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 |
[250매 초대형 프로젝트]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 제1부 마케도니아와 몽골, 그리고 대한민국
외신을 뒤적이다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에서 일고 있는 ‘원조(元祖) 마케도니아’ 논쟁이다. 논쟁은 독자노선을 걸어온 유고슬라비아연방공화국(유고연방)의 붕괴를 계기로 일어났다.
1980년 유고연방은 개국(開國) 지도자인 티토 사망을 계기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면서 결속력이 약해지는 위기를 맞았다. 1989년 유럽에서는 공산국가들이 연이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는데, 이 열풍이 유고연방에도 상륙했다.
1991년 6월, 유고연방을 구성해온 6개 공화국 중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했다. 9월에는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9월11일) 새 헌법을 만들어 독립 정부를 출범시켰다(그해 11월7일). 1992년 3월에는 헤르체고비나도 독립을 선언했다.
4개월 뒤인 1992년 3월, 유고연방은 마케도니아에 주둔하던 유고연방군(軍)을 철수시킴으로써 마케도니아의 연방 탈퇴를 인정했다. 그러나 독립은 ‘선언’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게 아니다. 주변국을 비롯한 세계 여러 나라가 인정해야 비로소 완성된다.
남쪽으로 그리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마케도니아는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유럽 양대 기구인 EU(유럽공동체)와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추진했다. 그러자 두 기구의 핵심 회원국인 그리스가 강력히 반대했다.
마케도니아란 이름으론 유엔 가입 못해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공화국(Republic of Macedonia)’이라는 이름으로 두 기구 가입을 추진했는데,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를 구성한 고대 국가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를 구성하는 13개 주 가운데 무려 3개 주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나라는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북쪽 국경선에는 서쪽에서부터 ‘서부마케도니아’와 ‘중부마케도니아’ 그리고 ‘동부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 주(州)가 있다. 북쪽 국경선에 접한 4개 주 가운데 무려 3개 주가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지도 1 참조).
그리스가 거세게 반대하자, 마케도니아는 ‘구(舊)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Former Yugoslav Republic of Macedonia, 약칭 FYROM)’이라는 국명으로 유엔 가입부터 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유엔 안보리의 5대 상임이사국은 마케도니아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므로 마케도니아가 FYROM이란 이름으로 가입하는 것을 승인했다(1993년 4월11일 가입).
마케도니아가 유엔에 가입하자 덴마크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이 잇달아 마케도니아를 승인하며 국교를 맺었고 미국도 뒤따를 조짐을 보였다 (미국은 1995년 마케도니아를 인정해 국교를 맺었다).
국명은 적당한 때 다시 바꾸면 그만이다. 마케도니아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가 높아지자 그리스는 본격적인 압박에 나섰다.
마케도니아는 알바니아, 코소보,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로 둘러싸인 내륙국이다. 따라서 그리스의 중부마케도니아 주에 있는 살로니카 항구를 통해 농산물과 철광을 수출하고 원유를 수입해왔다. 1994년 2월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기세를 누르기 위해 살로니카 항구 사용금지 조치를 취했다.
마케도니아는 냉동 창고가 부족한 탓에 수출을 위해 준비해둔 양고기와 포도주가 썩어 대량 폐기하고 원유를 도입하지 못해 경제가 파탄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자 국제사회는 일제히 그리스를 비난했다. EU는 그리스의 항구 봉쇄조치를 불법으로 보고, 그리스를 EU 재판소에 제소했다(1994년 5월).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출범에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역사성’ 때문이다. 그리스의 모태는 도시국가 아테네인데, 아테네는 병영 도시국가 스파르타에 패망했다. 스파르타는 야만성이 강한 테베에 병합됐고, 테베는 훨씬 더 야만성이 강한 마케도니아에 의해 무너졌다.
테베를 정복한 마케도니아는 지금 터키가 있는 소아시아를 지나 이란이 있는 페르시아, 이라크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있는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의 이집트 지역까지 진출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을 완성한 이가 알렉산더 대왕(서기전 356~ 323)이다.
아테네를 그리스의 모태로 본다면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받은 것이 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일부로 보고, 그리스가 알렉산더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는 이러한 믿음을 반영해 영토 북부에 있는 세 개 주에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누가 알렉산더의 후예인가
하지만 유고연방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 자국을 별개 국가로 본다. 그들은 마케도니아가 그리스를 포함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했다고 보며 자국 헌법 제3조에 ‘마케도니아의 영토는 절대로 쪼개져 있을 수 없고 절대로 범할 수 없다( The territory of the Republic of Macedonia is indivisible and inviolable)’라는 조항을 넣었다. 이 조항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마케도니아는 ‘마케도니아란 이름을 사용하는 그리스 북부의 3개 주를 회복해 통일하겠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는 이 조항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케도니아는 과거 알렉산더 대왕이 채택한 문양을 토대로 붉은 바탕 위에 16개의 금빛 줄기를 쏘는 금빛 태양을 그린 국기를 제작했는데, 이에 대해 그리스는 “알렉산더는 그리스의 영웅이므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 대왕과 관계된 문양을 사용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리스의 반발이 워낙 거셌기에, 유엔은 마케도니아의 가입을 승인했음에도 이 국기를 유엔 청사 앞에 게양하지 못했다. 마케도니아는 금빛 줄기를 8개로 줄인 새로운 국기를 제작해(1995년 10월5일), 유엔 청사에 게양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는 영토를 거론한 헌법 조항은 끝내 개정하지 않았다.
