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1 통권 583호(p328~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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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심장부를 가다
단군어머니 웅녀(熊女)의 자취, 우하량 곰뼈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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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환웅족과 곰족이 만난 곳은 ‘우하량(牛河梁)’이다”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내려면, 중국을 한국 들여다보듯이 보아야 한다. 중국의 역사와 지리를 꿰뚫지 않으면 동북공정에 맞서는 논리도, 뿌리를 찾는 노력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그러나 광대한 면적만큼이나 폭넓고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중국 관련 취재를 할 때마다 기자는 익숙하지 않은 지명과 복잡한 지방 체계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대표적인 혼란은 ‘시(市)’에서 온다. 중국의 성(省)과 자치구 아래 조직은 시(市)인데, 이 시 밑에 다시 ‘시(市)’와 ‘현(縣)’과 ‘구(區)’가 있다. 성 다음의 시를 ‘지급(地級)시’, 그 아래에 있는 시를 ‘현급(縣級)시’라고 하는데 보통은 구분하지 않고 그냥 시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급시의 중심부는 지급시 이름을 따서 부르기에, 지급시와 같은 이름을 가진 현급시가 있는 것으로 알아 혼란을 겪는 것이다.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인 광개토태왕릉비와 장군총이 있는 집안(集安)시를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집안시는 길림성 통화(通化)시 안에 있는 현급시다. 따라서 정확히 한다면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로 적어야 한다. 그런데 통화시라고 하는 현급시는 없는데도 중국인들은 통화시 중심부를 ‘통화시’로 통칭한다.
통화시 안에 있는 ‘현급 통화시’는 가상의 통칭(通稱)일 뿐이고, 실제로는 구(區)가 있다. 통화시로 통칭되는 지역에는 ‘동창(東昌)구’와 ‘이도강(二道江)구’가 있는데, 두 개 구를 통칭해 통화시라고 한다.
중국의 도시 중에는 선뜻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北京)은 한자 그대로 ‘북쪽에 있는 수도’이니, 중국의 수도명이라는 게 금방 이해된다. 그러나 소수민족 거주지인 자치구나 자치주·자치현의 도시는 한자만으로는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좋은 예가 내몽고자치구의 수도인 ‘호화호특(呼和浩特)’시다. 호화호특은 ‘푸른 도시’를 뜻하는 몽골어 ‘허허호트’를 중국식 한자어 발음에 따라 적은 것이다. 지명의 한자 풀이가 불가능한 도시는 대개 최근에 중국에 편입된 지역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역사 무대가 아니었던 곳이다.
중국 요녕(遼寧)성의 서쪽 끝엔 지급시인 조양(朝陽)시가 있는데, 이 조양시의 서쪽 끝에 현급시인 능원(凌源)시와 건평(建平)현이 있다. 건평현의 북쪽에는 내몽고자치구의 적봉(赤峰, 지급시)시가 있는데, 건평현과 적봉시 사이에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라는 산맥이 있다. 중국에서는 산맥을 ‘산’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유독 바람이 적고 따뜻한 곳, 우하량
‘노노아호’ 역시 몽골어나 만주어를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노아호산을 경계로 요녕성 조양시와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의 수계(水系)는 완전히 갈린다. 노노아호산 남쪽에 형성된 수계는 동북쪽으로 흐르다 기역자로 꺾여 남쪽의 발해로 빠지는 ‘대릉하(大凌河)’를 이루고, 노노아호산 북쪽의 수계는 적봉을 지나는 ‘영금하(英金河)’를 구성한다.
노노아호산 북쪽은 거대한 평원인데, 이 평원을 흐르는 영금하는 더 남쪽에서 흘러온 ‘노합하(老哈河)’와 합류한다. 영금하를 품은 노합하는 북쪽으로 흐르다 서쪽의 내몽고 고원에서 흘러온 더욱 큰 강인 서랍목륜하(西拉沐淪河)를 만나 ‘서요하(西遼河)’ 가 된다. 서요하는 시곗바늘 방향으로 굽이쳐 내몽고자치구와 요녕성 접경 지점에서 동요하(東遼河)를 만나 ‘요하’가 된다.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은 요하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하의 서쪽을 ‘요서(遼西)’ 지방으로 불러왔다. 고려 때의 명장 최영이 정벌하고자 한 곳이 바로 요동이다.(요동정벌) 이러한 역사로 적잖은 한국인은 한민족 활동무대의 동쪽 끝이 요하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한 역사지도도 대개 요하를 경계로 고구려가 중국의 수·당과 대치한 것으로 그려진다.
