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굴욕과 수난

Gijuzzang Dream 2008. 5. 6. 21:34

 

 

 

 

 

 삼전도비[三田渡碑]의 굴욕과 수난 

   

 

 

 

  

1639년(인조 17)에 한강의 상류인 삼전도1(지금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청(淸)태종의 공덕비. 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2이 짓고, 글씨는 서예가로 이름 높던 오준(吳竣)3이 해서로 썼고,

전자(篆字)로 된 '대청황제공덕비' 라는 제액은 여이징(呂爾徵)4이 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또한 비 머리의 이수(螭首), 받침돌의 귀부(龜趺) 조각도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가장 우수한 조각의 하나로 꼽힌다.

 

 

■ 비석이 세워지게 된 배경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조선에 대해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만주족)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기회로 누르하치의 영도 아래 급속히 세력을 확장,

숙원이던 부족 통합에 성공하고 후금〈(後金), 뒤에 청(淸)으로 고침〉을 건국하였다.

 

광해군 11년(1619)에 조선정부는 명의 군사동원 요청에 따라 병력을 만주 지방으로 파견,

후금의 군대와 사루 후 전투에서 대치했다가 곧바로 투항한 적이 있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뒤 조선과 후금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어

인조 5년(1627)에는 후금의 군대가 조선에 쳐들어온 일이 있었다〈정묘호란(丁卯胡亂)〉.

 

조선이 청과 화약(和約)을 맺은 뒤에도 양국 관계는 원만하게 진전되지 못했는데,

1632년 드디어 후금은 만주 전역을 차지하고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관계(임금과 신하의 관계)로 고칠 것과

황금ㆍ백금 1만 냥, 전마(戰馬 : 전투에 쓰일 말) 3,000필과 군사 3만명 등을 요구하였다.

 

1636년 2월에는 후금의 사신 용골대ㆍ마부태 등이 조선을 찾아와

조선의 신사(臣事 : 신하의 도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계속 후금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대하였다.

이 해 12월 청의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왔다〈병자호란(丙子胡亂)〉.

 

청나라 군대의 침공을 까마득히 몰랐던 조선은

청나라 선봉부대가 개성을 지날 때쯤인 13일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14일 밤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인조는 소현세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12월 16일부터 청나라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당시 남한산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를 지탱할 수 있는 식량밖에 없는데다가

봉림대군(인조의 둘째아들)이 피해있던 강화도마저 이듬해 1월 하순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또한 비축한 식량도 바닥이 나자 50여 일간의 농성 끝에

부득이 1월 30일 청의 군영이 있는 한강가의 나루터인 삼전도(三田渡)에 나아가

수항단(受降壇)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 : 항복의 의식, 당시 인조는 청 태종에게

9번 큰절을 하였다)로 청과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병자호란이 수습된 뒤 청의 태종은

조선정부에 대해 삼전도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장유(張維)ㆍ조희일(趙希逸) 등이 지은 글을 청에 보냈지만

모두 그들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번번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인조의 특명으로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글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비석에 새기도록 했다.

이에 따라 공조에서는 삼전도의 제단터에 제단을 높고 크게 증축한 다음 비석을 세웠다.

 

이처럼 삼전도비는 비록 조선이 청에 대해 항복하게 된 경위와 더불어

청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예찬한 굴욕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으나,

한편 비석 표면의 왼쪽에는 몽고 문자 20행, 오른쪽에는 만주 문자 20행,

뒤쪽에는 '해서체'의 한문으로 쓰여 있어 만주어 및 몽고어 연구의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한편 인조가 삼전도비의 비문과 글씨를 쓸 신하들을 뽑으면 그 자리에서 다들 사직을 했고

결국 나라를 위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이경석과 오준' 은 죽어서도 두고두고 신하들의 탄핵을 받았다

 

 

■ 병자호란 당시 조선과 청나라가 맺었던 강화조약의 내용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ㆍ책인(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의 세자와 둘째왕자인 봉림대군, 그리고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 중국황제의 생일)ㆍ정조(正朝)ㆍ동지(冬至)ㆍ천추(千秋: 중국 황후ㆍ황태자의 생일)ㆍ

    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를 따라 청나라에 시행할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 공물)를 보낼 것 등.

