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의 시작
- 이화여자대학교 파이퍼 홀
1. 등록번호 : 제14호(2002년 5월 31일 등록)
이 땅에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교육령(朝鮮敎育令) 사립전문학교 규정에 의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이화학당 대학과는 본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더불어 정동(貞洞)에 있었으나 1930년대 초에는 교사가 좁아 더 확충할 수 없게 되자 이미 신촌에 잡아 두었던 터에 캠퍼스를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 1932년이다. 새 캠퍼스 건설을 위해 1928년부터 시작한 모금 활동이 결실을 맺어 미국의 파이퍼(Pffeiffer)여사가 거금을 기부함으로써, 본관이 1935년 3월 준공되었다. 기부자를 기념하여 본관 이름을 ‘파이퍼 홀’로 명명하였다.
튜더식 고딕에 기초한 학교고딕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건물이다. 비슷한 시기의 학교건축으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본관 등이 있지만, 파이퍼 홀은 서양 석조건축의 고유한 돌쌓기인 네모막돌완자 쌓기의 정수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흔히 알려져 있는 고딕성당의 높은 첨탑과 화려한 트레이서리로 장식된 뾰족 아치가 튜더시기 고딕건축에서 보이지 않고 대신 납작한 4분 아치와 네모난 창호가 두드러지는 것은 튜더시기의 고딕건축이 교회당보다는 주택이나 학교건축에 주로 적용되면서 높지 않은 층고에 고딕건축양식을 적용하는데서 온 변형의 결과다.
파이퍼 홀의 사각창호 중 중앙부 3층에는 석재 트레이서리가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이 창호가 특별한 것은 3층에 이 건물의 백미인 ‘애다기도실(Ada Prayer's Chamber)의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파이퍼 홀의 경우 후면이 특별히 아름다운데, 보통의 경우 건물의 후면부는 부담없이 처리하여 단촐 한 것이 보통이지만 파이퍼홀은 후문에 베이윈도우와 납작아치를 설치하여 그 멋을 더하였다. |
본관은 건립 당시 사무실, 교실, 실험실, 도서실, 식당 등으로 사용되었고,
3층의 왼편 날개에는 지금은 사무실로 바뀐, 약 300명이 수용 가능한 소강당이 있었다.
강당을 제외한 내부는 일반적인 사무실과 다를 바 없으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파이퍼 홀은 정 반대다.
복도에서 보이는 문 하나, 창 하나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복도 끝의 계단 역시 오랜 세월 견디어온 건물의 연륜을 보여준다.
더욱이 낡았다고, 옛 것을 뜯어내고 번듯한 신재료로 바꾸는 경솔함이 이 건물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부정형의 5각형 타일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문양과
벽과 바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분홍색 테라조 베이스 타일은
곳곳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3층에는 이 건물의 백미인 애다기도실이 있다.
한칸 밖에 안되는 작은 기도실이고,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한가롭기까지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의자에 앉아 기도를 해야만 할 것 같다.
밖에서 보았던 석재 트레이서리의 아름다운 창호를 정면으로 하고 작은 제단이 위치하며,
천장에는 고딕건축에서 보이는 목재 지붕틀과 고딕식 뾰족 장식을 가진 의자는
하나의 세트처럼 완벽한 기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건물 주변의 교정에는
한국에 신여성교육 정착에 도움을 준 많은 분들에 대한 감사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본관 왼편에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벤치에는
“In Grateful Recognition of Mrs. Philip Hayward Gray of Detroit Michigan who made possible the Dedication of these Hills and Valleys to the Christian Education of Korean Women, May 31 1935”
라고 한국여성교육의 전당을 만드는데 공헌한
필립 헤이워드 그레이 여사에게 감사하는 문귀가 새겨져 있다.
본관의 설계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윌리암 보리스 사무소에서 맡았고,
시공자는 중국인 마종유였는데, 현장 감리는 보리스사 직원이었던 한국인 건축가 강윤이 담당하였다.
튜더식 학교고딕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화여대 파이퍼 홀은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4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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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정디자인기획에서 발간한 [한국의 근대문화유산 Vol.1] 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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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14 ,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
- 덕수궁 주변 정동의 역사
지금 덕수궁이 자리하고 있는 정동은 조선시대까지 정릉동이었다.
정릉이 있는 고을이란 뜻을 담고 있다.
태조는 둘째왕비인 신덕왕후를 위하는 마음이 커서 법식을 어기고 4대문 안에 정릉을 만들고
무덤을 지키고 제사지내는 절로 흥천사를 지었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낳은 두 아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은
정릉을 경기도(지금의 성북구 정릉)로 옮겨버렸다.
정동은 임진왜란 직후 또 한번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타서 없어지면서 몽진을 갔다가 돌아온 선조는
정릉동 월산대군 집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후 광해군 때 궁궐을 복원하기 전까지 왕이 머물며 행궁역할을 했는데 이때 ‘경운궁’으로 불렸다.
한편 경운궁(덕수궁)이 정식궁궐의 격식을 갖추게 된 것은 왕실의 비극과 관련이 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에서 큰 이득을 챙기려 했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프랑스와 독일의 참견으로 그 뜻이 좌절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본 조선에서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경복궁에 자객을 침입시켜
명성황후를 참혹하게 죽이는 사건(을미사변)을 일으켰다.