노노아호산의 서쪽에는 발해로 흘러드는 ‘난하(?河)’라는 수계가 만들어지는데, 난하를 건너면 멀지 않은 곳에 중국의 수도인 북경이 있다. 난하는 여름철에만 물이 흐르는 건천(乾川)이다. 비가 오면 강폭이 넓어지나 우기가 끝나면 누구나 건널 수 있는 하천이 된다. 난하는 선사시대 한민족과 중국인들이 국경으로 삼았던 곳이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고조선 흔적을 탐구하려면 요동에 얽매인 시선을 난하의 동쪽을 뜻하는 요서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 요서 지역은 만주와 한반도로 전래된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등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청동기는 중원지역으로 불리는 황하 중하류에서 출토되는 청동기와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대릉하를 중심으로 한 발해만과 노노아호산 사이, 그리고 대릉하, 영금하-노합하-서랍목륜하-서요하로 둘러싸인 적봉지역이 요서문명의 핵심지역이다.
요서문명을 만든 이들은 배를 이용해 요동반도로 건너가고, 요동반도에서 다시 한반도와 산동반도로 진출하면서 중국인들이 말하는 거대한 동이(東夷)문화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요서 지역 중심부에 있는 노노아호산 남쪽 자락에 ‘우하량(牛河梁)’이라는 곳이 있다. 우하량은 조양시 능원시에서 101번 도로를 타고 건평현 쪽으로 달리다, 능원시 경계가 끝나가는 부드러운 산지에 자리잡고 있다.
요서 지방은 노노아호산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산지가 없는 평원이기에 도처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 안에 있을 때는 복사열 때문에 따뜻하나, 차에서 내리면 점퍼 두 벌을 껴입어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춥다. 그러나 야트막한 산지가 이어지는 우하량만은 아늑했다.
바람이 세면 나무도 잘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우하량은 바람이 거의 없어 요서 지역에선 보기 힘든 소나무 숲이 형성돼 있었다. 안온한 땅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 고조선의 비밀이 숨어 있다.
모계사회 상징하는 女神殿
그 비밀을 찾는 탐험은 101번 도로 변에서 2006년 7월1일 능원시 인민위원회가 세운 안내석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하량 홍산 문화유지(牛河梁 紅山文化 遺地)’라고 쓰여진 자주색을 띤 안내석은 폭이 5~6m 됨직했는데, 여기에는 중국어와 영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홍산 문화는 서기전 3500년을 전후한 시기 서요하 유역과 대릉하 유역 그리고 연산과 발해만 사이에 살았던 종족들이 꽃피운 신석기 문화다. 이러한 홍산 문화의 후기 유적이 이곳에서 발굴된 우하량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은 황토로 이뤄진 노노아호산의 봉우리 3개 사이로 뻗어 있는 10여 ㎞ 길이의 계곡 좌우 5㎞의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여신전(女神殿)과 제단, 돌무덤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적들은 당시 사람들을 대신해서 희생된 다른 사람이나 동물들을 제사지내던 공간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역과는 격리돼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홍산 문화를 구성한 모든 지역과 쉽게 연결할 수 있는 꼭짓점 지역이기도 했다. 따라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지역이자 홍산 문화를 구성한 종족들이 모여서 정치를 하는 곳으로 기능했다.
제사를 지내고 종족 간의 문제를 논의하는 정치를 했다는 것은 홍산 문화가 이미 고대국가 단계에 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우하량 유적지는 1981년에 발견돼 1983년 처음 발굴이 이뤄졌다.
유적지는 모두 16개소다. |
이 안내문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신석기 문명인 홍산 문화를 고대국가 단계로 표현하고 우하량을 정치와 제사의 공간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고대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으나 중국은 신석기 시대에 이미 고대국가가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홍산 문화를 구성한 신석기인들은 우하량에 모여 무엇을 논의했을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평상시에는 신을 모시고 유사시에는 방어 공간으로 사용하는 아크로폴리스를 만들었다.
그리스 문화는 청동기 시절에 꽃핀 것이라 아크로폴리스에 자유자재로 대리석을 다듬어 거대한 신전을 세웠다.
그러나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의 문화인지라 흙과 돌로 그들의 건축물을 지어야 했다. 궁금증은 소나무 숲으로 덮인 도로 위쪽의 산으로 오르면서 더욱 커져갔다.
잠시 후 답사단은 중국어로 ‘여신묘(女神廟)’라고 쓰인 또 다른 안내석을 만났다.