 

 

삼전도비 번역 전문

 

 

대청국 성황제의 공덕비

 

대청국 숭덕 원년(1636년) 겨울 12월에

 

어질고 너그럽고 그리고 온화한 성황제는 화평을 깬 것이 우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크게 성을 내어 위엄있는 군사를 이끌고 내림(來臨)하여 동녘을 향하여 불붙듯이 진군하니

아무도 두려워서 대항하지 못했다. 그때에 우리의 임금은 남한에 자리를 정하고 두렵고 겁이 나서

봄얼음을 밟고 날밝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지내기를 50일,

동남 제도의 우리 군사들은 속속 격파되었고 서북방의 장군들은 산골짝에 피해서 멀리 후퇴한 뒤에

한 걸음도 앞으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성내의 양곡도 모두 떨어졌다.

그때 청의 대군이 성을 탈취하기란 찬바람에 가을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일처럼,

화염에 깃털을 태우는 일처럼 쉬운 일이었다. 성황제는 살생하지 않는 것을 가장 큰 덕으로 여겨

전유(傳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 여겨, 황지(皇旨)를 내려 깨우치기를,

"항복해 오는 경우에는 옛처럼 온전케 할 것이나 항복하지 않으면 파멸시키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영아이대, 마복탑 등 여러 장군들이 성황제의 황지를 받들고 전하고자 찾아오매

우리의 임금은 문무 여러 대신을 소집하여 이르기를,

"내가 대국을 향하여 화친을 맺은 지 10년이 되었다. 내가 무지하고 어두워 하늘의 정벌을 서두르게 하여

만백성이 우환에 봉착하고 말았다. 이 죄는 내 일신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성황제는 차마 살생치 못하여 이와 같이 깨우쳐 주시니 내 어찌 감히 사직을 온전케 하고

백성을 보호할 황지를 받들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칭양(稱揚)하며 복종하니 임금은 수십 기를 이끌고 청군 앞으로 와 죄를 받으려 했다.

 

성황제는 예를 갖추고 인자하게 대하며 은혜를 베푸사 무양(撫養)하며,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했다.

수행한 대신들 모두에게 은혜로운 상이 돌아갔다.

예를 행한 뒤 즉시 우리의 임금을 도성으로 되돌아가게 하고 즉시 남쪽으로 떠났던 군사들을 철수시켜

서쪽으로 물러나며 백성들을 무양하고 농사를 권장하니

가깝고 멀리 떠나갔던 백성들이 모두 돌아와 다시 살게 되었다 이 아니 큰 은혜인가?

 

소국(우리나라)이 상국에 죄 지은 지 오래이다.

기미년(광해군 11년, 1627년)에 도원수 강홍립을 명나라에 원군으로 파견하였다가 격파되어 나포되었으나

청 태조 무황제는 다만 강홍립 등 몇 사람만 억류하고 모두 되돌려 보냈다.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음에도 소국은 다시 혼미해져 깨달음을 얻지 못한 탓에

정묘년(1627년)에 성황제가 장군을 파견하여 동쪽 땅을 정벌하러 왔다.

우리나라는 임금과 대신이 모두 바다에 있는 섬으로 피하여 들어가고 사신을 보내 화친하자고 칭했다.

성황제는 이 청언을 받아들여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고 강토를 옛처럼 온전케 해주었다.

더하여 강홍립을 돌려보내주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예를 행함에 소홀함이 없이 사신을 끊임없이 파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경솔한 의논이 일어나 분규의 조짐이 싹터 소국은 변방의 대관에게 청국에 대한

불손한 글을 써서 보냈다. 이 글이 청에서 조선으로 온 사신들이 입수하여 가지고 갔다.

성황제는 그럼에도 관대하게 그 글을 보고 바로 군사를 보내지 않았으며 밝은 성지를 내려

출병할 시기를 알려주면서 거듭하여 일깨워주었다. 이는 귀를 잡고 가르쳐주는 것보다 더한 것이었으나

우리는 기꺼이 복종하지 않았으니, 그 죄는 소국의 대신들이 더욱 면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성황제의 대군은 남한을 포위하고 또 황지를 내려,

먼저 일단의 군사를 보내 강화도를 탈취하고 왕자들과 왕비, 대신들의 처자를 모두 나포하였다.

