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입상 (石窟庵 十一面觀音菩薩立像)

Gijuzzang Dream 2008. 5. 6. 21:35

 

 

 

 

 

 석굴암 십일면관음보살입상 (十一面觀音菩薩立像)

 

 

 

자비로운듯 냉랭한듯한 눈 우아하고 고고한 자태 뭇 사람의 넋을 빼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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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윽한 산사의 새벽, 온 머리에 열한개의 또다른 얼굴을 인 관세음보살은 온몸이 검붉게 빛났다.

연꽃잎 에워싼 받침대 위에 2m 넘는 신장을 곧추 세운 그의 똑 부러진 눈매를 올려 보는 순간

절로 다리 힘이 풀린다. 소녀 같은 몸매를 수놓은 온갖 장신구도 일순 보이지 않았다.

냉기와 온기, 환희, 애조를 함께 녹인 관세음의 눈, 괴기스러운 머리의 작은 얼굴들은

그 자체로 대자대비의 화엄 세상이었다.

 

전통 조각사에서 최고의 보물인 경주 토함산 석굴암 답사의 백미는

단연 본존불과 더불어 십일면관음보살상이다.

미술사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친견한 답사객들에게 변치 않는 '신라의 연인'으로 자리 잡은

이 보살상은 동양 미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조각'으로 손꼽는다.

주실의 중앙부 본존상 바로 뒤에 한 몸처럼 직선상으로 놓여

평소 바깥 유리벽에서는 볼 수 없기에 신비로운 감흥은 각별하다.

 

 

 

잘록한 허리에 가녀린 천의를 걸치고 오른손으로 옷의 영락을 살짝 들어 올려 상큼한 악센트를 주었다.

왼손에 감로수 담긴 정병을 든 우아하고 고고한 몸체. 세 겹의 목걸이와 가슴,

배를 가르는 구슬띠와 고리 장식, 팔찌, 발찌 등의 기기묘묘한 장신구 조각들은

보는 이를 황홀경에 몰아넣는다.

중생들 애원성을 듣고 바다 같은 자비심으로 고통을 구제하는 보살이니

후대인들이나 그 팍팍한 화강암 면에 공들여 돋을새김을 한 신라 석공의 마음이나 매한가지일 터다.

 

십일면관음상은 8세기 통일신라 때 조각이나 석굴암이 20세기 초 세상에 알려진 까닭에,

여느 유산과 달리 묵향의 기록들은 근현대기 문인들 자취로 넘쳐난다.

 

1920년대 석굴암 십일면관음상을 답사했던 소설가 현진건의 <불국사 기행>을 보자.

 

“… 십일면관음보살은 더할 나위 없는 여성미와 육체미까지 나타내었다.

… 수없이 늘인 구슬 밑에 하늘하늘하는 옷자락은 서양 여자의 야회복을 생각나게 한다.

이 아른아른 옷자락 밑으로 알맞게 볼록한 젖가슴,

좁은 듯하면서도 슬밋한 허리를 대어 둥그스름하게 떠오른 허벅지,

토실토실한 종아리가 뚜렷이 드러났다.

그는 살아 움직인다! 그의 몸엔 분명히 맥이 뛰고 피가 흐른다 …”

 

현진건은 상의 육체미에 다분히 탐닉했던 모양이다.

‘팔뚝을 만지고, 손을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지며 어린 듯 취한 듯,

언제까지고 차마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고 덧붙이고 있다.

 

시조집 <백팔번뇌>를 남긴 최남선을 비롯해

춘원 이광수, 청마 유치환, 동탁 조지훈, 미당 서정주, 한운사 등 숱한 시인, 작가들도

본존불에 가려진 미의 여신을 글로 찬양했다. 특히 불자인 박희진 시인의 <관세음상에게>

겸허하게 여문 시심과 깊은 투시안이 느껴지는 명시로 삼을 만하다.

 

“… 당신 앞에선 말을 잃습니다.

미(美)란 사람을 절망케 하는 것

이제 마음 놓고 죽어 가는 사람처럼

절로 쉬어지는 한숨이 있을 따름입니다 …

어느 명공의 솜씨인고 하는 건 통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만 어리석게 허나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은

저도 그처럼 당신을 기리는 단 한 편의 완미한 시를 쓰고 싶은 것입니다 …

하찮은 이름 석 자를 붙이기엔 너무도 아득하게 영묘한 시를”

 

 

1909년 석굴암의 존재가 알려지자 이 관음상도 적지 않은 아픔을 겪었다.

이구열씨의 <한국문화재 수난사>를 보면

한일병합 직전 실권자였던 일본 소네 통감이 방문한 뒤

관음상 앞에서 천년이상 동고동락 했던 정교한 석조 5층소탑이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훔친 이가 소네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금도 일본 어디엔가 숨어있을 이 소탑의 귀환을 자비의 관음상은 간절히 빌고 있을 것이다.

