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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환 - 한밤중의 생각

Gijuzzang Dream 2008. 5. 23. 16:49
 
 
 
 

 

 

이가환 - 한밤중의 생각

 

 

 

 

우리나라 수천리 둘레에서 하루에 태어나는 자가 몇이며 죽는 자가 몇이던가.

태어나도 사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고,

죽는대도 사람 수가 더 줄어들지 않는 그런 자야 어찌 헤일 수 있겠는가?

 

영조 14년(1738) 12월 18일, 광주부 쌍령촌에 산이 운 것이 세 번이요,

시내가 운 것이 세 번이었다. 그리고 한원이 태어났다.

 

정조 14년(1790) 5월 3일에 자최로 연복(練服)을 입고 예법에 따라 제사를 올리고,

그 이튿날 문간에서 손님을 전송하고 정침에 돌아와 갑작스레 눈을 감더니, 한원이 죽었다.

 

그가 태어나 우리나라는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우리나라가 한 사람을 잃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가환(1742-1801)이 지은 〈노한원묘지명〉의 서두다.

 

태어나도 그만 죽어도 그만인 목숨이야 어찌 일일이 손꼽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가환은 그가 태어나 조선은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조선이 한 사람을 잃었다고 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노긍(盧兢, 1737-1790)은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다.

자를 신중(愼仲)이라 하였다가 뒤에 여임(如臨)으로 고쳤다.

살얼음을 밟듯 물가에 임한 듯 조심조심 살려했던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다.

 

한원(漢源)은 그의 또 다른 자이다.

문장의 근원이 마치 한강물의 도도한 흐름과 같다하여 얻은 이름이다.

그 문체가 꽃구슬을 흩은 언덕과 같다해서 산주파(散珠坡)란 호를 갖기도 했다.

도협(桃峽)이란 호도 썼는데, 살던 집이 복사꽃이 흐드러진 골짝에 있었던 까닭이다.

1976년 문중에서 전해오던 글을 수습하여 《한원문집》을 영인했다.

이 책 때문에 그의 글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아버지 노명흠(盧命欽, 1713-1775)은

최근에 야담집《동패낙송(東稗洛誦)》을 엮은 사람으로 확인되었다.

부자가 모두 과시(科詩)에 있어서는 당대에 겨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정조조 시파 벽파로 나뉘어 치열한 정쟁을 벌이던 와중에,

홍봉한(洪鳳漢) 집안의 문객으로 수십년간을 얹혀 살았다.

 

정조 즉위 후 정권의 향방이 달라짐에 따라, 노긍은 즉각 반대당의 미움을 사서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팔아 선비의 기풍을 무너뜨렸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위원 땅에서 6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말하자면 그가 과거 시험 답안 대필업자였다는 것인데,

이런 한심한 인간을 두고 이가환은 어째서 위와 같은 평가를 남겼을까? 

이가환은 묘지명에서 또 그가 증광회시에 응시했을 때

동향의 늙고 곤궁한 선비가 빈 답안지를 안고 비척대는 것을 보고는

선뜻 제 원고를 그에게 주어버린 일을 적고 있다. 덕분에 그 선비는 높은 등수로 합격했다.

 

노긍은 아쉬워 하기는커녕 일소에 부치며 즐거워 했다.

이가환이 묘지명에서 이런 내용을 적었던 것은 

그가 과거 시험장에서 돈을 받고 답안지를 팔았다는 죄가

사실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음을 변명해주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기만 하면 급제를 했다.

급제를 하면 뭐하나? 급제는 명예를 더할 뿐

그와 같은 몰락한 잔반에겐 정작 벼슬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급제를 여러 번 해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차라리 권세가의 과외 선생으로 들어가 먹고 살 도리를 닦는 것이 더 나았다.

제 답안지를 남에게 건네주는 그의 행동에는

그 시대를 향한 싸늘한 냉소의 기미마저 느껴진다. 

귀양갈 당시 그는 아버지의 상기를 채 마치지 못했을 때였다. 더하여 아내의 상까지 만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듬해 임금의 행차를 가로막고 제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던 장남마저

강원도 간성 땅으로 귀양을 갔다.