 

성황제는 여러 장군들에게 "범하지 말라, 침해하지 말라"고 계고(戒告)하고,

우리의 관원들과 대감들을 시켜 그들을 간수케 했다. 그와 같은 큰 은혜를 베풀었기에

소국의 군주, 대신, 나포되었던 아이들, 부인들이 모두 전 그대로 복귀하니

서리와 눈이 변하여 봄이 된 것만 같고 메마른 가뭄이 끝나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소국이 멸망했던 것을 다시 고쳐 존속하게 되고 조상의 사직이 단절 되었던 것이 다시 승계되었다.

동쪽 땅 수천리의 사람이 모두 살아나는 큰 은혜를 두루 입었다.

이러한 일은 진실로 옛날의 법례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수(한강)의 상류 삼전도의 남쪽이 곧 성황제가 내림했던 곳이다. 그곳에 단위(壇位)가 있다.

우리의 임금은 역사부(役事部)의 사람에게 일러 단위를 늘리고 높여 확장시키고

또 돌을 가져와 비를 세워서 영구히 존속케 하며 성황제의 공덕을 천지와 함께 하고 싶노라고 공표하였다.

이것은 우리 소국만이 대대손손 영구히 신뢰하고 살아가는 것뿐만 아니라

대국의 어진 명성과 무위(武威)의 행지(行止)를 먼 곳으로부터 떠받들어 모두가 복종하는 것도 또한

이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비록 하늘과 땅의 거대함을 글로 짓고, 해와 달의 밝음을 그렸다 해도

그 공덕의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조잡하게나마 지은 것을 새겨 공표하는 것이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황량하게 하기도 하고 살아나게 하기도 한다.

성황제 또한 이를 본받아 무와 덕을 함께 고루 전령(傳令)한다.

 

성황제가 동쪽 땅을 정벌한 십만 군사는 그 수가 장대히 많고 호랑이와 비휴(맹수)처럼 용맹스러웠다.

서북국들이 모두 병기를 손에 잡고 선봉을 다투니 그 위세가 매우 두려웠다.

성황제가 매우 인자하여 가련히 여겨 내린 칙언과 십행의 하서(下書)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부드러웠다.

우리는 본디 혼미하여 그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화를 입었다.

 

 

 

항복을 받는 청태종 모습의 부조

 

성황제의 명지가 도착하니 잠을 자다가 막 깨어난 듯하였다.

우리의 임금이 항복을 택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한 때문만이 아니라, 그 덕에 복종한 것이다.

성황제가 어엿비 여겨 은혜를 미치게 하며, 예를 갖추고 좋은 낯, 웃는 얼굴로 병기를 거두고

훌륭한 말과 가죽으로 만든 예복을 상으로 내릴 때 성의 남녀가 노래하며 칭송한 것과

우리의 임금이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성황제가 내린 은혜이다.

 

성황제는 우리의 백성을 살리고자 군사를 철수시켰다.

우리가 문란하게 되고 산산이 흩어진 것을 가련히 여겨 농사를 권장해 주었다.

패하여 부서진 이 나라가 옛 그대로 돌아온 것이, 바로 이 단을 세우게 된 까닭이다.

마른 뼈에 다시 살이 생겨나고 겨울 풀의 뿌리가 다시 봄을 만난 것처럼 되었다.

큰 강머리에 큰 비석을 세우니,

삼한의 땅이 만세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는 모두 성황제의 어진 덕에 의한 것이다.

 

숭덕 4년(1639년) 12월 초8일에 세우는 바이다.

 

 

 

■ 삼전도비(三田渡碑)의 수난5

 

이 비석은 청일전쟁까지 세워져 있다가 청일전쟁 후 청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사대의 상징이라 하여 영은문(迎恩門)이 지체없이 헐어낸 것처럼

이른바 청태종의 공덕비 역시 그 무렵에 치욕스럽다하여 고종 32년(1895)에 뒤로 넘어졌던 것이다.

혹자는 이때에 비석을 땅에 파묻었다고 적어놓은 자료들이 간간이 보이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그러했다는 흔적은 없다.6(탁지부건축소, 1909)에 남겨놓은 사진자료를 보면, 삼전도비가 있던 주위에 민가들이 들어찼긴 했지만 그 사이로 귀부가 그대로 보이고 비신만 넘어간 상태였다는 점에서 \"비석을 매몰… 운운\"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진다.(오마이뉴스. 이순우. 2004-04-10) '>

 

1909년 가을에 이곳을 탐방했던 동경제국대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한홍엽(韓紅葉>(탁지부건축소, 1909)에 남겨놓은 사진자료를 보면,

삼전도비가 있던 주위에 민가들이 들어찼긴 했지만 그 사이로 귀부가 그대로 보이고

비신만 넘어간 상태였다는 점에서 "비석을 매몰… 운운"은 사실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1909년 가을에 동경제국대학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교수가 보았던 삼전도비의 모습이

<한홍엽(한홍엽, 탁지부건축소, 1909)>에 수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그저 넘어져 있었을 뿐

흔히 잘못 알려진 것처럼 매몰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삼전도 비석을 결국 다시 세운 것은 조선총독부였다.

