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정 경희대 혜정박물관장
“현자(賢者)는 역사에서 배우고, 우자(愚者)는 경험에서 배운다”
종이 지도가 없었던 시절에도 ‘지도’는 존재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표현을 보라.
G.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 문장을 멋지게 장식한 이 표현에는 ‘자연의 지도’를 읽으면서 낯선 세계를 인식하고 영웅적 모험을 떠나고자 했던 인류 유년기의 사유 방법이 잘 요약되어 있다. 옛 선인들은 자연이 그린 지도에서 자신의 기원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성찰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지도를 통해 자신의 뿌리와 미래 전망의 의미를 읽어내고자했던 근대인의 일상의 모험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지속된다.
인식의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 도상(mapping) 훈련, 청사진(blueprint), 로드맵(road map) 따위의 레토릭은 오직 현재의 삶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문화적 기획을 지칭하는 은유일 터이다. 만일 우리 삶에 매핑(mapping)이라는 문화 기획이 없다면,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결국 뿌리 뽑힌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김혜정 경희대 혜정박물관장의 지도 사랑이 자신의 ‘뿌리 찾기’ 기획과 깊은 관련을 갖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김 관장의 지도 사랑은 여고 시절에 도쿄 간다[神田] 거리의 고서점을 출입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단골 고서점에서 1700년대 초 프랑스 선교사 당빌(D’Anville)이 만든 지도첩을 발견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김 관장의 고지도 수집 목록 1호가 된 당시 지도첩에는 ‘조선왕국’이 선명히 표기되어 있었다. 김 관장은 “단골 고서점 할아버지가 ‘네 눈썰미도 참 대단하다’고 칭찬했던 말이 기억난다”며 웃음을 짓는다.
이렇게 시작된 김 관장의 지도 사랑은 거진 40년 동안 900여 점에 달하는 소장 목록으로 기록되었다. 17년간 운영한 마케팅연구소 일에서 손을 뗀 뒤로는 지도 수집에 인생을 ‘올인’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이다.
김 관장은 “지도를 보면서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국인이라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는 지도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실제 김 관장이 지도 수집을 위해 유럽,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지를 누비고 다니며 발품을 판 거리를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노릇이리라.
김 관장의 고지도 ‘수집 작전’이 몹시 궁금했다. 그는 최근 이탈리아의 한 고지도상에게서 지도를 구입한 사연을 털어놓는다. “그 단골 상인에게 말했어요. ‘액자는 당신에게 선물로 드릴 터이니, 내용물을 나와 백년가약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떼를 썼지요. 이틀 만에 그 지도를 구입하고 나서 만세삼창이 절로 나왔어요.”
김 관장의 이러한 지도 사랑은 “현자(賢者)는 역사에서 배우고, 우자(愚者)는 경험에서 배운다”라는 특유의 역사인식으로 심화된다.
김 관장은 “1712년 조선과 청의 영토를 정한 백두산정계비가 이제는 사진과 탁본 자료만 남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김 관장이 ‘관광안내도한 장조차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역설한 이유 또한 거기에 있지 않을까. 지도만큼 확실한 역사에 관한 알리바이가 어디 있겠는가.
김 관장이 수집한 고지도는 현재 경희대 수원캠퍼스 혜정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전시 공간이 비좁아 900여 점의 소장품을 전시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 ‘인생 오복(五福)’ 가운데 이제는 ‘아름답게 죽는 일’만 남았다고 말하는 김 관장의 여생은 그러므로 독립 전시공간을 만드는 일에 바쳐질 것이다. 그것은 곧 ‘역사의 상실’을 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 고영직 / 문학평론가. 196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1992년 『한길문학』을 통해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주요 평론으로 「‘자발적 가난’의 한 경로」와 「한국문학과 베트남전쟁」 등이 있다. 현재 본지 전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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