집에는 어린 자식들이 어미도 없이 귀양간 아비와 제 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러봐도 살길은 참으로 막막하기만 했다.

과거 시험장에서 글을 팔아 먹었다는 죄를 입어 먼 변방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

찬 방에 새우 등을 하고 누웠을 때, 마음 속을 스쳐가는 상념인들 왜 없었으랴.

한밤중의 떠오른 갖가지 생각에 대해 쓴〈상해(想解)〉는

이러한 기막힌 상황에서 쓰여진 글이다.

 

내가 변방에서 죄를 입어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밤에 간혹 구부려 누웠다가 망녕되이 정이 일어나면,

인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어 이리저리 걷잡을 수가 없었다.

 

용서를 받아 풀려나면 어찌할까? 고향을 찾아 돌아가서는 어쩐다지?

길에 있을 때는 어찌하고, 문에 들어설 때는 어찌하나?

부모님과 죽은 아내의 산소를 둘러 볼 때는 어찌하며,

친척 및 벗들과 둘러 모여 말하고 웃을 때는 어찌하나?

채소의 씨는 어찌 뿌리며, 농사일은 어떻게 할까?

하다 못해 어린애들 서캐와 이를 손수 빗질하고,

서책에 곰팡이 피고 젖은 것을 마당에 내다 볕 쬐는데 이르기까지

온갖 세상 사람들에게 있을법한 일이란 일은 전부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렇듯이 뒤척이다 보면 창은 훤히 밝아왔다.

막상 이루어진 일은 하나도 없고,

변함없이 위원군의 벌받아 귀양 온 밥 빌어먹는 사내일 뿐이었다.

생각을 어느 곳으로 돌려야 할지,

문득 내가 누군지 조차 알지 못하여 마침내 혼자 실소하고 말았다.  

오늘밤 오경 중만 하더라도, 부서진 오두막집 속에서

다시금 몇 천만명의 사람이 천만 가지 생각을 일으켜 세계에 가득 차고 넘침이 있으리라.

뒤로 이득을 취하려는 생각도 있겠고, 내놓고 이름을 얻으려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귀하게 되어 한 몸에 장상(將相)을 아우르고픈 생각도 있을 테고,

부자가 되어 재물이 왕공(王公)처럼 많았으면 하는 생각도 있겠지.

그런가 하면 처첩이 방에 가득했으면 하는 생각도 있겠고,

또한 자손이 집에 넘쳤으면 하는 생각도 있을 것이다.

저를 뽐내고 이기고 싶은 생각도 있겠고,

남을 해코지하고 틈새를 이용하려는 생각도 있을 터이다.

원래 한 사람도 없었고, 애초에 한 생각도 없었기에,

이 또한 창이 훤히 밝아오면 한 가지도 이뤄진 일이 없다.

변함없이 가난한 자는 도로 가난해지고, 천한 자는 다시 천하게 된다.

이씨는 다른 이씨로 돌아오고, 장씨는 다른 장씨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대개 전생의 바탕을 금생에서 받아 쓰는 것이니,

조화옹은 목이 뻣뻣하여 이러한 사람의 정리는 돌아보지 않는다.

한 차례 기록함이 결정되고 나면 다시는 두 번째로 표시를 고쳐주는 법이 없다.

설사 멋대로 이리저리 헤아려 이렇듯이 교활하고 어지러이 정신을 벗어나게 하여

십만 팔 천리에 통하게 하더라도,

근두운을 탄 손오공의 재주로도 뛰어봤자 울타리 안을 벗어나지 못하고,

나가봤자 경계의 밖을 지나가지 못할 터이니 어찌한단 말인가? 

 
오늘 또 먹던 대로 밥 먹고 입던 대로 옷 입고 있는데

염라대왕의 검은 옷 입은 저승사자가 신속하게 비첩(批帖)을 가지고 이르게 되면,

올라갈 때 길을 나섬은 감히 머뭇대지 못할 터이다.

지금까지의 천만가지 생각들은 뒤에다 죄 내던져 버리고,

단지 머리를 푹 숙이고 따라 갈 뿐이다.

마침내 내가 많고 많은 숙원이 있고 생각의 실마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일정을 늦추어 달라고 빌어보지도 못할 것이다.

 

쯧쯧!

