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 |
[250매 초대형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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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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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부 고조선인의 ‘마사다 요새’인 성자산성
신성스러운 땅 우하량을 둘러봤으니 다음으로는 사람이 살던 곳을 살펴보아야 한다. 노노아호산 북쪽의 내몽고자치구는 해발 500m쯤 되는 고원 평야다. 이곳의 중심지는 앞에서 언급한 적봉시인데 적봉시 중심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타고 한 시간쯤 달리면 삼좌점(三座店)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그곳에서는 영금하의 지류인 음하(陰河)를 막는 음하 다목적댐 공사가 마무리돼가고 있었다. 댐 아래(하류) 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댐과 맞닿은 오른쪽 언덕에 고대인들이 살았던 신비로운 거주지가 있다. 답사단은 해가 기울기 직전 그곳에 올랐다가 생각지도 못한 발견을 했다.
적봉 삼좌점에서 발견된 서기전 2000년 취락지 입구의 암각화. 사람의 얼굴을 새긴 듯하다. 암각화의 존재는 그 시대 사람들이 정신적인 생활을 했음을 의미한다.
두 눈을 가진 사람 얼굴을 새긴 것 같은이 암각화 주위로는 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주거지가 수십 군데 있었다. 둥글게 쌓은 돌은 집 안과 집 밖을 구분하는 벽이었으리라. 고대인들은 이 돌담 위에 짐승 가죽을 씌워 지붕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지와 주거지 사이는 사람들이 다니는 고샅길이다. 고샅길에는 돌을 둥글게 쌓아 만든 얕은 우물 같은 것이 있었다. 음식물을 저장하는 창고였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동네를 둘러싼 돌성이었다. 돌성을 둘러 본 답사단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나왔다.
조선과 일본에까지 전해진 석성의 치(雉)
이곳은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모래가 바람에 날려온다. 한반도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황사(黃砂) 바람이 불어온다. 수천년에 걸쳐 모래가 쌓이면 사람이 떠난 주거지는 고스란히 모래흙에 묻히게 된다.
삼좌점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음하를 막는 댐 공사를 벌이면서 이곳을 발굴했다. 요녕대학이 펼친 이 조사는 2007년에 완료됐는데 그 결과 서기전 2000년의 삼좌점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해발 800m인 성자산 정상에서는 주위를 쉽게 관찰할 수 있다(좌). 이곳에는 서기전 2000여 년에 만든 돌성과 제사터의 흔적이 있다(우). 삼좌점 주거지를 둘러싼 돌성에는 놀랍게도 ‘치(雉)’가 있었다. 치는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간 성 구조물이다. 치가 있으면 성 안의 군사는 공격해오는 적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석성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돌이 적기 때문인지 흙을 빚어서 만든 벽돌 성이 많고 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성은 100%라고 할 정도로 치가 있다.
삼좌점의 주거지를 둘러싼 석성에서는 7~8m 거리로 일정하게 툭 튀어나온 치가 있었다. 서기전 2000년 당시의 고대인들이 치가 있는 돌성을 쌓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우하량에서 여신상과 사라진 곰뼈 자리를 보았을 때 이상으로 흥분됐다. 돌성은 높지 않았다. 1~2m쯤 될까. 그러나 신석기인의 키는 150cm 이하였으니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긴 흙으로 돌을 쌓아 올렸기에 성의 단면은 매우 거칠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튀어나온 돌을 잡고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 답사단원들도 이 성을 가볍게 오르내렸다. 치도 매우 작아서 한두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허술한 성이 과연 유사시 방어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이 돌성이 청동기 초기인 서기전 2000여 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시기 인류는 금속기를 개발했으나 여전히 돌과 나무가 주무기였다. 손자병법 같은 병서(兵書)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므로 전술과 전략도 없었다. 몇몇 사람의 꾀와 용기 그리고 힘으로 결판이 나는 싸움을 하던 시절이다. 그렇다면 돌성과 치는 충분히 방어벽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삼좌점 유적은 홍산 문화 다음에 일어난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의 일부다. 석성에 치를 만드는 전통은 고구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졌고, 일본으로도 건너갔다.
감제고지 성자산의 무너진 돌성
적봉 중심지에서 오한기(敖漢旗)로 가다보면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의 경계를 이루는 곳의 산 꼭대기에 성이 있다고 하여 성자산(城子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산이 있다. 해발 500m 이상인 내몽고 고원에 있어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해발 높이는 800m쯤이라고 한다.
