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활약

Gijuzzang Dream 2008. 5. 4. 20:05

 

 

 

 

 

 전세를 바꾼 의병들의 활약, 그러나...

 

 

 

신병주(중세사 2분과)


 

 

관군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국왕이 국경선 지역까지 피난 가는 치욕을 맛보는 수모를 당하는 가운데서도 조선을 지키려는 움직임들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바로 지방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의병을 조직하여 저항한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승리의 물꼬를 틀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의병의 항쟁과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의 승리였다.

의병은 자발적으로 봉기한 군사들로서

전직관료, 유생, 일반 백성, 노비, 승려까지 의병에 참여하면서

조선 최대 위기의 순간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1.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곽재우
  
임진왜란 직후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의 아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 도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에 삼도의 신하들은 모두 인심을 잃고 있었다.

때문에 왜란이 일어난 뒤에 병기와 군량을 독촉하니 백성들은 모두 질시하여

왜적을 만나면 피신하였다. 마침내 도내의 거족(巨族)으로 명망 있는 사림과 유생 등이

조정의 명을 받들어 의(義)를 부르짖고 일어나니,

소문을 들은 자는 격동하여 원근에서 응모하였다.

크게 성취하지는 못했으나 인심을 얻었으므로 국가의 명맥은 이에 힘입어 유지되었다.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 호서의 조헌이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다. 」  (『선조수정실록』 선조 25년 6월 1일)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관군이 패전을 거듭하고 조정의 신하들이 인심을 잃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지방의 명망 사족들은 백성들의 주축이 된 의병들을 조직하여 적극적인 저항에 나섰다.

이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곽재우(1552~1617)였다.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자신의 재산을 모두 털어 의병을 모집했다.

당시 그의 휘하에 모인 군사가 천 여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하니

평소에 그가 닦아 놓은 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郭越)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壯士)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을 취득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25년 6월 28일) 

 

 

40세가 넘은 나이에 의병운동을 하는 그를 보고

미친 사람이라거나 도적 노릇을 한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곽재우는 민첩한 첩보활동과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을 통해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면서

의령ㆍ삼가ㆍ합천 등을 수복하고 이어 현풍ㆍ창녕ㆍ영산의 왜군까지 섬멸하여

경상우도 지역을 평정하였다.

곽재우의 의병 활동은 왜란이 발발하자 전라도로 피신했다가

곽재우의 승리 이후 모습을 드러낸 경상 감사 김수의 모습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적지 않는 나이에 전 재산을 털어 항전에 나선 곽재우.

그는 위기의 시기에 사회 지도층이 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몸소 보여주었다.

최근 회자되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용어가 곽재우에게 무척이나 어울려 보인다.
 


(사진 1) 곽재우의 문집인 [망우당집]표지와 서문

 

 

 

2. 전세를 역전시킨 힘, 의병의 활약
  
의병들은 지역민들의 신임을 바탕으로

전란 초기 관군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한 빈자리를 충분히 메우면서

전세를 유리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인 수훈을 세웠다.

 

의병장들은 대분이 지역의 명망가로서, 이들을 따르는 농민과 천민이 자발적으로 합세함으로써

의병의 전투력은 향상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지역을 거점으로 게릴라전과 유격전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리에 어두운 왜적들을 후방에서 교란시키면서 이들을 격퇴하는데 선봉이 될 수 있었다.

 

의병에는 불법을 닦는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서산대사로 더 잘 알려진 휴정은 선조의 명을 받들어

팔도의 사찰에 격문을 보내 승병 결성을 독려하였다.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휴정의 제자 사명당 유정은 휴정의 격문을 받고

다시 사방에 글을 띄워 무리를 모아 평양에 도착하였는데 거의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승병들은 직접 전투에 참여하기보다는

경비나 무너진 성의 보수와 같은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전열이 흐트러지지 않아 여러 곳이 이들의 힘을 입었다.   
 
의병들은 관군과의 연합전도 전개하였다.

진주성 전투가 대표적으로 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에서는

진주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관군과, 곽재우, 최경회, 임계영의 의병 부대가 합류하여

왜적을 대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 또한 관군과 의병의 합작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적장을 껴안고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8,000 여명의 병력으로 3만의 왜적을 물리쳤다.

 

이외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 영규 등 승려들도 의병장이 되어 승군을 조직하여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승리에 크게 기여하였다. 

 

전국에서 의병의 봉기가 활발히 이루어진 것은

지방의 수령과 무장들의 무능에 대한 비판과 함께 ‘내 고장은 내가 지킨다’는

자발적 향토 방위 조직이 사림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국시로 채택된 성리학 이념의 충의 정신 또한 한 몫을 하였다.

의병 활동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자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왜적의 주요 침입로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중기 칼을 차고 다니면서 의(義)의 중요성을 강조한

조식의 사상적 영향력도 큰 작용을 하였다.

곽재우, 김면, 정인홍, 조종도, 이대기 등 조식의 문하에서 최대의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경상우도 지역은 고려후기부터 저항세력의 중심지라는 역사적 전통이 있었으며,

조식의 사상은 이 지역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국난의 시기에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합천의 정인홍,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등은

이 지역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의병장이자 조식의 문인이다. 
 
정인홍의 문인인 정경운은

1592년 5월 정인홍과 김면이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정인홍은 수백명의 정예병과 수천명의 창군(槍軍)을 보유하고 있었다.