 

관음상 머리에 있는 11개의 얼굴상도 조선총독부 자료인 <석굴암과 불국사>를 보면

꼭지면과 왼쪽의 두 얼굴이 없어졌다고 나온다.

  

십일면관음보살 - 1930년대 도난초기

 

석굴암의 상설(像設)은 그 뛰어난 조각으로 말미암아 석굴암의 신비를 한 층 높이고 있는 걸작이다.

그 중 본존상 뒤에 있는 11면 관음보살입상은 신라와 고려를 통틀어 이와 같은 종류가 거의 없다는

 희소성에서도 의미 있는 작품이다.

11면이라는 것은 본체 얼굴에 10위의 다른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서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지금 이 관음입상을 자세히 살피면

머리 위 보관에 새겨져 있는 보살상 가운데 1위가 떨어져 나가 없는 것은 알 수 있다.

석굴암 내 대리석 5층탑과 마찬가지로 1909년 무렵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반출 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직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

 

십일면관음보살 (머리부분) - 현재

 

현재 전해지는 관음상 머리의 여러 얼굴들과 꼭지의 불좌상은

후대 일본인들과 문화재관리국에서 보수한 것이다.

하지만 <십일면신주심경> <불설십일면관음신주경> 등에 보면

십일면관음상의 정수리에 불상 머리를 놓는다고 되어있어 복원이 잘못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새벽 예불을 나온 곱사등이 할머니는 십일면관세음상 옆에서 '보살님, 보살님'만 되뇌며 거푸 절을 했다.

앞서 예불하던 스님은 관세음상이 숨은 본존불 앞에서 '수능고득점, 고시 · 사시 합격'을 축원했다.

세속의 욕망과 천상 관세음의 장엄한 미소가 갈마드는 한순간들,

영영 바라만 보았던 짝사랑의 추억 같은 애잔함을 안고 석굴암 주실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볕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서정주, <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 )

 

- 노형석 기자 ⓒ 한겨레(http://www.hani.co.kr)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 (40)]

- 사진 : <토함산 석굴> (문명대 지음, 한언 펴냄)에서

 

 

 

 

  

높이 218cm.

석굴암 석굴의 본존불(本尊佛) 뒷면 원벽(圓壁)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벽면의 다른 像들은 모두 측면상(側面像)인데 이 像만 유독 정면상이다.

머리 둘레와 정상에 10구의 불두(佛頭)를 새기고, 정면에는 화불입상(化佛立像)을 배치했다.

우아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면서 본존(本尊)의 원력(願力)을 돕고 있는 듯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석굴암에서 십일면관음보살상은 원형 주실 안의 거대한 본존불상 바로 뒤쪽에 감추어진 듯이 새겨져 있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관음상은 석굴암에서 본존상 다음으로 상찬되어 왔으며,

배치상의 독특함과 그 풍부한 종교적 상징성으로 인하여 석굴암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상으로 여겨진다.

 

십일면의 얼굴을 가진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기이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음상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제한된 공간에 이와 같은 11면의 얼굴을 무리 없이 배치한 점,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자비로운 얼굴표정의 구현,

적절한 신체 비례의 표현과 만져질 듯 섬세한 영락(瓔珞)장식의 새김 등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은 우수한 조형성과 완벽에 가까운 조각기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왼손에 꽃이 꽂힌 정병을 들고

오른손은 내려서 몸에 두른 긴 구슬줄의 일부를 살짝 잡은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에 얹혀진 11면의 배치를 살펴보면 이마 바로 위에 화불(化佛) 입상이 있고,

그 양쪽에 각각 3개씩의 보살 얼굴이 새겨져 있다.

그 윗단으로는 다시 3개의 보살얼굴이,

다시 맨 꼭대기에는 한 구의 여래좌상(일제강점기 이후 보수)이 위치한다.

 

통일신라와 같은 시기인 唐 및 나라(奈良)시대의 일본에서 환조로 제작된 십일면관음상들 중에는

뒤통수에도 보살얼굴이 하나 더 새겨져 있어서 완전한 11면을 이루는 것들이 있다.

이와 달리 석굴암의 상은 부조라는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뒤통수에 새길 수 없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예로 보아 석굴암 관음상의 정수리에는

지금과 같은 여래좌상이 아니라 본래 부처 또는 보살의 얼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후대의 보수가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唐의 혜소(慧沼)가 714년에 쓴「심일면신주심경의소」라는 주석서에 따르면

11면 중 윗단 자비상 3은 착한 사람을 칭찬하는 것이고,

아랫단 왼쪽의 분노상 3은 악한 사람을 제도하는 것이며,

오른쪽의 치아를 드러낸 상 3은 정진하는 이들에 대한 격려를 나타낸다고 한다. 

뒤통수에서 크게 웃는 폭소상 1는 이러한 온갖 종류의 사람의 모습을 집약함으로써

넓은 아량으로 포용하는 것이고, 마지막 정수리의 부처상은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