성자산을 찾아가기 위해 답사단은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성자산은 현지인들도 별로 찾지 않는 곳이라 그곳 지리를 아는 기사가 모는 차를 따로 빌렸다. 그런데도 찾지 못해 인근 동네 사람을 태워 길안내를 맡긴 다음에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었다. 성자산 밑에는 중국어와 몽골어로 된 안내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 소백산 정상부처럼 풀만 자라는 성자산의 정상부는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몸을 10도 정도 기울여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입 안으로는 바람에 날린 모래가 들어와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상부는 거대한 망루와 같아서 내몽골 초원과 여기저기 솟아오른 산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산 정상부를 덮고 있는 것은 풀만이 아니었다. 한 줄기 띠 모양을 이루며 뻗어나간 검은 돌무지도 정상의 주인마냥 버티고 있었다. 이 돌무지는 강한 바람에 무너진 돌담이나 돌성의 흔적이다. 이 돌성 터는 1987년 중국 학자들이 발견해 2000년 조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그 결과 이곳에는 각각 5개의 문을 가진 내성과 외성이 있었고, 내성 안에서는 제단터가 발견되었다. 이곳의 외성에서도 치의 흔적이 있었다. 성자산성의 총 면적은 6.6㎢인데 초기 청동기 문명인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인 서기전 2000년쯤에 축조됐다고 한다.
왜 초기 청동기인들은 내몽고 초원을 감제(瞰制)할 수 있는 고지에 산성과 제단을 만든 것일까.
이스라엘 사해(死海) 서쪽에는 ‘요새’라는 뜻을 가진 난공불락의 ‘마사다 성’이 있다. 마사다는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맞서 항전하다 전원 분사한 곳으로 유명하다. 성자산 산성은 하가점 하층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마사다 성’이 아니었을까. 평상시 하가점 하층 문화인들은 이곳에 올라 하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방어하기 좋고 사방을 감제하기 좋은 이곳으로 올라와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것이다. 평상시에는 평야에서 생활하다 유사시 산성으로 올라와 항전하는 것은 고구려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채택된 방어책이다.
조선은 평지인 한양에는 도성(都城)을 쌓아 그 안에서 정치 · 경제생활을 했다. 그리고 한양 주변의 산에 북한산성과 남한산성 등을 쌓아놓고 외적이 침입하면 그곳으로 도피해 항전했다. 왜 조선의 방어전략 원형이 내몽고 초원에서 발견되는가?
평지인 삼좌점의 석성과 산지인 성자산의 석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곳저곳의 돌을 모아 성을 쌓으려면 일을 시키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어떤 모양의 성을 만들 것인지 설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시키는 지배자와 일을 하는 피지배자가 있는 것이다. 곧 계급이 있었다는 의미다. 국가의 형태가 등장했으며 부계사회의 특성이 드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대전자 토성의 깨진 중국어 안내석
하가점 하층 문화 시절 돌성만 쌓았던 것은 아니다. 몽골 초원에는 돌이 적다. ‘마사다 요새’로 활용하려는 산성은 이곳저곳에 있는 돌을 모아 단단히 지어야 한다. 하지만 평상시의 생활공간은 이렇게 만들 수 없다. 흙으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적봉시 오한기의 대전자향(大甸子鄕)이라는 마을에는 서기전 2000년에 쌓은 토성(土城)이 있다. 평지에 쌓은 평원성(平原城) 개념의 토성인데 높이는 약 3m 정도다. 콘크리트 건물은 강도를 높이는 뼈대 역할을 하기 위해 철근이나 철골을 집어넣는다. 같은 개념으로 흙으로 짓는 건축물에는 나무를 집어넣는다. 일부가 무너져내린 이 토성에서는 뼈대로 박아 넣은 나무가 썩어 생긴 작은 구멍을 볼 수 있었다.
이 토성 안쪽에는 마을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지금은 옥수수밭만 펼쳐져 있다. 옥수수밭에서는 40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토기 파편을 주울 수 있었다.
대전자 토성에서 놀라움으로 다가온 것은 안내석이었다. 안내석은 몽골어와 중국어로 쓰인 것 두 개가 있었는데, 중국어 안내석이 둔기에 맞아 쪼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둔기를 휘두른 사람은 중국어 안내석의 기단도 쓰러뜨려 놓았다. 몽골어 안내석은 멀쩡히 서 있는데 중국어 안내석은 왜 산산조각이 나 있는 것일까.
