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에 담긴 실학자들의 생각 읽기
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2×45.7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시대는 성리학적 유교 사상을 배경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이 형성되어 갔다. 당시의 복식문화 역시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 후기에 유교는 경론(經論)과 명분(名分)을 중시하면서 형식주의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 특히 『주자가례(朱子家禮)』는 일상생활 속에서 의례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예학의 발전을 가져오기도 했지만 경직된 형식주의 양상을 가져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명분과 형식을 중시하던 유교 풍토에서 점차 이론보다는 실질을 중시하고 개혁을 통하여 삶의 질적 향상을 갈구하던 유교의 반동 풍토가 일어났으니 바로 실학적 풍토이다. 실학이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형식에서 탈피하여 실천론을 중시하고 실생활에 유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학문을 지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 글에서 말하는 실학자들이란 그러한 생각과 행동을 소유했던 지식인층을 지칭한다.
17세기 이후 이러한 실학적 움직임이 서서히 일어나더니 18세기 후반 영조, 특히 정조 시대를 맞으면서 꽃을 피웠다. 문화중흥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는 상업의 발달과 중국 청나라의 실질을 중시하던 분위기 속에서 크게 발전해 가는 모습의 인식, 청을 통한 서양문화와의 접촉 등의 영향이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실속 없이 조선 사대부가의 복식은 옷감은 더욱 사치스러워졌고 유한계급임을 드러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안이 모색되었다. 대표적으로 광수(廣袖)라는 넓은 소매는 말을 타기 어려울 정도로 넓어졌고 여자들은 저고리는 지나치게 짧아지는 반면에 치마는 자꾸 길어지고 머리에는 목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가체가 얹히는 등, 합리적이라 할 수 없는 유행 양상들이 나타나게 되고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은 실학자들의 비판적 시각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형이상학적인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역사와 현실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역설하였다. 따라서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분야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는데 그 대상 중의 하나가 몸에 걸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전의 성리학자들이 가졌던 옷에 대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용와 후생에 관심이 있었던 18세기 전후의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논의되었던 옷과 관련된 내용을 옷에 담긴 그들의 생각이라고 보고 그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실학자들의 관심 속에 들어온 ‘옷’
기성 성리학자들은 옷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었고 실학자들만이 옷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심의 대상이 달랐다. 기성 성리학자들의 관심은 심의를 비롯하여 관혼상제라는 사례(四禮)와 관련된 예복(禮服)에 국한되어 있었다. 임란 이후 혼탁해진 사회 속에서 자연히 유학자들은 사례(四禮) 연구의 필요성을 인지하였고 아울러 관혼상제와 관련된 의례복(儀禮服)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예서에서는 이러한 욕구에 맞추어 심의(深衣)를 중심으로 예복에 관하여 다루었다.
그러나 17세기 중 후반부터는 이러한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자들이 지나치게 예에 집착하면서 예복에 국한하여 관심을 가졌던 것과는 달리, 소위 실학, 이용후생을 부르짖었던 당시의 지성인 집단은 종전과는 다른 양상으로 옷에 대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즉 예학에 집착한 과거에는 심의와 예복에 관한 언급으로 그쳤다고 한다면 이들은 사물에 대한 개별성 인정 태도에1) 근거하여 현실적인 생활 속의 옷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관심의 대상 변화는 그들의 저서 속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이익(李翼,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서(湛軒書)』,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연암집(燕巖集)』,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박제가(朴齊家, 1750-1815)의 『북학의(北學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이규경(李圭景, 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등이 있다.
그 외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거가잡복고(居家雜服攷)』와 서유구의 형수,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의 『규합총서(閨閤叢書)』등이 있다. 이들 문헌 속에 당시 실학자들의 모든 사물에 대한 관심이 담겨져 있으며 그 안에 옷도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책 속에 담긴, 옷에 대한 담론의 내용은 세 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다. 하나는 복식제도의 기원과 변화에 대한 고증학적 관심이고, 두 번째는 복고적인 복식제도로의 개혁, 세 번째는 옷을 실제 제작하는 것과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이다.