이에 관해서도 분명한 기록 하나가 남아 있다.

야츠이 세이이치(谷井濟一) 등이 정리한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외교사상 중대한 일등 사료이며, 조선에 다시없는 만몽문(滿蒙文)을 새긴 비석인데,

나아가 조선시대 중기에 있어서 석비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원히 보존의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중략) 명치 27,8년 전역(즉 청일전쟁) 후에 넘어졌고,

1909년 세키노 박사가 조사할 제에는 더욱이 민가의 담장 안에 드러누워 뒤집어져 있었으나

근년에 본부(本府)에서 수립보존의 의논이 점차 무르익어 대정 6년 즉 1917년 9월,

때마침 본관들이 송파리(松坡里)에 머물던 중 영선과원(營繕課員)의 손으로 수립(竪立)이 완료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9월에 청일전쟁 이후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구태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이러한 보호정책은

이 비석을 조선의 보물로 지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이에 앞서 영은문이 있던 자리에 지어 올린 독립문의 존재를 기꺼이 용인한 것 또한 그네들이었으니,

진작에 조선정부가 일부러 넘어트린 삼전도비를 조선총독부가 구태여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까닭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차한 설명을 달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나아가 1916년에 '고적급유물보존규칙'이 제정되자마자 그 등록대장의 첫머리에 삼전도비를

'등록번호 제11호'로 등재하여 적극적인 보호대상으로 삼았고,

다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에 따라 조선의 숱한 고적유물들이 이른바 '보물'로 잇달아

지정이 되었을 때 이 삼전도비가 보물 제164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1935년 5월 24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소재지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187번지였다.

말하자면 이곳은 인조 임금이 청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던 수항단이 세워졌던 자리라고 보면 되겠다.

그 사이에 을축년 대홍수로 인해 인근의 송파마을은 거의 사라졌으나,

삼전도비만은 황량하나마 원래의 자리를 지켰다.
 

<속경성사화>(1938년)에 수록된 '경성부근명승사적안내도'에는

청태종공덕비의 위치가 잘 표시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삼전도비의 원위치는

지금의 석촌호수 언저리였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삼전도비의 처지는 청일전쟁 직후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수치의 역사였고,

그러기에 이 비석의 존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참으로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55년 11월 4일에 개최된 '국보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제2차 총회에서는

"내무부 치안국장의 요청에 의하여 국보 제164호로 지정되었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치욕의 역사물이란 이유로 지정 해제되어 땅속에 매몰되게 되었다"는 결정이 내려졌던 것으로 확인된다.
   

1960년에 발간된 <지정문화재목록>에는

삼전도 청태종공덕비가 국보에서 지정 해제되고,

대신에 그 자리가 고적 147호로 지정된 상황이 표기되어 있다.

 

 

이 무렵에는 진작에 매몰 처리된 삼전도비가 홍수로 인해 다시 그 존재를 드러낸 때였다.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도 달가울 리 없었던 비석 하나는 세상에 태어난 지 320여년만에

그렇게 땅속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위의 결정이 지체없이 시행에 옮겨졌는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어떤 기록에는 1956년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1958년 봄에 부근의 지하 7척 깊이에 매몰하였다"고 적어놓은 내용도 보인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삼전도비는 즉각 국보 지정에서 해제되었고,

그 대신에 비석이 서있던 자리가 1957년 2월 1일자로 고적 제147호 '삼전도 청태종공덕비지'라는

이름을 새로이 얻는 절차가 이어졌고,

그 후 1962년의 문화재보호법 제정과 더불어 이 명칭은 다시 '사적 제101호'로 재분류되었다. 

그러나 애써 땅속에 파묻었던 비석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다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우연찮게도 비석을 매몰하던 그 무렵에 한강에 대홍수가 밀려들었고,

그로 인해 삼전도비는 금세 원래의 모습을 보였다.

