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해치는 해태와 어떻게 다른가? 사헌부 관헌들이 쓰는 ‘해치관’이나 해치 흉배의 관복이름 등
관청에서는 ‘해치’로 불렀으나,
일반인은 ‘해태’로 부르는 것을 선호하였다.
치(豸)는 중국음으로 ‘치’와 ‘대’로 읽히는데
한국에서는 문헌적이고 학문적인 측면에서는 '치'로 읽고,
생활속에서는 '태'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해태의 원어가 '해치'로 되어 있다.
Q) 서울과 해치와의 관계? 경복궁 근정전에 해치석상이 있고
조선시대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해치상을 세웠다.
정의의 상징인 해치가 관원의 기강을 확립하고
정치의 시비를 올바로 가리라는 의미를 담았으며,
재앙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세우기도 하였다. 또, 조선의 수도 한양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물가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해치를 세우기도 하여
서울과의 연관이 깊다.
또한 해치는 경기도 홍릉과 유릉을 제외한 다른 지방에는 거의 없고,
서울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Q) 해치가 지배층 문화의 상징 아닌지? 해치가 궁궐 입구만 지킨 것이 아니고,
환구단, 만세루, 도로, 민가 등 서울의 곳곳에서 다양한 형상이 있었다.
민간의 벽사용으로 부엌문에도 해치 그림을 붙이기도 하였으며,
사찰장식, 편종 받침 등에도 다양한 해치가 등장한다. 따라서 궁중 및 지배계층의 문화 상징으로 보기 어렵고,
유교적 윤리의 실천과 민간 신앙 속에서 탄생된
친근하고 부드러우며 대중 친화적인 상징으로 볼 수 있다.
Q) 지금도 해치를 볼 수 있나? 해방 후 국회의사당, 국방부 신청사, 대학본부, 대검찰청,
도심 빌딩 앞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사랑받고 있으며,
남태령 등의 서울 관문에 해치를 배치하여
서울의 수호자 역할을 현재까지 이어오며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Q) 해치는 중국과 일본에도 있는 것 같은데…? 중국과 일본의 해치는
이미지와 역할에서 우리나라의 해치와 많이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해치는 사납고 강한 맹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고,
시민 생활속에서 친근한 우리나라의 해치처럼
궁궐의 정문을 지키는 수호자와 같은
적극적이고 다양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해치는 조선의 궁궐은 물론 서울 곳곳에 분포되어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