‘여신묘’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우하량 여신묘’로 부르는데, 이는 잘못된 명명인 것 같다. 이곳은 ‘우하량 여신전(女神殿)’으로 불러야 한다. 여신묘의 ‘묘‘자는 종묘(宗廟)의 ‘묘‘자와 같은데, 여기서의 묘는 ‘사당‘이나 ‘신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능원시에서 건평으로 이어지는 101번 도로 ‘우하량홍산 문화유지비’가 있는 곳에서 내려 산으로 올라가면 ‘여신묘’(사진)라고 쓴 안내석이 나온다.
이 안내석 위 쪽에 여신상과 곰뼈가 나온 여신전이 있다.
가운데 中자 모양
이 유적을 발굴한 중국학자들도 같은 판단을 내린 듯하다. ‘그렇기에 중국어(한자)로 쓰인 안내문에도 여신전을 뜻하는 goddess temple로 적어놓았다. 죽은 사람은 무덤에 파묻지만 숭배하는 신은 드러내야 한다.
우하량 여신전에서 발굴된 곰뼈는 우하량 공작참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최근 사라져버렸다(위).
여신전에서 발굴된, 눈동자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여신의 두상(頭像)도 어디론가 옮겨지고 공작참 자료실에는 모조품이 전시돼 있다(아래 왼쪽).
아래 오른쪽은 中자 모양의 여신전 발굴 당시 사진이다.
사진 아래쪽이 북쪽이고 위쪽이 남쪽이다.
‘이 여신전(여신묘)‘은 흙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발굴 당시 여신상은 남북으로 25m, 동서로 2~9m인 ‘가운데 중(中)’자 모양의, 반(半)지하 깊이로 땅을 판 ‘움’ 속에 있었다. 반 지하 깊이의 가운데에는 주실(主室)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의 측실(側室), 북쪽에 한 개의 방이 있고 남쪽에 3개의 방과 별도의 방이 하나 더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발굴하기 전의 형태로 다시 흙을 덮어놓았기에, 보이는 것은 평범한 황토흙 언덕이었다. 능원시 인민정부는 이 여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파이프 기둥을 세우고 양철지붕을 씌워놓았다. 이 때문에 강한 햇빛에 지붕 그림자가 드리워져 여신전의 전체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었다.
이 여신전은, 눈동자 자리에 ‘둥근 녹색 옥(玉)돌’을 박은 여자 두상(頭像)과 이 두상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무릎 꿇은 여자 나신상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중국학자들은 흙으로 빚은 두상과 나신상을 합쳐 ‘여신상’으로 명명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여신전 바로 뒤인 산 정상부에는 잔돌을 사각형으로 촘촘히 박은 제단 터가 있다.
이 제단 터에서 반경 20~30m쯤 떨어진 주위에는 한 줄기로 이어지는 돌무더기 띠가 있다. 원래는 돌담을 형성하고 있던 것인데 오랜 세월 풍파에 무너져 돌무더기 띠가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 년 전인 서기전 3000년쯤, 사람들은 바람이 적어 유난히 아늑하게 느껴지는 이곳에 여신상을 모신 여신전을 만들었다.
그리고 뒤쪽에 잔돌을 박아 제단을 만들고, 주위에 돌담을 둘렀다. 홍산 문화인들은 이곳에 모여 공동의 제사를 지내고 종족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를 펼쳤으니, 이곳은 홍산 문화인들의 아크로폴리스다.
여신전 터를 둘러본 답사단은 101번 도로 변 바로 아래 ‘우하량 유지 제 2지점’이라는 안내석이 서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제2지점에서 두드러지게 눈길을 끈 것은 판판한 돌(板石)을 모아서 만든 ‘석관(石棺)’ 모양의 무덤이었다.
이 무덤은 텅 빈 채로 열려 있었는데, 그 안은 키가 150㎝쯤 되는 사람이 누울 만 했다.
2지점에서 멀지 않은 우하량 제5지점의 돌무덤군(群)에서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심양(瀋陽)에 있는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우하량 2지점에는 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돌을 쌓아 기단을 만든 무덤자리(위)와 판석을 벽돌처럼 쌓아서 석관(石棺)처럼 만든 돌무덤이 있다(아래 왼쪽). 요녕성 박물관에서는 우하량 5지점에서 발견된, 인골이 들어 있는 돌무덤이 전시돼 있다(아래 오른쪽).
제2지점에는 잔돌을 원형으로 둘러 박고 그 안에 네모꼴로 잔돌을 박아 올려 기단을 만든 무덤 자리도 있었다.