 

<고고미술> 1960년 8월호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후 홍수에 의한 하안유실로 인해 비신, 귀부가 모두 수중으로 전락하였으며

이대로 두면 강저(江底)에 매몰되어 버릴 위험이 뚜렷하므로 문교부에서는 시급히 이를 인양하여

석촌리의 고지에 이건할 계획이다. 그런데 비신의 무게만 약 15톤, 귀부의 무게가 25톤이나 되고

현위치의 지반이 매우 약하고 함몰되기 쉽기 때문에 그 공사는 여러 가지로 난공사가 되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처럼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삼전도비가 지금의 모습처럼 정비된 것은 198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남한산성을 순시하던 차,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태종에게 패하여 항복한 굴욕의 사실을 복원하여

굴욕의 역사 속에서도 교훈을 찾도록 하라"고 했다는 대통령의 지시내용에 충실히 한 결과이다.

 

삼전도비가 놓여 있는 석촌동의 역사공원이다.

삼전도비는 앞면이 만주어와 몽고어, 뒷면이 한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뒷면에 이경석의 이름이 새겨진 부분은 지워져 있다.

ⓒ2004 이순우

 

 

 

그 동안 사용되어 왔던 '삼전도 청태종공덕비'라는 것이 과분하다 하여

'삼전도비'로 이름을 바로 잡은 것도 1981년 7월 10일의 일이었다.

그리고 송파구 삼전동 289-3번지에 조성된 역사공원에 삼전도비가 자리를 잡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시기가 명확하게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고증되지 않고 있으나,

1984년 7월 13일에 고시된 문화재보호구역 지정내역에 지금의 공원자리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고 있어

그 시기를 얼추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삼전도비 옆에 있는 또 다른 돌거북의 정체

 

ⓒ이순우

 

송파 석촌동의 역사공원 구역에 옮겨진 삼전도 비석의 바로 옆에는 비록 비신을 갖추지는 못했으나

약간 작은 크기의 돌거북 하나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이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원래의 삼전도비와 무관하다고 설명하는 견해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적어놓은 기록도 있다. 하지만 한눈에 보더라도 그 크기만 약간 다를 뿐

세부적인 표현양식이나 조각수법이 거의 흡사하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삼전도비의 조성과 관련된 문헌상의 기록에 비춰 보더라도

여러 차례 석물(石物)이 준비되었다던가 조성계획이 때때로 변경된 흔적이 확연하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잔여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龜趺)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이 아닌가도 싶다.

 

실제로 이 돌거북의 존재에 대해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출한 <대정5년도 고적조사보고>에서는

위와 같은 취지의 설명문을 달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경성전기에서 발행한 '경성하이킹 코스 제3집' <풍납리토성> (1937년)에도

작은 귀부가 삼전도비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적고 있는 것이 보인다. 

다만 여기에는

"부락민의 말로는 1925년 홍수에, 혹은 그 이전에 작은 귀부에 있던 비신이 행방불명된 바 있다"는

증언을 덧붙이고 있으나, 그다지 신빙성 있는 얘기로 들리지는 않는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 책에는 '삼전도비와 10여 발짝 떨어진 곳에 놓여진 작은 돌거북'의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것을 참고할 만하다고 하겠다.

- 이순우, 일그러진 근대역사의 흔적

 

 

 

현실 택한 최명길ㆍ명분 지킨 김상헌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풀릴 줄 모르건만 내 마음은 고리 같아도 소신을 따랐노라”(최명길)

“조용히 찾아보니 이승과 저승이 반가운데 문득 백년의 의심이 풀리도다”(김상헌)

 

전쟁이 끝난 뒤 명나라와 내통한 죄로 청나라에 끌려간 최명길과 역시 옥에 갇혀 있던 김상헌은

나중에 모든 오해를 풀고 이 같은 즉흥시를 나눴다.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건 물론 병자호란이었다.

오랑캐로 치부됐던 청의 황제는 이미 한족ㆍ몽골족ㆍ만주족 등의 추대를 받은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조선만이 복속되지 않았다.

그런 청이 1636년 12월 조선을 침략했지만

인조는 청나라 군대의 선봉대가 개성을 지날 때가 돼서야 피란을 결심하게 된다.

 

최명길은 시간을 벌기 위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적에게 술과 고기를 대접하여 출병의 이유를 묻는 등 시간을 버는 사이 인조는 도성을 빠져나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텼지만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끝내 최명길의 주화론이 이기게 된다.

