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욕의 철학 노래하고 떠난 소설가 박경리 |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영성이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사진처럼 정확히 알아차리곤 한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도 그랬다. 그는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문학과 그가 사랑했던 모국의 대지를 떠났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는 타계하기 직전 신작시 ‘옛날의 그 집’(현대문학 4월호)을 발표하면서 생의 말년에 얻은 무욕(無欲)과 달관의 철학을 참으로 유장하게 노래했다. 그는 늙어서 편안해지는 경지에 통달해 있었고, 흙으로 돌아가는 자의 당당한 여유를 사랑했다. 그는 수술과 항암치료에 대한 지인들의 권유를 부드럽게 물리쳤다. 자연의 시간이 완료돼 몸이 스러져가는 것을 억지로 막을 방법은 없고, 그런 어리석은 행위를 통해 저녁 노을의 아름다움을 망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죽음을 맞아들였다. 서울 아산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5월 5일 오후 2시 45분이 서울 아산병원이 확인한 그의 정확한 사망 시각이다. 1969년 월간 현대문학 9월호에 연재를 시작, 마지막 글자에 획을 그을 때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 여러 매체에서 연재한 이 소설의 규모는 200자 원고지 4만여 장 분량.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등과 함께 한국 소설의 ‘절창’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역사와 인간의 교호작용을 웅대하게 그린 한국 문학의 위대한 유산이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간 · 공간적 배경은 광활하다.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서 출발해 한반도와 만주·간도까지 펼쳐진 무대. 8·15 광복을 맞기까지 근대화의 격변기를 헤쳐나간 한민족의 생명력이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여주인공 최서희가 광복을 맞는 순간과 함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이 소설의 제 5부. “그 순간 서희는 자신을 휘감은 사슬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라고 쓴 작가는 그 순간 평생을 함께 동고동락한 이 소설의 집필과도 후련한 이별을 고했다.
1994년 8월 15일 새벽 2시에 탈고를 마쳤으니 서희와 박씨는 광복절이 가져다준 해방을 맞본 동지이기도 하다. 동학농민전쟁, 을사늑약, 청일전쟁 등의 역사적 사건이 등장하는 대서사시로 총 등장인물만 700여 명에 달하는 대작이다. 토지는 영어·일본어·프랑스어로 번역됐고 드라마로도 제작되며 호평을 받았다.
수술받은 직후에도 가슴에 붕대를 감은 채 밤새워 원고지를 메웠다고 하니 작가의 집념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은 그에게 가난과 불행이란 짐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안겨주었다. 한번 살아보라는 운명의 지시를 받고 그는 예술가의 창조적 여정을 아주 독하게 걸었다. 그는 데뷔 초 “행복했더라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모든 진정한 문학, 예술인이 직면한 고통스러운 삶, 그리고 아름다운 승화의 단적인 사례를 박씨의 삶과 문학 속에서 발견한다. 1950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55년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단편 ‘계산’이 발표돼 문단에 등장했다. 이후 사회와 현실에 대한 비판성이 강한 ‘김약국의 딸들’ ‘시장과 전장’ ‘파시’ 등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46년 결혼, 1남1녀를 얻었지만, 전쟁 중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남편은 6·25전쟁이 나던 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던 중 행방불명됐다. “공산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용공으로 몰려 사라졌어요”라는 것이 생전 남편에 대한 그의 짧은 회상이다.
홀로 키운 딸(김영주)은 1970년대 초 김지하 시인과 결혼했고, 박씨는 사위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옥고를 치르는 동안 딸의 가족 뒷바라지를 하면서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박씨는 좌익 남편을 둔 여자의 한을 외동딸에게 대물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박씨는 감옥을 수시로 드나들던 사위 대신 외손자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손수 키웠다. 박씨는 사위를 ‘김 서방’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하’라고 이름을 부르거나 잘해야 ‘원보 아비’ 정도였다. 위대한 소설가 장모와 위대한 시인 사위의 이 씁쓸하고 착잡한 관계는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장면으로 길이 회자될 것이다. “우리는 자연의 이자로만 살아야지. 원금을 까먹으면 끝이야”라는 유명한 비유로 자연에 대한 사랑을 토로하고 몸소 실천했다. 그는 편협한 민족주의의 극복을 제창했다. “민족주의는 일종의 지역이기주의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젊은 세대에 당부하기도 했다.
그의 문학적 사상은 토지, 역사, 모국, 대자연, 지구, 우주로 외연을 넓혀갔다. 그리고 그는 인간적 존엄에 넘치는 죽음을 선택, 별무리 저 너머로 홀연히 사라졌다. - 2008 05/20 뉴스메이커 7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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