훗날 서인의 영수가 되었던 이귀는 정인홍을 탄핵하면서,

정인홍이 의병활동을 통하여 호강(豪强)의 도가 지나쳐

부를 축적하고 민폐를 유발했다고 지적하였는데,

의병활동이 향촌에서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지역 의병들은 정경운의 기록에서도 보이듯

‘유식한 선비’들의 창도(唱導)하에 자발적으로 모여드는 경우가 많았다.

(『고대일록』 권1, 1592년 6월 11일)

 

이외에 경상우도를 중심으로 활약한 남명학파의 의병장으로는

이노, 조종도, 하락, 정경운, 전치원, 이대기를 비롯하여,

청도를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한 박경신, 박경인 등 밀양 박씨 14 의사 등이 있었다.

밀양 박씨 일문에서는 부자, 형제, 조카 등을 합하여 14명의 의병장을 배출하였던 것이다. 
 
경상우도 지역에서의 의병 활동은 곡창 호남을 방어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정인홍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당시 경상우도 의병의 비중을 말해준다.

 

처음 본도가 적에게 침몰당하였을 때 적의 세력이 비록 성하였지만

창의기병(倡義起兵)하는 사람이 많았다. 원근에서 동시에 일어나 각자 항전하였으므로

비록 적세가 강대하였으나 그 세력이 분산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장구히 서쪽으로 달려가 곧바로 호남지방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각기 무리로 모여서 오랫동안 지구지세(持久之勢)로 버티었다.

그간에 명나라 원병이 마침내 이르러 삼경(三京)을 수복하고 적은 해안으로 물러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당시 경상우도 일대에서의 경과의 대략이다. (『내암집』 권2,「辭尙州牧使疏」)    
 
경상우도 의병의 활약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호하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주요한 전기가 마련되었다.

경상우도와 호남은 순치(脣齒)관계로 인식되고 있었고,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은 경상우도가 무너지면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고 결국은 국가의 붕괴를 자초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경상우도의 의병활동은 경상우도 지역 방어에 큰 역할을 함과 동시에

호남의 곡창지대를 보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결국에는 이순신의 해전에서의 활약과 함께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사진 2)『내암집』의 표지
 


 
(사진 3) 『내암집』의 목록

 

3. 의병장들의 씁쓸한 최후
 
이처럼 의병장들은 전국 곳곳에서 조선이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활약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의병들의 공이 컸다는 것은 관군의 역할이 미미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것은 정권 담당자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 백성들의 신망을 받고 있던 이들이

혹시 어수선한 시국과 전란으로 인한 불만을 틈타 모반을 꾸미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실제로 전란 중에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고 모반사건도 발생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세력 규합을 위해 이름난 의병장의 이름을 파는 경우가 있어

정부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여기에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의 입김까지 작용함으로써

적지 않은 전쟁 영웅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의병장 김덕령은 대표적인 희생자였다.

김덕령은 전라도 광주 석저촌 출신으로, 유학을 익힌데다가 무예에도 뛰어나

‘지혜는 제갈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게가 백 근이나 나가는 큰 철퇴 두 개를 허리 아래 좌우에 차고 다녀

‘신장(神將)’이라고 불리웠던 그는 1593년 겨울 어머니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담양에서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여 의병전쟁에 뛰어들었다.

가는 곳마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경상도 지방으로까지 진출하는 등 크게 활약하여

그 이름만으로도 왜병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는 김덕령이었지만,

그의 활약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집요한 협공을 받아 결국 김덕령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596년 7월 전쟁의 와중에서 이몽학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관련자들의 공초에 장수가 김덕령이라거나

함께 거병하기로 일을 모의했다는 등의 진술이 나오면서 김덕령은 체포되었다.

이어서 김덕령의 명성을 꺼리는 자들이

'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麻)을 베듯 하였으며 또 모반할 조짐이 있으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라는 참소가 이어졌고,

결국 김덕령은 고문으로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곽재우가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한 후 산으로 들어간 것도

전후에 전공(戰功)은 왕을 호위했던 공신들의 손에 넘어가고

의병장에 대한 대우가 취약하고 역모에 연루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도 전쟁 초기 경상감사 까지 죽이려고 했던 곽재우를

매우 위험스러운 인물로 인식하였다.

전란이 끝나자 조정에서는 은밀히 감시인을 파견하여

곽재우의 동정을 살피면서 그를 압박해 나갔다.

결국 곽재우는 전란 후 관직에 뜻을 잃고 현풍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고양이를 기른 것은 쥐를 잡기 위함이니, 이제 적이 이미 평정되었으니 나는 할 일이 없다.

이제 돌아갈 것이다.’는 말을 남기고 산으로 들어간 곽재우는

이곳에서 도가(道家) 사상에 심취하여

벽곡(辟穀 : 곡식을 끊는 도가의 수련법)에 심취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전란 후에 선조는 전쟁의 최고 공로를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군대의 공으로 돌렸고,

이 과정에서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오른 대신들이

전쟁의 최고 공로자로 보상을 받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실제 임진왜란 유공자에 대한 논공행상 과정에서

선조를 수행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은 86명이나 책봉한 데 비하여,

전공(戰功)이 있는 사람에게 준 선무공신(宣武功臣)은 18명에 지나지 않았다.

곽재우는 추천을 받았지만 생존해 있다는 이유로 공신에 책봉되지 못했다.

공신의 책봉 과정에서도 전쟁 영웅들에 대한 격하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김덕령, 곽재우 등 전쟁 영웅들의 비참한 말로는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과

그들의 후손이 별다른 대접을 받지 못했던 현대사를 떠올리게도 한다. 

 
필진 : 신병주 | 등록일 : 2008-0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