이곳은 내몽고자치구다. 내몽고는 중국의 여러 자치구 가운데에서도 중국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지역으로 꼽힌다. 그러나 시골로 가면 아직 몽골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한다. 몽골은 한민족만큼이나 중국의 팽창 정책에 시달려왔다. 몽골인 가운데 대전자 토성은 중국과 관련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이 큰 망치를 들고 와 중국어 안내석을 때려 부순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는 죽은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문화는 대개 비슷한 과정을 밟으며 발전한다.
한국이 환웅과 단군에 의해 국가와 민족을 성립했다면,
중국은 우(禹)가 세운 하(夏)나라에 의해 처음 나라꼴을 갖췄다.
하나라에 이어 상(商)나라와 주(周)나라가 일어나고, 주나라 말기 갈등기인 춘추(春秋) 시대와 전국(戰國) 시대를 겪다가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졌다.
하-상-주와 춘추시대는 청동기 시대로 분류되고, 전국 시대부터 쇠를 담금질하는 기술이 개발됨으로써 철기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라 이전은, 신석기 문명인 3황5제 시절로 보고 있다.
청동기 이전은 기록이 없는 ‘선사(先史) 시대’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 시대의 비밀은 고고학적 발굴로 밝혀내야 한다. 중국은 선사 시대를 탐구해 중국이라는 국가와 문명은 하나라 이전에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홍산 문화보다 앞섰던 앙소 문화
하-상-주 시절은 단군이 이끈 고조선 시절과 비슷하고,
3황5제 시절은 환웅이 이끈 시절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탐원공정으로 인해 3황5제는 전설이 아닌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3황5제 시절의 존재를 증명하는 고고학적 자료로는 ‘앙소(仰韶) 문화’가 자주 거론된다. 앙소 문화는 1921년 스웨덴의 지질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앤더슨이 황하의 지류인 위하(渭河)가 흐르는 하남성 삼문협(三門峽)시 민지(?池)현의 앙소촌에서 처음 발견해낸 신석기 문명을 가리킨다. 그 후 조사에서 앙소에서 발굴된 것과 유사한 신석기 유적지가 동서남북으로 수백㎞ 이상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앙소 문화’라는 말이 생겼다.
흔히 중국 문명을 가리켜 ‘황하 문명’, 중국의 중앙부를 가리켜 중원(中原)이라고 하는데 황하 문명과 중원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중원은 황하강 중하류에 펼쳐진 대평원 지대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중원은 황하가 지나는 하남성 북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 그리고 산동성 동부를 지칭한다. 북경을 감싸고 있는 하북성은 중원이 아니다.
3황5제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중국 사서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3황은 대체로 신농 복희 염제로,
5제는 황제 전욱 제곡 당요 우순으로 정리된다.
중국 학자들은 앙소 문화 시절을 3황 시절로 보고 있다. 학자들은 앙소 문화가 서기전 5000년에서 서기전 2500년 사이에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일어난 것이 용산(龍山) 문화다. 이 문화는 1928년 중국의 고고학자인 오금정(吳金鼎)이 하남성 동쪽에 있는 산동성 제남(濟南)시 장구(章丘)시 용산진(龍山鎭) 마을에서 처음 발굴함으로써 알려졌다. 그 후 유사한 유적과 유물이 중원 지역 300여 군데에서 더 발견돼, 용산문화도 상당히 넓은 지역에 펼쳐져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용산 문화는 서기전 3000년에서 서기전 2200년 사이에 존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용산 문화에서부터 계급이 조금씩 생겨났는데 중국학자들은 용산 문화를 5제 시절로 보고 있다.
앙소 문화 유물이 발견된 하남성 민지현 앙소촌에서 위하를 따라 하류(동쪽)로 가면 낙양(洛陽)시 언사(偃師)현 이리두(二里頭)라는 마을이 있다. 1959년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토기와 궁전 터, 구리를 주조한 흔적을 발굴했다.