한편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항구 봉쇄를 해제할 수밖에 없게 된 그리스는 국제사회를 향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국경선을 보장해달라”고 주문했다. 유럽 국가들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자, 1995년 9월14일 그리스는 마케도니아와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제재 해제에 합의했다. 이로써 일단락되는 듯하던 그리스-마케도니아 갈등은 2007년 마케도니아가 마케도니아란 이름으로 NATO와 EU 가입을 다시 추진하면서 재연됐다.
이러한 때 마케도니아가 새로 만드는 국제공항을 ‘알렉산더(현지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공항’으로 명명한다고 하자, 그리스는 “동부마케도니아 및 트라키아 주의 카발라에 ‘알렉산더 대왕(Mega Alexandros) 국제공항’이 있다”며, 알렉산더란 이름을 쓰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리스의 반발이 거세자 마케도니아는 “그리스와의 양자 관계에서는 마케도니아라는 국명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제의했으나, 그리스는 이를 거부했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이런 상태로 불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국제사회는 이 갈등을 두 나라가 마케도니아 후예 다툼을 하고 있다며 ‘원조 마케도니아’ 논쟁으로 명명했다.
마케도니아는 경상북도보다 약간 넓은 면적(2만5700㎢)에 210만의 인구를 가진 약소국이다. 반면 그리스는 한국의 1.5배, 한반도의 0.6배인 13만㎢의 면적에 1070만 인구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마케도니아는 ‘원조 마케도니아’임을 자부함으로써 대국인 그리스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지도자 분열로 둘로 나뉜 몽골족
‘원조 마케도니아’ 갈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비슷한 현상이 우리와 관계된 지역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이름을 자국의 지방 이름으로 사용하는 예는 중국과 몽골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중국은 4개 직할시(북경 천진 상해 중경)와 2개 특별행정구(홍콩, 마카오), 22개 성(대만성 제외)과 5개 자치구로 구성돼 있다.
5개 자치구 가운데 하나가 몽골인이 많이 사는 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고자치구는 위구르인이 많이 사는 신강(新疆)자치구(160만㎢), 티베트인이 많이 사는 서장(西藏)자치구(123만㎢)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118만㎢). 내몽고자치구의 면적은 한국(9.9만㎢)의 12배이다. 내몽고자치구 북쪽에 몽골인들이 세운 몽골공화국(156만㎢)이 있다[지도 2].
중국인은 독립 몽골을 ‘외몽고’로 부른다. 몽골이 ‘중국 몽골(내몽고)’과 ‘독립 몽골(외몽고)’로 나뉜 것은, 만주족이 중국(明나라)을 정복해 청(淸)나라를 세울 때(1644년)부터다. 만주족은 명나라를 정복하기 전 몽골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눠 통치했는데, 이를 계기로 몽골족은 둘로 쪼개졌다. 몽골의 분리는 부족장들이 두 패로 갈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갈라설 때 충돌이 있었기에 지금도 양쪽 몽골인들은 합칠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두 개의 몽골이 통일되면 그 면적은 한반도의 12.5배, 한국의 27.6배인 274만㎢에 달한다. 아르헨티나에 이어 세계에서 아홉 째로 영토가 넓은 나라가 되는데, 몽골인들은 이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인들이 알렉산더 시절 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진출해 대제국을 만들었듯이, 몽골인들도 칭기즈 칸 시절 중국을 넘어 유럽과 서남아까지 진출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형성했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의 위상은 보잘것없다. 그래도 마케도니아인들은 국가의 자존을 지키려 하나, 독립 몽골은 그러한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칭기즈 칸의 후예는 알렉산더의 후손보다 못났기 때문인가.
그런데 우리는 몽골의 어리석음을 바라보고만 있을 처지가 아닌 것 같다. 한민족도 몽골인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조선’과 ‘독립 조선’
함경북도와 마주한 중국 길림성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다. 이를 몽골 사례에 비교하면 그곳은 내몽고, 북한과 한국은 외몽고가 된다. 조선족자치주는 ‘중국 조선’이고 북한과 한국은 ‘독립 조선’인 것이다. ‘독립 조선’인 북한과 한국은 ‘중국 조선’과 하나가 되려 하는가? ‘독립 몽고’는 하나이지만, ‘독립 조선’은 남북으로 쪼개져 있으니 우리는 몽골보다도 못한 처지가 아닌가?