1) 고증학적 관심
특히 이익은 죽립(竹笠), 방립(方笠) 등, 다양한 복식의 유래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며3) 홍대용은 중국의 복식제도의 유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4) 그 이유는 중국 복제(服制)가 우리 복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서유구 역시 『임원십육지』에서 당시의 다양한 복식류와 염색법, 직조 관련 자료를 제시하고 있는데 다른 문헌에서 보기 어려운 내용도 담고 있어서 의미가 크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복식과 관련하여 다방면으로 기원과 변천에 대해 살펴본 역작으로 이 부분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도포변증설」과 「심의변증설」등 다양한 복식류의 유래와 변천에 대한 변증은 물론, 옷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목면초면변증설」에서는 목화에 대하여, 「연마변증설(練麻辨證說)」에서는 육진과 영남의 삼베를, 「산야잠변증설(山野蠶辨證說)」에서는 산누에고치를 얻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그리고「초포변증설(蕉布辨證說)」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의 물산인 초포까지도 소개하고 있다.
그 외에 쓰개류와 머리모양에 대한 변증, 당시 일상적으로 입는 옷을 만들 때 필요한 옷감의 양을 제시한 「복식재량변증설」도 있다. 「의복재봉변증설」에서는 부위별 명칭과 바느질 기법 명칭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구모외향변증설(裘毛外向辯證說) 」에서는 우리나라 갖옷의 제작방식과 중국 방식과의 비교는 물론, 외투의 털 방향에 대한 역사까지도 고찰하고 있다. 또한 상례복식에 관한 고증, 귀고리나 목극, 인수(印綬)와 같은 복식 부속품도 다루었으며「제대홍연지변증설(製大紅臙脂辨證說)」등으로 염료에 대한 관심도 잊지 않았다. 2) 중국 고대제도로의 복귀
복식제도의 복고론은 중국 선대(先代)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조선중화주의’에 의거하여 자국의 문화수준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건국 당시 입국의 규모와 체제에서 송(宋)의 제도를 많이 따랐던 조선은 송의 화이론(華夷論)을 수용하여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정립했다. 조선은 중화문화의 정수를 가진 문화국가이며 다만 그 규모에 있어 중국보다 작은 국가라는 의식이었다. 존주론(尊周論)의 입장에서 보면 주(周)에서 명(明)으로, 그리고 조선으로 변화한 것이었다.5) 그렇기 때문에 오랑캐에 불과한 청나라 사람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지배층의 사고방식이었다. 북학파들 역시 당시 지배층과는 같은 생각은 아닐지라도 대명 의리론에 어긋나지 않을 명분과 논리가 필요했다. 지금 청나라가 누리고 있는 문명은 오랑캐의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전해 내려온 중화문명의 진수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고대의 복식제도를 이상적인 복식제도로 삼은 것은 당시 이러한 사회적 성향과도 일치한다. 이 복고론은 옛 제도를 존중하고 근본을 잊지 않고자 하는 예(禮)의 정신을 반영한 것으로 오랑캐풍으로 변화된 풍속을 중화의 제도로 환원하자는 것이었다.6)
박제가는 『북학의』7)에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 남자들이 호복(胡服) 입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자신의 부인들이 몽고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금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당시, 주자의 야복(野服)을 본 따 흰 옷에 검은 선을 두른 옷, 즉 학창의(鶴氅衣)를 만들어 평상복으로 입었으며 동자들은 총각의 옛 제도인 쌍상투를 틀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박종채(朴宗采, 1780-1835) 역시 어렸을 때 사규삼을 입고 쌍상투를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박지원에게 오랑캐 복장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또한 박제가가 중국 청나라의 선진문화에 대해 적극 수용의 태도를 보이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당괴(唐魁), 즉 중국병에 걸린 자라고 하여 손가락질 하였다고 한다. 북학파 자신들도 대명 의리론과 어긋나는 주장을 폈을 때 그들에게 쏟아질 비난이 솔직히 두렵기도 하였을 것이다.9)
중국 고대제도의 수용에 관한 꿈은 박규수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했다. 『거가잡복고』에 남자는 물론, 여자와 아이들의 옷과 장식품까지도 거론하면서 오랑캐 풍속을 버리고 중국 제도를 따르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림 1>과 <그림 2>처럼 남자는 심의(深衣) 등을, 여자는 소의(宵衣) 등을 입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하였다.11) 이는 그만큼 당시 실학자들 사이에서도 중국 고대제도에 대한 흠모 양상이 만연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당시 북학파의 한계이기도 하다.