이렇게 가는 길이 바로 종국에 떨어져 내려가는 곳일터이고, 이처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바야흐로 첩첩히 쌓인 것을 타파하고 일을 더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하루 밤에도 수없이 떠오르는 갖은 상념들을 주체할 길 없어 쓴 글이다.

 

낯설고 물선 귀양지에서 밤새 잠 못 이루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생각은 하루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

혹시 내일 아침 석방을 알리는 통지서가 날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막상 고향집 문앞에 서면 어떤 표정을 지으며 들어선다지?

집에 간댔자 이미 반가운 얼굴로 맞아줄 아내도 죽고 없다.

여보! 당신 장례도 제대로 못 치르고 붙들려 갔던 남편이 돌아왔소. 미안하구려!

평생 고생만 시키다가 마지막 떠나는 자리조차 내 손으로 가늠하지 못하고 말았소.

아내의 무덤 앞에 서서 나는 고작 이런 말밖엔 할 수가 없을테지.

반갑다고 몰려든 친척과 벗들 앞에서 나는 좋다고 웃어야 하나?

아니면 기가 막혀 울어야 하나?

나 말고도 이 세상에 잠 못드는 그 많은 영혼들이 있어

그들의 안타까운 바램과 한숨만으로도 세계는 가득 차 넘칠 것이다.

허황한 망상이 아침해와 함께 말짱한 꿈으로 흩어지고 나면,

귀양지의 낯선 방에서 웅크려 누운 초라한 내 모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답답하기는 답답했던 모양이다. 전생의 업보를 금생에 받아 쓸 뿐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을까 싶었던 거였겠지.

오죽 답답했으면 손오공의 근두운 생각을 다 했을까?

그래봤자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듯이, 발버둥을 쳐도

한치조차 벗어날 수 없는 숨막히는 현실을 그는 비관했다.

많고 많은 숙원을 이룰 수 없을진대 나는 밤마다 쓸데없는 몽상으로 헛된 꿈을 계속 꾸던가,

아니면 저승사자가 나를 염라대왕 앞으로 하루 속히 불러가서

이 천만 가지 헛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말은 장황하게 했지만,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생각 저 생각 할 것 없이

모든 것 훌훌 털고 빨리 죽고 싶을 뿐이라는 뜻이었을 게다.

근두운 뿐 아니라 글을 보면 백화투의 표현이 도처에서 튀어나와

이른바 패사소품체의 면모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고 보면 그는 참 답답한 사람이다.

왜 그는 그 높은 식견과 포부를 품고서도 고작 남의 집 사랑채의 식객 노릇으로

절대의 궁핍 속에 일생을 마치고 말았을까?

과거에 급제하고도 남을 실력을 지녔으면서도 왜 늘 남 좋은 일만 하고 다녔을까?

그럼에도 그와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은 어째서 한결같이 고작 과거 답안을 대필해주는

글쟁이일 뿐이라고 욕하지 않고, 그 문장과 식견을 그렇듯이 높이고 아꼈을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주인은 글로써 죽은 종 막돌이의 장례에 고하노라.

아아! 너의 성은 채씨이고, 네 아비는 관동의 양인이었다.

너의 어미는 내 외가의 여종이었다.

네 아비가 내 말고삐를 잡은 지 20년에 마침내 길에서 죽어

내가 남원 만복사에 이를 장사 지냈다. 네 어미가 내 몸을 봉양한 것이 30년인데

마침내 집에서 죽으니, 내가 공수곡의 서산 아래에다 장사 지냈다.

네 형이 나를 수십년 동안 부지런히 섬기다가 또 집에서 죽으니, 내가 또 이를 장사지냈다.

이제 네가 또 자식 없이 죽으니, 너희 채씨는 마침내 씨가 없게 되었구나.

네가 태어나 세 살 때 네 아비가 죽었고, 여섯 살에는 네 어미가 죽었다.

너의 안주인이 거두어 길렀으나, 주리고 춥고 병들어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하였었다.

네 안주인의 상을 당했을 때 너는 고작 오척의 어린애였으나,

머리털은 헝크러져 괴이하였고 다만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파리하였다.