 

1637년 1월18일 최명길이 청 황제 태종에게 ‘신(臣)’을 칭하는 항복문서를 만들자

김상헌이 들어와 통곡하면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최명길은 빙긋 웃으면서 다시 그 문서를 주워 이어 붙였다.

결국 최명길은 한번 굽힘으로써 종묘와 사직을 지켰고, 김상헌은 절개를 지킴으로써

조선후기 사회의 질서를 300년간이나 더 유지시켰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자, 현실론을 택한 최명길이냐, 명분론의 김상헌이냐.

“가노라 삼각산아”로 상징되는 김상헌의 절개가 돋보이기도 하고

두 분 다 나라를 생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양시론도 설득력을 갖는다.

또한 자기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결국 종묘와 사직을 구한 최명길을 두고

“최명길은 바르고 옳았다. 김상헌은 다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조선 후기 지배층의 테두리 안에서”

(오수창 한림대 교수)라고 높이 평가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 경향신문.[한국사 미스터리]2003-06-09

 

 

 

 

■ '대청황제 공덕비'에 얽힌 이야기

 

'삼전도비'라 불리는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2년 후인

1639년(인조 17)에 청나라의 강요에 따라 건립한 것으로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出兵)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회군(回軍)한 사실 등을 담고 있다.

 

삼전도비와 관련하여 사실처럼 믿어지는 얘기 하나가 전해오고 있는데

인조가 청태종을 앞에 두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의 예를 행할 때 피가 나지 않는다며

청장 용골대가 인조를 핍박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하는 수 없이 이마에서 피가 날 때까지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기에

인조와 배석한 신료들이 모두 피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두 힘없는 나라의 설움에 대해 원통해 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주장이 있다. <인조실록>을 비롯한 공식적인 기록 어디에도

이처럼 처절한 항복의식이 있었다는 내용은 없다는 것이다.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상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상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侍從)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상이 산에서 내려가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어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 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합니다.”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상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東西)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준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상이 단지 삼공 및 판서·승지 각 5인, 한림(翰林)ㆍ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ㆍ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상이 걸어서 진(陣)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상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자, 상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합니다.”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상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상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상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의 말로 상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은 남쪽을 향해 앉고 상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 온 제신(諸臣)은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龍、馬兩胡, 來城外, 趣上出城。 上着藍染衣, 乘白馬, 盡去儀仗, 率侍從五十餘人, 由西門出城, 王世子從焉。 百官落後者, 立於西門內, 搥胸哭踊。 上下山, 班荊而坐。 俄而, 淸兵被甲者數百騎馳來。 上曰: “此何爲者耶?” 都承旨李景稷對曰: “此似我國之所謂迎逢者也。” 良久, 龍胡等至。 上離坐迎之, 行再揖禮, 分東西而坐。 龍胡等致慰, 上答曰: “今日之事, 專恃皇帝之言與兩大人之宣力矣。” 龍胡曰: “今而後, 兩國爲一家, 有何憂哉? 日已晩矣, 請速去。” 遂馳馬前導。 上只率三公及判書、承旨各五人, 翰、注各一人, 世子率侍講院、翊衛司諸官, 隨詣三田渡。 望見, 汗張黃屋而坐, 甲冑而帶弓劍者, 爲方陣而擁立左右, 張樂鼓吹, 略倣華制。 上步至陣前, 龍胡等留上於陣門東。 龍胡入報, 出傳汗言曰: “前日之事, 欲言則長矣。 今能勇決而來, 深用喜幸。” 上答曰: “天恩罔極。” 龍胡等引入, 設席於壇下北面, 請上就席, 使淸人臚唱。 上行三拜九叩頭禮。 龍胡等引上由陣東門出, 更由東北隅而入, 使坐於壇東。 大君以下, 自江都被執而來, 列立於壇下少西矣。 龍胡以汗言, 請上登壇, 汗南面而坐, 上坐於東北隅西面, 而淸王子三人, 以次連坐, 王世子又坐其下, 竝西面。 又淸王子四人, 坐於西北隅東面, 二大君連坐於其下。 我國侍臣, 給席於壇下東隅, 江都被執諸臣, 入坐於壇下西隅, ....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庚午)

 

 

이것이 공식기록이다. 이를 근거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들과 같이 '과격한' 항복의식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실록이라 하더라도 사실이 이와 같았다면

역사적 치욕이 되는 국왕에 관한 이 모든 사항을 사진과 같이 정확하게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형식이 조금 다르고 온건해 '피가 흐르지 않았다'해서 '항복'이 '협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모양새가 어떠했든지 간에 인조는 오천년 우리 역사를 통틀어 나라가 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국의 왕에게 머리를 조아린 몇 안 되는 왕들 중 하나가 된다.