3) 옷 구성법에 관한 관심 실학자들은 옷의 형태나 옷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형태와 제도에 관한 고증과 제도상의 오류에 대하여도 구체적인 관심을 보였다. 예컨대 홍대용은 심의제도가 시복(時服)에 비해 비합리적이며 또 제작했을 때 본래 지니고 있는 뜻인 평정(平正)도 이루지 못함을 비판하였다.12) 또한 옷을 만드는 데 소용되는 양을 계산하거나 옷의 세탁법, 관리 · 보관법, 그리고 옷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침선도구에까지 관심을 보이는 등, 옷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복식재량변증설(服食裁量辨證說)」이 부분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 당시 실제 사용되던 복식과 심지어 이불까지 일일이 열거하면서 각각의 필요량을 제시하고 있다.
여자 옷으로는 저고리 5자, 홑적삼 4자, 바지 안팎 30자, 홑바지 17자, 치마가 23자. 무죽상(無竹裳) 9자, 요대(腰帶) 안팎이 3자6치, 버선 안팎 3자 등을 제시하면서 상민(常民)은 옷을 짧게 입으므로 어림하여 구별하여야 한다. 그 외에 방적, 방직과 관련된 도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방차(紡車)와 포침(布針) 등에 대한 변증설도 제시하였다. 한편 빙허각 이씨 역시 『규합총서』 봉임측13) 부분에서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한 의생활 관련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재단 마르기 좋은 날을 비롯하여 연령과 체형에 맞추어 옷 짓는 법, 구체적인 필요량, 염색 등, 다양한 지식을 전해주고 있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한 것
실학자들은 거창하게 고대 제도로의 복귀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고증학적 관심 외에 실생활 속에서 지키고 고쳐나가야 할 일들에 대해서도 세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버려야 할 것, 지켜야 할 것, 새로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 등, 생활 속의 지혜라 할 수 있는 주제들을 다루었는데 우선 버려야 할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외화 낭비하는 ‘털모자’는 가라
조선 후기에는 사치풍조가 만연되면서 털모자[耳掩]<그림 3>14) 유행도 대단했다. 귀를 감싸는 것만이 아니라 목과 어깨, 이마 볼 등을 싸는 방한구가 개발되었고 이는 청나라의 모자 수입으로 상당부분 충당되었다. 18세기의 연행 사신단 속에는 이러한 국내의 요구에 발맞추어 모자를 무역해 오는 상인들이 많았다. 청나라 요동의 중후소(中後所)라는 곳에서 조선의 수요층을 노리고 모자 종류를 생산하였다. 연경으로 들어가면서 주문을 해 놓고는 돌아오는 귀국 길에서 찾아갔는데 나중에는 가격이 올라 처음 가격보다 비싸게 구입해야 하는 일도 생겼다.
1780년 열하에 다녀온 박지원은 당시 털모자의 소비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국내 남녀 한 명이 모자 하나는 써야 겨울을 넘기므로 동지사 등이 가지고 가는 은화가 10년이면 100만 냥이나 된다. 모자는 삼동이나 날 쓰개로 봄이 되어 헤지면 버리고 만다. 천년을 두어도 축이 안 나는 은을 삼동만 지나면 해질 모자와 바꾸니 얼마나 생각 없는 노릇들이냐16) 1783년 홍양호 역시 정조에게 6조목의 시무책을 건의하였는데 그 중 모자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아무 근거 없이 그저 한기를 막아주는 도구일 뿐인데 채광한 은을 모자 수입을 위해 중국에 보내니 은화가 날로 소모되고 요동의 상인들만 큰 이득을 얻으니 모자 무역을 중지시키고 금지령을 내리는 것을 건의17)하였다.
2) 살인도 할 수 있는 다리[辮髢]는 버려야 개인소장의 한 미인도<그림 4>에는 구름 같은 흑단의 머리채가 무거운지 두 손으로 다리를 떠받치고 있는 여인이 묘사되어 있다.18)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여자의 이러한 다리에 대해서 일침을 놓았다. 요즘 어느 한 부자집 며느리가 나이 13세에 다리를 얼마나 높고 무겁게 하였던지, 시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자 갑자기 일어서다가 다리에 눌려서 목뼈가 부러졌다. 사치가 능히 사람을 죽였으니 아, 슬프도다.