 

내가 또 재앙을 만나 부자가 흩어져 있을 때, 너는 동해 바닷가까지 만리길을 울부짖었고

(아들이 간성 땅에 귀양가 있었다),

또한 서쪽 변방 밖(아비는 위원 땅에 귀양가 있었다)까지 눈과 서리, 더위와 비를 맞으며

발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래하면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 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 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히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 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오를 것이다.

평생 주인을 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 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 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래 다투어 내가 어찌 지내는 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 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몹시 늙은이가 다 되었다고 말하여 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제망노막석문(祭亡奴莫石文)〉이다.

노긍이 채막석, 아마도 채막돌이라고 불리었을 죽은 노비를 위해 지어준 제문이다.

막돌이의 아비는 지난 20년간 언제나 내 말고삐를 잡고 따라 나섰던 하인이었다.

길에서 죽은 그의 아비를 남원 만복사에 묻고,

그의 어미와 형이 다시 나를 섬기다 세상을 뜬 뒤 막돌이마저 자식 없이 죽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채씨의 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여섯 살에 고아가 된 너를 내 아내가 거두어 길렀고,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너는

그 은공을 잊지 못해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끽끽 울며 괴로워했다.

 

또 우리 부자가 재앙을 만나 평안북도 위원 땅과 강원도 간성 땅에 각기 귀양가 있을 때에도

그 먼 길, 그 고통을 마다 않고 발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래하며

심부름을 해 주었었다. 내 집에서 지낸 그 어느 하루도 너에겐 편안한 날이 없었다.

언제 실컷 잠 한 번 자본 적이 있으며, 언제 콧노래 한 번 불러본 적이 있었더냐.

명색 주인된 자로서 나는 이것을 깊이 부끄러워 한다.

아아! 막돌아. 이제 편히 눈을 감으려므나.

이제 지하에 들어가 평생에 지친 몸을 누이면,

먼저 간 네 부모와 네 형, 내 아내와 내 동생이 널 보러 달려올 테지.

그리하여 다투어 나는 어찌 지내고 있더냐고, 그 사이에 다른 변고는 없었느냐고

물어볼테지. 그러면 너는 이렇게 대답해다오.

"네. 주인님은 요즘 온 몸 어데고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이빨은 흔들리고, 터럭 위엔 흰 눈이 내렸습지요.

이런 저런 세상 시름에 찌들어 벌써 늙은이가 다 되어 버린걸요."

그러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얼굴빛이 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막돌아.  이제 나 혼자만 이렇게 남았구나.

사대부가 제 집에서 부리던 종의 제문을 지은 것은 전에 볼 수 없는 파격임에는 틀림없다. 

막상 글은 막돌이의 일을 빌어 중년 이후 영락에 영락을 거듭했던 집안과,

스스로의 기막힌 처지에 대한 자련자애의 정을 표백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 정황이 참으로 눈물겹고 슬프다.

요컨대 그는 한 세상 건너가는 일이 너무도 힘들어 죽고만 싶었던 것이다.

 

이가환은 〈노한원묘지명〉에서 다시 이렇게 그를 회고했다.

 

한원은 기억력이 뛰어나 고금의 서적을 한번 보기만 하면 대략 외울 수가 있었다.

특히 시무에 밝아 당대 인재의 높고 낮음과 어느 자리에 누가 마땅한지 하는 판단과

국가 계획의 좋고 나쁜 까닭을 하나하나 분석하매 모두 핵심을 찔렀다.

만약 그를 써서 일을 맡겼다면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근근히 문인으로 행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태어나자 조선은 한 사람을 얻었고, 그가 죽자 조선은 한 사람을 잃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과시(科詩)는 겨룰 자가 없었고, 품은 뜻은 크고도 높았다.

이런 뛰어난 역량을 지녔던 그가, 돈받고 답안지 팔아먹은 놈이란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 쓰고, 절대의 궁핍 속에 삶을 마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결코 공평한 곳이 아니다.

동생이 죽은 뒤 묻을 땅뙈기조차 없어 제 집 귀퉁이에 묻었다가,

그나마 이웃의 송사로 파낼 수밖에 없었던 기막힌 심정을 적은〈금장설(禁葬說)〉같은 글을

보면, 도대체 선비의 글 하는 구실과 보람에 대해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정민교수의 한국한문학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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