 역사가 있다.

우편제도 도입 초기 능력이 없어 인쇄를 남의 손에 맡겼다가 큰 고초를 겪은 일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文位)우표가 바로 그 사례다.

이 우표의 발행 주체는 ‘대조선국’(大朝鮮國)이다.

하지만 디자인에서 인쇄까지 제조 작업은 모두 일본에서, 일본인의 손으로 이뤄졌다.

문위우표의 명판(銘版), 즉 우표전지의 주위 여백에 표시된 인쇄처는

‘大日本國政府 大藏省 印刷局 製造‘(대일본국정부 대장성 제조)로 돼 있고,

원도(原圖)를 그린 작가는 사이토(齊藤知三)라는 일본인으로 기록돼 있다.

우정사업본부가 펴낸 ‘한국우정100년사’에 따르면

문위우표는 5종에 걸쳐 총 280만 장이 발행됐다.

이중 5문 우표(50만 장)와 10문 우표(100만 장)는 일부 일반에 발매됐다.

그러나 다른 3종(25문·50문·100문)은 일본에서 늦게 오는 바람에 쓸모가 없어졌다.

그 사이 우편물을 취급하는 관공서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정총국이 문을 연 날은 1884년 10월 1일이다.

이로부터 16일 뒤인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연회가 열리던 중 쿠데타가 일어났다.

우정총국의 초대총판인 홍영식이 김옥균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나고 쿠데타 주역들은 참형에 처해졌다.

우정총국은 아예 문을 닫게 됐다.

3종의 우표가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석 달 뒤인 이듬해 3월이다.

일본 공사관은 우표 두 궤짝을 조선정부에 건네고는 “인쇄 대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이 청구한 대금은 은화 758원 92전과 지폐 15원71전이다.

이 금액이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조선 정부에 큰 부담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본 공사는 서한을 보내 “조선 정부가 위탁한 우표 제조 비용의 신속한 상환을 앙망한다”고 했고,

조선 정부는 답서에서 “우표가 뒤늦게 도착했으나 구약(舊約)이 있는 이상 어찌 상환하지 않겠는가”

라면서도 돈이 없어 차일피일 하고만 있었다. 그때 한 외국인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어차피 쓸모없는 우표 아닌가. 그걸 외국에 팔면 적지 않은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언젠가 우편사업을 재개할 때 유용하게 쓰일 우표였지만

당시 조선 정부는 그럴 계획도, 생각도 없었기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 최초의 우표 130만 장이 궤짝째 외국으로 넘어간 연유는 여기에 있다.

조선 정부는 이 판매 대금에 모자라는 금액을 채워 1886년 2월 일본에 송금함으로써

인쇄 대금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조선 정부가 얼마를 받았는지는 지금껏 베일에 가려 있다.

우표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니 보나마나 헐값이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우표를 사간 곳은 어디일까.

인천에서 활동하던 독일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이다.

이 회사는 1886년 2월 22일 한성주보에 신문광고를 처음 낸 곳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광고 제목이 ‘덕상(德商) 세창양행 고백(告白)’.

광고(廣告)라는 말이 들어오기 전이어서 고백이라고 표현했다는 것도 이채롭다.

“호랑이·수달피·소·말·여우·개 등 각종 가죽과 사람의 머리털, 조개와 소라, 담배, 종이, 옛 동전 등

여러 물건을 삽니다.”

“요지경·뮤직박스·유리·서양단추·서양바늘·서양 실·성냥 등 여러 가지를 수입해 팝니다.”

매입 물품에 우표가 안 보이는 것은 이 광고를 내기 전 문위우표를 몽땅 사들인 때문이다.
세창양행이 독일로 가져간 문위우표는

훗날 한국의 우표수집가들에 의해 상당수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

모르긴 해도 조선 정부가 판 가격보다 몇백 배, 몇천 배는 더 지불했을 게 틀림없다.

국가가 유출한 자산을 민간에서 되찾아오느라 아까운 외화를 써야 했던 것이다.
- 이종탁 <출판국 기획위원> jtlee@kyunghyang.com

2009 06/02   위클리경향 8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