가난한 집 여자는 시집간 지 오래되어도 원래 다리를 마련하지 못할 처지라 맨머리로 지내는 자가 많은데 맨머리로 오랜 세월 지내는 것보다 차라리 궤계(簂髻 : 철사로 둘레를 만들고 바깥쪽에 머리털로 싸서 만든 부인의 머리장식)를 쓰는 것이 낫지 않는가? 결국 사치가 지나쳐 무거운 머리장식을 한 13세의 어린 새댁이 머리에 눌려 죽고 만 것이다. 그 머리 또한 어느 남자의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비싸서 못 구하는 사람은 혼인을 하고도 머리를 못 올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조정(1788)에서는 다리 사용을 금지하고 족두리와 쪽머리를 사용하도록 하는 조치가 있었다.
3) 소매 좁고 길이 짧은 기생 저고리가 문제로다 ! 18세기에는 반가 부인들의 저고리가 짧고 소매는 좁으며 치마는 길고, 커다란 다리를 올린 형상으로 묘사된다<그림 4>. 극소화와 극대화의 양극으로 치닫는 형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비난을 받으면서도 괴상한 옷차림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당시의 여자 옷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새로 생긴 옷을 시험 삼아 입어보니 소매에 팔을 꿰기가 몹시 어려웠고 한 번 팔을 구부리면 솔기가 터졌으며 간신히 입었지만 잠시 있으니 팔에 피가 통하지 않아 살이 부풀어져 벗기가 어려웠다. 소매를 찢고 벗기까지 하였으니 어찌도 그리 요망스런 옷인가! 20)
생활 속의 지혜
1) 검소하면서 분수에 맞게 북학파는 사치는 재화를 낭비하는 비실용적인 것이므로 그러한 풍속은 개혁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홍대용은 몸소 선비의 검약한 모습을 실천하였으며 사치를 막고 검약하는 풍속을 위해 위로부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이가 50이 된 후에야 명주옷을 입게 하자는 등,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1) 정약용22)은 검소한 풍속으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관복의 종류도 너무 많아 번잡스러우며 구입에 어려움이 있으니 길복(吉服)과 군복(軍服), 천담복(淺淡服), 갑주(甲胄) 등, 4종으로 간소화할 것을 역설하였다. 서인복(庶人服)에 있어서는 귀천을 구별하고 검약한 풍속을 이루고자 서인 계층을 진사(進士), 거인(擧人), 그 외의 사람으로 나누어 진사를 심의를, 거인은 창의(氅衣)를, 그 외는 협수장유(夾袖長襦 : 좁은 소매에 긴 저고리=小氅衣)로 상복(上服)을 삼게 하자는 개혁론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신분을 구분하고 그에 맞는 의복을 제시함으로써 여전히 신분사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도 보여주고 있다.
2) 예는 갖추면서, 그리고 현실에 맞게 이덕무는 복고적인 관점에서 복식의 의례적 성격을 중시하였다. 그는 복식을 착용하는 이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차림새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바른 차림에서 바른 정신이 나온다는 기본적인 생각에서였다. 옷만 갖추고 용의(容儀)가 없는 것을 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면서 항상 바른 옷차림을 하여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아울러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아 있는 허례보다는 진솔한 예의를 보이는 자세를 추구하였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사치스러운 것은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시속(時俗)은 따르는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었다. 또한 옛 것이 좋다하여 요즘의 것을 버리면 도리어 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중국인이 비록 머리를 깎고 호복을 입었다고는 하지만 실은 중화의 후손이요, 조선인이 비록 넓은 소매의 옷을 입고 큰 갓을 쓰고 자랑하나 실은 오랑캐에 불과하다. 겉치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이 더 중요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예’는 편의에 따라 융통성 있게 지니는 것이라고 하였다.
목욕은 시키지 말고 옷은 당시의 옷[時服]을 쓰되, 전에 입던 것을 빨아서 쓰고 이불은 대렴금(大斂衾)을 쓰되, 성호처럼 종이이불[紙衾]을 쓰지는 않더라도 홑이불[單衾]이면 족하다.24) 도포는 베를 사용한다. 옛 사람이 시복으로 사용하던 뜻이다. 심의는 평소 입던 옷이 아닌데 어떻게 죽은 뒤에 갑자기 쓰겠는가. (중략) 악수는 사용할 필요가 없으며 (중략) 신발 역시 사용할 필요가 없다.25)
3) 활동은 편하게
18세기의 남자들은 장식적인 긴 갓끈[笠纓]이 달린 갓에 도포나 대창의처럼 소매가 넓고 옷자락이 여유 있는 옷을 입었다. 보다시피 활동이 그리 편한 차림은 아니었다.