물론 지금 “간도(間島)를 포함한 만주 땅은 고구려의 무대였고 만주족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우리 겨레이니, 그들이 살았던 만주는 우리 땅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발언이 된다. 영토 문제로 중국과 마찰을 빚기보다는 중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 만큼 섣불리 영토 논쟁을 벌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뿌리를 찾는 정신적인 싸움마저 포기한다면 이는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중국은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황하 중하류에서 일어난 문명이 줄기줄기 이어져 지금의 중국 문명을 이뤘다는 ‘줄기론’을 주장했다. 그러다 지금은 단일 줄기론을 부인하며 ‘저수지론’을 내놓았다.
저수지는 청탁(淸濁)을 구분하지 않고 물을 받아들인다. 저수지론은 중국을 이루는 광활한 영토 여러 곳에서 독자적으로 일어난 문명이 중국 중심부로 흘러들어와 섞이면서 지금의 중국 문명을 만들었다는 논리이다. 저수지론을 반영한 대표적인 주장이 동북공정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동북공정은 “고조선과 고구려는 지금 중국 땅에서 일어났으니, 이들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지방 왕조 가운데 하나다”라는 주장이다. 중국은 몽골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펼친다. 몽골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세운 원(元)나라는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 왕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국에 한번 닿기만 하면 모두 중국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중국인의 역사의식이 중국을 대국(大國)으로 만들었다. 반면 한국은 ‘털어내기’를 반복해왔다. 이민족과 닿은 역사가 있으면 ‘순수성이 더럽혀졌다’며 배제를 반복하는 외줄기론을 채택함으로써, 한민족은 반도 한구석으로 오그라드는 처지가 되었다.
줄기론이 끼친 해악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단군과 고조선을 설화로 만든 것이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등 여러 역사책에 서기전 2333년쯤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대 국가 고조선이 세워졌다고 기술돼 있는데, 강단 사학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 역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들이 고집을 꺾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한반도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서기전 2333년쯤 국가를 세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국 역사를 반도 안에서만 찾으면 안 된다. 반도 안에서만 뿌리를 찾으려는 강단 사학계의 좁은 인식을 ‘반도사관(史觀)’이라고 하는데, 반도사관은 외줄기론과 맥을 같이한다.
한국어와 중국어는 왜 다른가
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단군보다 앞선 시대의 인물이기에 오랫동안 신화로 여겨져온 3황5제도 실존한 것으로 보고, 고고학적 발굴로 이를 증명하려 한다.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3황5제 시절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노력을 중국은 ‘탐원(探源)공정’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하(夏)-상(商)-주(周) 왕조의 흔적을 찾는 노력도 거듭하고 있다. 하-상-주 왕조를 복원해 중국의 기원을 밝히는 노력을 중국은 ‘단대(斷代)공정’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만주 지방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펼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학계도 고조선과 고구려 사이의 왕조를 찾는 ‘한국판 단대공정’과 고조선 이전의 뿌리를 찾는 ‘한국판 탐원공정’을 펼쳐야 한다. 중국의 탐원공정과 단대공정에 맞서는 뿌리 찾기를 하지 못하면 한국은 동북공정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중국인과 한국인은 오랫동안 인접해 살아왔지만 두 국민은 전혀 다른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외모와 유전자는 흡사해도 언어는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두 국민이 다른 뿌리에서 나왔음을 뜻한다. 언어 체계에서 한국과 유사한 것은 일본어와 만주어 몽골어 투르크어다(알타이어계).
그렇다면 한국과 투르크 몽골 만주(여진) 일본은 한 뿌리에서 나와 갈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왜 알타이어를 쓰는 종족은 합치지 못하고 흩어지게 됐는가. 그리고 이들이 처음 모여 살며 알타이어 계통이라고 하는 동일 문화를 만든 공간은 어디였을까.
오랜 역사 속에서 종족과 민족은 전쟁이나 자연재해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이동했다. 이동 과정에서 한민족의 영역은 오그라들기도 하고 확대되기도 했다. 시대에 따라 축소와 팽창을 거듭하는 것이 영토인데, 뿌리를 찾는 사관을 영토에 얽어맬 수는 없다. 기자는 2003년 중국이 준비하는 동북공정을 처음 알린 후 우리의 뿌리를 찾는 탐구를 거듭해왔다. 2006년 10월호 ‘신동아’에서는 고조선은 내몽고자치구에 있었다고 밝힌 바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일단의 학자들과 답사단을 형성해 고조선 찾기에 나섰다.
고조선은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변천했는가. 환웅은 누구이고 그와 혼인해 단군을 낳은 웅녀(熊女)는 누구인가. 고조선은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가.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대문화유산] ⑨ 옥천 삼양리 옥천천주교회 (0) | 2008.04.29 |
---|---|
[근대문화유산] ⑩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0) | 2008.04.29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2부 - 환웅족과 곰족이 만난 곳은 '우하량' (0) | 2008.04.18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3부 -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0) | 2008.04.18 |
[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제 4부 - 고대에는 요동반도가 조선반도였다 (0) | 2008.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