항복한 임금 인조에 대한 민초들의 동정심과 청에 대한 적개심이 더해져

사실이 조금 더 과장되었을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인지 비석은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을 조각한 이수(螭首)와 비문을 새긴 몸돌이

가지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석조예술품이자 금석문이라는 높은 평가와 더불어

3개국의 문자가 함께 기입된 유일한 비석으로서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 오마이뉴스. 이양훈 기자 2005-02-23

 

 

 

 

 

 

  1. 원래 한강상류지역인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의 이름이다. [본문으로]
  2. 이경석(李景奭) 〈1595(선조 28)∼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 종실 덕천군(德泉君)의 6대손이며, 동지중추부사 유간(惟侃)의 아들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1613년(광해군 5) 진사가 되고 1617년 증광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비상소에 가담하지 않아 삭적(削籍)되고 말았다.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이 있은 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시작으로 선비의 청직으로 일컫는 검열·봉교로 승진하였고 동시에 춘추관사관(春秋館史官)도 겸임하였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가 공주로 몽진을 하게 되자 승문원주서로 왕을 호종하여 조정의 신임을 두텁게 하였다. 이어 봉교ㆍ전적ㆍ예조좌랑ㆍ정언ㆍ교리 등을 두루 거친 뒤 1626년(인조 4)에는 호당(湖堂)에 선입(選入)되었다. 또한, 같은 해 말에는 이조좌랑·이조정랑에 올라 인사행정의 실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체찰사 장면(張晩)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강원도 군사모집과 군량미조달에 힘썼다. 이때에 쓴 〈격강원도사부부로서(檄江原道士夫父老書)〉는 특히 명문으로 칭송되었다. 정묘호란 후 다시 이조정랑 등을 거쳐 승지에 올라 인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629년 자청하여 양주목사로 나가 목민관으로서의 실적을 올렸다. 그뒤 승지를 거쳐 1632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대사간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대사헌·부제학에 연배되어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듬해 인조가 항복하고 산성을 나온 뒤에는 도승지에 발탁되고, 예문관제학을 겸임, 〈삼전도비문 三田渡碑文〉을 찬진하였다. 이듬해 문관으로서는 최대의 영예인 홍문관·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이 되었고, 얼마 뒤 이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에 발탁되어 조정인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1641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이사(貳師)가 되어 심양으로 가 현지에서 어려운 대청외교(對淸外交)를 풀어나갔다. 그러나 이듬해 엄금하던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들어온 일이 청나라에 알려지자, 그 사건의 전말을 사문(査問)하라는 청제(淸帝)의 명을 받고 서북지역으로 돌아왔으나 조선의 관련사실을 두둔하느라 청제의 노여움을 사 영부조용(永不調用)의 조건으로 귀국, 3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났다. 1644년에 복직,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한 뒤 이듬해 마침내 영의정에 올라 국정을 총리하였다. 그러나 1646년에 효종의 북벌계획이 이언표(李彦標) 등의 밀고로 청나라에 알려짐으로써 사문사건(査問事件)이 일어나게 되었다. 청나라의 사문사는 남별궁(南別宮)에서 영의정 이경석과 정승ㆍ판서 및 양사의 중신 등을 모두 세워놓고 북벌계획의 전말을 사문, 치죄하고자 하여 조정은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국왕을 비호하고 기타 관련자들까지 두둔하면서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림으로써 국왕과 조정의 위급을 면하게 하였다. 이에 청나라 사신들로부터 ‘대국을 기만한 죄’로 몰려 극형에 처하게 되었으나 국왕이 구명을 간청하여 겨우 목숨만을 부지, 청제의 명에 의하여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위리안치되고, 이어 다시 영부조용의 명을 받아 벼슬에서 물러나 1년 남짓 광주(廣州)의 판교(板橋)와 석문(石門)에서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53년(효종 4)에 겨우 풀려나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1659년에는 영돈녕부사가 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68년(현종 9) 인신(人臣)으로는 세기적 영예인 궤장(궤杖)을 하사받았다. 평생 《소학》과 《논어》를 거울삼아 수양하였고, 노년에는 《근사록》과 주자제서(朱子諸書)를 탐독하였다. 