연암 박지원은 ‘우리나라의 옷소매는 넓고 한삼(汗衫) 역시 길어 두 손을 휘감아서 고삐를 당기고 채찍을 들려고 할 때 모두 방해가 되니 이것이 모두 말 다루는 데에 있어 위험하다. 철릭을 융복으로 입는데 마치 중의 장삼과 같아 광수로 고삐 잡는 것이 문제27)라는 이야기이다.
정조 17년(1793)에 융복과 군복<그림 5>28)의 혼용으로 인한 폐단을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인물은 무관 이문원(李文源)이었다. 그 이유는 어가를 호위하는 시위(侍衛)의 복색이 통일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주립과 철릭의 거추장스러움이다. 세 번째, 군과 융의 의미 동일하니 간편한 군복을 채택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비용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조는 융복과 군복 제도를 모두 유지하는 것으로 종결하였지만 이처럼 수백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융복이라는 옷을 활동에 불편하기도 하고 비용을 절감시키기 위해 없애자는 논의가 과감하게 대두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의식의 큰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군복 자체의 기능성에 대한 또 다른 논의도 이루어졌다. 우선 말을 타기 편한 대금형 전복에 좌우 옆을 트고 뒤트임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림 5>의 장교나 『정리의궤첩(整理儀軌帖)』29)에 보이는 초관哨官처럼 말이 달릴 때 전복 자락이 펄럭거리지 않도록 다리의 무릎 아래를 뭔가로 묶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서유문(徐有聞)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1798)에는 당시 청나라 사람들의 말 타는 법이 안장에 등자를 층층이 달아서 나는 듯이 올라앉고 긴 옷은 뒤를 트고 옆 자락을 거두어 단추를 끼웠기에 옷 뒤에 드린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특히 『무오연행록』에는 중국인들의 옷에 달린 단추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확인된다. 이는 단추의 실용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의 19세기 동다리 유물 중에는 28cm 길이의 옆트임에 ‘쌍 암단추’가 달려 있고 겉섶과 안섶선, 뒤트임선 양쪽으로 옆트임과 동일한 위치에 각각 숫단추가 달려서 단추를 양 고리에 끼우면 종아리 부분을 끈으로 매 준 것과 같은 효과를 주는 것이 있다.30) 『무오연행록』단추 기록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4) 돈을 버는 방법 박제가는 1778년 연행 중에 연경의 풍물에서 상업이 번성한 시장의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북학의』에서 상업의 진흥과 소비의 중요성을 지적하였다.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許生傳)』의 주인공 허생은 남산 아래 오두막에 살던 몰락한 양반으로, 어려운 살림살이의 푸념을 늘어놓는 부인의 말을 듣고 집을 나와 한양의 제일 부자인 변씨에게 돈을 빌려 장사를 떠났다. 제주도에서 말총을 매점매석하여 망건 값이 뛰어 올라 갑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반이 당시 가장 꺼려하던 장사[商]에 뛰어들어 돈을 벌었다고 하는 발상을 하였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정조는 1792년 4월에 궐 안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당시 성안을 그린 「성시전도」를 보고 시를 지어 바치게 하였다33)고 한다. 박제가도 시를 지어 당시 도성안 풍경과 사람들의 생활을 자세히 묘사하였다고 한다. 정조와 신하들이 본 성시도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성시도(城市圖, <그림 6>, 18세기 추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자 점원들이 판매를 하는 옷가게의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한경지략(漢京識略)』에는 옷가게인 의전(衣廛)34)이 기록되어 있다. 순조대 당시에는 각종 옷을 판매하는 가게가 한양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박지원이 안의 현감으로 있을 때(1792)는 겸인(傔人)에게 염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돈을 벌게 하였다. 기름 먹인 종이에 무늬를 새겨서 면포 위에 펼쳐 안료와 잿물로 인탑염색(印榻染色)을 하여 금군의 갑옷에 사용하였더니 무늬와 채색이 비단과 다름없었고 오히려 더 견고하고 질기며 비용도 저렴하였다고 한다. 이후 혼가(婚家)의 복식에도 많이 써서 그 사람이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다고 하니 옷감을 염색 등으로 가공하여 돈을 버는 방법에도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註) 1) 박수밀, 『18세기 조선지식인의 문화의식』,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1,p.87.
* 이 글은 2007년 12월 13~14일 성균관대학교 6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실학컨퍼런스―실학시대의 농업, 과학, 기술>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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