그 후 중국 고고학자들은 유사한 유물과 유적을 중원 전 지역에서 발견했기에, 이 초기 청동기 문화를 ‘이리두 문화’로 명명했다. 이리두 문화는 서기전 220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존재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중국학자들은 이리두 문화가 바로 중국 역사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조인 하(夏)나라와 관련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나라는 하족(夏族)이 이끈 왕조인데, 하나라 시절이라고 하여 중원에 하족만 있었다고 보면 이는 착각이다. 당시 중원에는 하족 외에 상족(商族), 주족(周族) 등 여러 종족이 있었다. 하족은 상족과 주족을 비롯한 여러 종족을 지배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라 시절이다. 중국학자들은 하나라가 서기전 2070년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은 하나라보다 먼저인 서기전 2333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이리두 문화부터 확실한 청동기 시절
이러한 하나라는 17대인 걸(桀)왕이 학정을 일삼음으로써 주변 종족에 대한 지도력을 잃는 위기를 맞았다. 걸왕의 학정이 자심하자 상족의 리더인 탕(湯)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걸왕을 살해하고 상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시대를 열었다.
중국학자들은 서기전 1600년경 상나라가 탄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나라 왕조는 자기 종족과 주변 종족을 다스리며 31대를 이어갔다. 상족은 은(殷)으로 불렀던 지금의 하남성 안양(安陽)시 소둔촌(小屯村)을 수도로 삼았는데, 1928년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상나라의 청동기를 대량 발굴해 상나라의 문화 수준이 대단히 높았음을 확인했다.
이러한 상나라도 31대 왕인 주왕(紂王)이 확정을 거듭하자 서기전 1111년쯤 주족의 리더인 무왕이 쿠데타를 일으켜 주왕을 살해함으로써 패자가 되었다. 주(周)나라 시대를 연 것이다. 주나라는 봉건제도를 통해 영역을 확대해나가다 서기전 771년쯤 서융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쪽으로 이주한 주나라를 동주(東周)라고 하는데, 동주 시절부터 주왕실의 힘이 약해지고 제후국의 힘이 세지면서, 많을 때는 무려 300여 개의 제후국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春秋) 시대(서기전 770~서기전 476)가 열렸다. 춘추시대는 청동 병장기를 사용했기에 무력이 강한 나라가 주변 국가를 정복했다.
춘추시대 말기 중국인들은 쇠를 담금질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강철을 얻게 되었다. 강철로 만든 병장기는 무서운 전투력을 발휘했다. 철기 시대는 몇 개의 더 강한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전국 시대(서기전 475~서기전 221)를 열었다. 전국 시대는 가장 강력한 진(秦)나라에 의해 통일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한(漢)나라를 비롯한 후대 왕조가 이어지면서 지금의 중국이 만들어졌다.
도구의 발전과 함께한 중국의 역사 발전이 이러했다면 한민족도 유사한 역사 발전을 한다. 한민족은 중국인들과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할 정도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지만 한반도에서는 용산 문화 등과 비교할 만한 고대 문화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주목할 것이 한반도로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 문화를 전해준 요서 문화다.
일본인이 발견한 홍산 문화
적봉시 홍산구에 있는 홍산. 이 산은 철을 비롯한 광물질이 많아 붉은 색을 띤다. 광물질이 많은 산이 있엇기에 이곳에서는 황하문명보다 먼저 청동기문화를 꽃피울 수 있엇다. 1935년 일본인학자들이 이 산 뒤쪽에서 청동기유적을 발견함으로써 홍산문화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요서 문화의 대표인 홍산 문화는 1935년 이 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의 동아시아 고적조사단 학자들이 발굴에 나섬으로써 처음 확인되었다.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홍산(紅山)구에는 붉은빛이 도는 바위산이 있는데, 몽골인들은 이 산을 ‘올랑하드’로 불러왔다 올랑하드는 ‘붉은 바위’란 뜻이다.
이 지역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은 ‘올랑하드’를 한자로 음차해 적지 않고 그 뜻을 따라 ‘홍산(紅山)’으로 적었다. 그 결과 ‘올랑하드’는 사라지고 홍산과 같은 뜻을 가진 적봉(赤峰)이 이곳의 지명이 되고 홍산은 적봉시의 구(區) 이름이 되었다. 적봉시는 그 면적이 한국에 육박하는 9만㎢로 중국에서는 가장 큰 지급시 가운데 하나다.
일본 고적 조사대가 발굴한 곳은 홍산 뒤쪽이었다(紅山後 유적). 이곳에서 조사대는 서기전 19세기에서 서기전 8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토기와 청동기, 돌무덤 등을 발굴했다. 중국 사서에는 요서 지역에 청동기 문명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기에 일본 조사대에 의한 홍산 발굴은 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 문명은 중국이 혼란을 겪다 공산당에 의해 통일되는 사이 잊혀갔다.