고종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경복궁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몇몇 사람의 계획을 좇아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갔다.
한 나라의 왕이 자신의 안전을 다른 나라 공사관에 맡기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일본과 러시아에 대한 여론도, 고종에 대한 여론도 나빠지게 되자
다시 궁궐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고종은 황제를 선포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정하고 경운궁에 머물기로 했다.
1897년 정릉동행궁으로 불리던 ‘경운궁’이 새롭게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고종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한 것은
여러 나라의 영사관(미, 영, 프, 러시아)과 담을 마주한 것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공사관을 나왔지만 일본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때문이었다.
경운궁에 고종황제가 머무는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1907년 외교를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려던 고종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를 보냈는데,
이 사건으로 일제는 고종을 황제에서 몰아내고 순종(융희황제)을 새 황제로 올렸기 때문이다.
황제에서 물러난 고종은 태황제가 되었지만 실권이 없었다.
이때 일제는 고종에게 ‘덕수(德壽)’란 궁호를 올리게 되어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경운궁은 궁궐과 마주한 곳에 1880년대부터 여러 나라의 공사관을 짓도록 땅을 내주면서
영역이 들쭉날쭉한 모양이 되어있었다.
더구나 1904년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고 제대로 복구가 되지 못했으며
1933년 공원으로 일반에 공개되면서 궁궐의 위엄은 찾을 길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중심 궁궐로서 당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서양식건물이 들어선 것도 그 예라고 할 것이다.
대한제국시기의 역사를 보려면 덕수궁을 보기 전에 먼저 주변의 관련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 좋다.
(1)덕수궁 앞 대한문에서 서울광장 건너편을 보면 기와건물이 있는데 ‘황궁우(皇穹宇)’ 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뜻 깊은 장소다.
지금의 황궁우가 있는 영역이 전체가 아니고 앞에 있는 조선호텔영역까지 묶어서
원구단, 또는 환구단으로 불렸다. 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원구단)은 사라지고
하늘신의 위패를 모신 건물만 남아있지만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2)덕수궁 왼쪽 돌담길을 따라 가면 작은 교차로가 나오고
그 왼쪽에 붉은 벽돌로 된 오래된 교회건물이 나타난다.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빅토리아양식으로 알려진 건물로 고딕건물을 간략하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정동 제일교회, 정동교회로 불리는 건물이다.
아펜젤러 목사의 주도로 1897년 완공된 정동교회는 근처에 있는 새문안교회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오래된 교회다.
특히 정동교회 근처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이 있어 미국인 선교사를 비롯해
개화기에 많은 인재가 모이던 곳이기도 하다.
마당에는 아펜젤러 목사와 뒤를 이어 담임목사를 맡은 최병헌 목사의 흉상이 있다.
(3)정동교회 건너편에는 정동극장이 있다. 극장이 끝나는 작은 골목이 있고 그 안으로 걸어가면
낡은 2층건물이 있다. 중명전(重明殿)이다.
이 건물은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했으며 원래는 덕수궁 안에 있던 서양식 건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덕수궁 영역이 망가지면서 지금은 궁궐 밖으로 밀려났다.
중명전은 고종이 외국인을 만나는 장소로 쓰였지만 그보다 중요한 내력이 있다.
1905년 이른바 을사보호조약으로 불리는 침략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을사늑약으로도 불리는 이 조약은 고종이 서명하지 않아 무효이며 불법이다.
그러나 당시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와 일제는 고종을 협박하고 국새를 찍어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가 실질적으로 대한제국을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역사의 치욕스런 장소지만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꼭 찾아볼 장소이기도 하다.
(4)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학당
중명전을 나와 걷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이화학교는 예전의 이화학당이며 유관순 열사가 다니던 학교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절 역사로 본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Sontag Hotel)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여성 손탁은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주선으로 궁궐에서 고종 및 명성황후와 친분을 쌓았다.
나중에 고종으로부터 집을 하사받고 그 자리에 2층 양식건물을 새로 지어 호텔로 이용했다.
호텔건물은 없어지고 건물이 있던 터는 주차장이 되었다.
(5)이화여고 건너편 예원학교가 끝나는 곳에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도로가 있다.
그 길 중간에 작은 공원이 있고 뒤로 하얀색 르네상스양식 건물이 있다.
사실은 건물은 없어지고 종탑만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종탑은 러시아공사관 건물의 일부로
1896년 고종이 잠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간 아관파천(俄館播遷)의 현장이기도 하다.
러시아공사관 역시 덕수궁 일부를 차지했으며 주변의 다른나라 공사관보다 높은 곳에 있다.
그리고 종탑 아래에서 지하로 연결된 통로가 일부 발견되었는데
덕수궁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당시 대한제국과 러시아가 어떤 관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6)이밖에도 덕수궁 북쪽, 곧 광화문 쪽으로는 영국 성공회 성당이 있다.
영국 영사관 옆에 지은 성당으로 로마네스크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비잔틴기법과 우리 고유의 지붕과 처마의 느낌을 살렸다.
전체모습은 라틴십자가(Latin Cross) 모양을 한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이곳 역시 덕수궁과 담을 마주하고 있다.
- 서울특별시, <서울사랑>2010년 7월호 부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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