문장과 글씨에 특히 뛰어났는데 그의 시문은 경학(經學)에 근본한 것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문장은 “기력(氣力)이 웅혼(雄渾)하여 광화현란(光華絢爛)하며, 시도 활동양염(活動穰#염26)하다. ”는 칭송을 받을 만큼 필력이 뛰어나 〈삼전도비문〉 등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그의 정치적 생애는 17세기의 초기ㆍ중기에 해당하는 인조ㆍ효종ㆍ현종의 3대 50년에 걸쳐 시국의 안팎으로 얽힌 난국을 적절하게 주관한 명상(名相)으로 보냈다. 그 자신이 지양하려던 의도와는 달리 생애 말년에는 차츰 당쟁 속에 깊이 말려들어가, 사후에는 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백헌집》 등 유집 50여권이 간행되었고, 조경(趙絅)·조익(趙翼) 등과 함께 《장릉지장 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글로는 〈삼전도비문〉이 있으며, 글씨로는 좌상이정구비문(左相李廷龜碑文)ㆍ이판이명한비(吏判李明漢碑)ㆍ지돈녕정광성비문(知敦寧鄭廣成碑文)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남원의 방산서원(方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본문으로]
  3. 오준 〈1587(선조 20)∼1666(현종7)〉.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竹南). 이조참판 백령(百齡)의 아들이다. 1618년(광해군 10)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주서를 거쳐 지평·장령·필선·수찬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뒤인 1639년(인조 17) 한성부판윤으로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심양(瀋陽)에 다녀왔고, 그뒤 1643년 청나라 세조의 즉위에 즈음하여 등극부사(登極副使)로, 1648년에는 동지 겸 정조성절사(冬至兼正朝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650년(효종 1)에 예조판서로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대사헌·우빈객(右賓客) 등을 거쳐 1660년(현종 1) 좌참찬이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왕가의 길흉책문(吉凶冊文)과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공사(公私)의 비명을 썼다. 특히 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죽남당집》이 있으며, 글씨로 아산의 충무공이순신비(忠武公李舜臣碑), 구례의 화엄사벽암대사비(華嚴寺碧巖大師碑), 회양(淮陽)의 허백당명조대사비(虛白堂明照大師碑)·이판이현영묘비(吏判李顯英墓碑), 광주(光州)의 의창군광묘비(義昌君珖墓碑), 일본 닛코사(日光寺)의 닛코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안성(安城)의 대동균역만세불망비(大同均役萬世不忘碑), 죽산(竹山) 칠장사(七長寺)의 벽응대사비(碧應大師碑) 등의 비문이 있다. [본문으로]
  4. 여이징(呂爾徵) 〈1588(선조 21)∼1656(효종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구(子久), 호는 동강(東江). 아버지는 한성부우윤 유길(裕吉)이며, 어머니는 신씨(愼氏)로 현감 준경(俊慶)의 딸이다. 한백겸(韓百謙)의 문인이다. 1610년(광해군 2)생원이 되고 1616년 경안도찰방에 임명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양강(楊江)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심명세(沈命世)가 그에게 가담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사양하였는데, 반정이 성공한 뒤 인조는 그의 태도를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여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에 임명하였으나 사퇴하였다. 1624년(인조 2)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62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각각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전적을 거쳐 병조·예조참판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며, 청나라와의 화의가 성립된 뒤 이조참판을 거쳐 경기도관찰사·한성부좌윤·예조참판을 지내고, 1641년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뒤 부빈객(副賓客)ㆍ대사성ㆍ대사헌ㆍ강화부유수ㆍ부제학ㆍ도승지ㆍ공조참판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는 성리학에 밝았으며 선유(先儒)의 격언 20여조를 찬술하여 인조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많은 묘비명을 지었고 또한 천문·역산(曆算)·서화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 《동강집》이 있다. [본문으로]
  5. 오마이뉴스.. 「[역사추적] 넘어지고 다시 세우고 또 파묻기를 거듭하다 ‘삼전도비, 감출 수 없는 치욕의 역사’」내용요약. 이순우(기자. ‘데라우치 총독이 조선꽃이 된 사연’ 의 저자) 2004-04-10 [본문으로]
  6. '1909년 가을에 이곳을 탐방했던 동경제국대의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한홍엽(韓紅葉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