1980년대 중국의 역사학계는 홍산 지역을 다시 조사했는데 이때 서기전 4000년의 신석기 문명이 발견되면서 일약 역사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본 조사대에 발견된 청동기 문명이 중국 사서에 기록돼 있지 않으니, 이보다 먼저 일어난 신석기 문명도 중국 사서에 기록된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발굴을 통해 서기전 4000년에 형성된 신석기 문명은 홍산 문화로 불리게 되고, 일본인들이 발굴한 청동기 문화는 ‘홍산 2기 문화’로 수정 명명되었다.
홍산 문화가 발견된 적봉시 홍산구에서 동쪽으로 15㎞쯤 가면 하가점(夏家店)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1960년 중국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공작대는 이곳에서 서기전 24세기에서 서기전 15세기 사이에 형성된 청동기 유적과 유물을 찾아냈다.
흥미로운 것은 하가점에서는 두 종류의 청동기가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하나는 표층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하나는 깊은 곳에서 출토되었다.
깊은 곳에서 나온 것이 서기전 24세기 전후 형성된 초기 청동기 문화였고(하가점 하층 문화), 표층부에서 나온 것은 서기전 14세기에서 서기전 7세기 사이에 형성된 후기 청동기 문화였다(하가점 상층 문화).
이러한 발굴을 통해 중국 역사학계는 적봉시 홍산구 일대에는 오래전부터 신석기 문명이 일어났고 이를 토대로 중원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 분리된 또 다른 청동기 문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 후 발굴에서 더 많은 문화가 발견되었다. 이를 시대순으로 정리하면 서기전 7000여 년에 형성된 소하서(小河西) 문화, 서기전 6200여 년쯤의 흥륭와(興隆와) 문화, 서기전 5200년경의 부하(富河) 문화, 서기전 5000여 년의 조보구(趙寶溝) 문화, 서기전 4000년 무렵의 홍산 문화, 서기전 2000여 년의 하가점 하층 문화 등이다.
이렇게 발굴해놓고 보니 이 문화를 만든 주인공이 누구냐, 이 문화를 만든 사람들의 후손이 누구냐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중원 문화와 황하 문명을 자랑해온 중국으로서는 복병을 만난 것인데 중국은 당황하지 않았다.
황화 문명에 통합된 양자강 문명
수송이 가능한 큰 강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문화를 만든다.
그렇다면 중국의 양대 강인 양자강에도 그러한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1972년 중국 학자들은 양자강이 흐르는 절강성 여요(餘姚)시 나강향(羅江鄕)의 하모도(河姆渡)라는 곳에서 서기전 5000년에서 서기전 4500년 사이에 번창했던 신석기 유적을 찾아내고 이를 ‘하모도 문화’로 명명했다. 중국 병법서인 ‘손자’에는 춘추 시대 오나라왕 부차와 월나라왕 구천이 서로 미워해 다퉜다는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가 있는데, 하모도 문화는 오나라와 월나라를 만든 종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 시대의 혼란에 참여하면서 일찌감치 황하 문명에 편입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있으므로 중국 역사학계는 요서 문명을 흡수하기 위한 노력에 들어갔다.
중국 처지에서 다행인 것은 요서 문명은 거란이나 여진(만주) 등으로 전파된 것 같은데 이들은 모두 중국에 동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일으켜 송나라를 압박하다 무너지면서 사라졌고, 여진족은 금에 이어 청을 세워 전 중국을 석권했으나, 1911년 손문이 일으킨 신해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중국 역사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1932년 일본은 청나라의 본거지인 만주 지역에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움으로써 다시 이 지역을 중국의 역사 공간에서 분리시켰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함으로써 만주국은 중국에 병합됐으니, 중국은 요서 문명을 제2의 하모도 문화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요하 문명에서는 ‘옥밭’이라고 할 정도로 수많은 옥기가 출토되었다. 옥기 중에는 뱀처럼 가늘고 긴 모양을 한 것이 많다. 요하 문명을 중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펼친 중국 측의 첫 번째 노력은 이 옥기를 근거로 이곳이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탄생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중국을 상징하는 용이 요서지역에서 만들어져 황하 문명에 들어왔다는 논리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요서 지역에는 용의 모델인 악어가 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힘을 잃었다.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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