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종교건축 변화의 역사적 자료
옥천 삼양리 옥천천주교회
1. 등록번호 : 제7호(2002년 2월 28일 등록)
1883년경,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가 옥천과 가까운 영동군 고자동(현, 상촌면 고자리)과 공수동(현, 양강면 지촌리)에 전교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886년 로베르 신부가 경상도지역의 전교책임을 맡고 대구로 부임한 후, 1900년을 전후하여 감곡본당의 부이용(R. Camillus Bouillon, 任加彌) 신부에 의해 이 지역의 본격적인 전교활동이 진행되었다. 옥천읍 이문동(현, 문정리) 43번지에 본당을 설립하였고, 한국인 사제인 홍병철(洪秉喆) 루가 신부가 초대 신부로 부임하였다. 1909년 5월 30일에는 본당을 죽동(현, 죽향리) 154번지로 신축·이전하였다. 1914년 11월 12일에는 관할하던 비룡 및 대전 공소(公所)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공소로 격하되었다가 1928년에 본당으로 환원되었고, 1943년에 다시 공소가 되었으나 1948년 본당으로 환원되면서 같은 해 7월, 현 위치에 25.78평의 한식 목조 성당을 신축 · 이전하였다. 1953년 9월, 충북지방이 메리놀외방전교회의 전교지역이 되면서 옥천본당의 변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1955년 9월 8일, 현 성당건물이 신축되었는데, 지붕 상량문에 건축연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삼각형 지붕틀 구조를 하고 있다. 대지 남측면에 서남향으로 길게 놓여, 성당 우측면을 따라 급경사의 주 진입로를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오도록 되어 있는 이 건물은 길이 47.9m, 폭 28.8m(익랑 포함)의 장방형으로, 최고높이 21.5m(종탑십자가 포함), 지붕높이는 9.3m이다.
신축 당시 조성된 측면 부출입구, 증축부의 출입구 및 창호, 그리고 내부 실의 구획 등에서 대칭구도가 일부 변형되어 있다.
전면에 3개의 박공형 지붕을 씌운 전실(narthex)을 두고, 중앙부에 3층 규모의 종탑을 배치하였으며, 내부는 10.8m의 비교적 넓은 폭을 기둥없이 예배공간으로 구성하고 각 칸(bay)마다 1∼2개의 긴 아치형 창 또는 출입구를 내었다. 증축부의 좌측은 유아실과 전시실, 우측은 고해성사실과 업무실, 후면부는 제의실과 성단으로 구성하고 있다. 첫 번째는 12대 하 빈첸시오(Vincent Hoffman) 신부의 재임(1963.7.15∼1967.10.1)시로, 종탑부의 부식된 함석마감을 기와로 변경하면서 4면의 환기창과 십자가형 첨탑(尖塔, pinacle)이 철거되었고, 두 번째는 1991년도에 실시된 증축공사로 기존의 일자형 평면 좌우와 후면에 각각 익랑(翼廊, trancept)과 제대부(apse)를 추가하면서 긴 십자가형(latin cross)으로 평면이 바뀌었다. 그가 청주교구에서 활동하던 기간(1945∼89)동안 옥천성당의 건축이 진행되었고,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성당건축과 관련하여 당시 주임신부였던 변 로이(Petipren Roy, 邊聖行) 신부가 백 수사에게 설계를 의뢰했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그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우리나라 종교건축 변화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서 2002년 2월 28일, 등록문화재 제7호로 등록·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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