이러한 무덤 터는 우하량 도처에서 발견된다. 16개 발굴지 가운데 여신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돌무덤 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2지점의 돌무덤 주변에는 주황색 토기 파편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신석기인들이 이곳에서 토기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토기에 음식을 담아 제사를 지내고 나서 음식은 참석자들에게 돌리고 토기는 깨뜨려 뿌리는 의식을 치렀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다른 문화지역으로 들어갈 때 가장 먼저 잊는 것은 언어라고 한다. 2~3세대 이민자는 자신이 한국계라는 것은 알아도,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한국계가 아닌 다른 계와 결혼했다면, 그가 할 수 있는 한국어는 “엄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맛에 대한 기억은 강하게 남아 음식문화는 쉽게 되살릴 수 있다. 어린 시절 맛있게 먹던 한국 음식에 대한 기억이 달라진 문화 속에서도 한국 음식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음식보다 더 오래 유지되는 것이 장례(葬禮)의식이다.
어느 종족이든 장례를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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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로 이어지는 돌무지무덤
돌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시신을 놓은 널방을 만든 무덤을 ‘적석총(積石塚)’,
우리말로는 ‘돌무지무덤’이라고 한다.
선사(先史) 시대에 만들어진 이러한 무덤군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수없이 많이 발견된다. 광개토태왕릉과 장군총을 비롯해 집안시 일대에서볼 수 있는 고구려의 왕과 귀족의 무덤은 전부 돌무지무덤이다.
고구려 적석총의 원형이 우하량에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돌무지무덤이 아닐까.
돌을 네모꼴로 박아 넣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무덤을 만든 2지점의 돌무지무덤은, 피라미드 형태로 큰 돌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널방을 만든 장군총의 원형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구려는 돌을 자유자재로 잘라내던 철기 시대의 나라이고, 홍산 문화는 신석기 시대였으니 무덤 규모만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2지점을 둘러본 답사단은 차에 올라 건평현 쪽으로 난 꾸불꾸불한 길을 5분여 달리다 샛길로 빠져, 안쪽 건물에 ‘요녕성 고고문물 연구소 우하량 공작참(工作站)’이라는 간판이 붙은 자료실을 찾아갔다. 답사단은 관리자를 설득해 굳게 닫혀 있는 이 자료실의 문을 열게 한 후 눈알 자리에 녹색 옥돌을 박은 문제의 여신 두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탈 바가지를 연상시키는 두상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다. 표정으로 봐서는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여신 두상은 복제품이다. 진품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상과 결합시킨 여자 나신상도 볼 수 있었는데 이것도 복제품이었다. 여자 나신상은 단전 자리에 두 손을 맞잡은 반가부좌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이 기사 첫장 사진 참고). 이 두상이 여신상이라는 것은, 유방이 있는 나신상과 결합할 수 있었기에 내려진 판단이라고 한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여신상뿐만 아니라 옥돌을 갈아서 만든 공예품도 발굴되었다. 이러한 옥 공예품을 중국학자들은 ‘옥기(玉器)’로 표현하는데, 옥기는 우하량뿐만 아니라 홍산 문화가 펼쳐진 전 요서 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자료실에는 ‘돼지용(龍) 모양의 옥기’라는 뜻으로 ‘옥저룡(玉猪龍)’으로 명명된 것도 있었다. 용은 실존하지 않는 동물이다. 용도 없는데 과연 돼지용이 있었을까?
돼지용은 이 유물을 발굴한 중국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중국학자들은 요서 지역의 유적을 발굴하면서 이곳에서 중국 최초의 용이 발견되었다는 이상한 가설을 내세웠다.
이곳에서 대량 출토된 옥기에 새겨진 짐승 문양을 보고 “용을 새긴 것”이라고 했는데, 새긴 것이 용 같지 않으면 “돼지용을 새겼다”는 식으로 빠져나갔다.
왜 중국은 곰뼈를 감추었는가
한때 중국의 상징인 용은 뱀에서 나왔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요즘은 악어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주장이 우세하다.
요서 지역에는 악어가 살지 않는다.
따라서 악어를 용의 원형으로 본다면, 악어를 본 적도 없는 홍산 문화인들이 용을 새겼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돼지를 새겼다는 주장이다.
동부 시베리아와 몽골 지역에 분포하며 알타이계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을 가리켜 ‘퉁구스족’이라고 하는데, 퉁구스족은 일찍이 돼지를 기른 종족으로 꼽힌다. 돼지는 전세계에서 여러 종족이 길렀지만, 인류학과 고고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동시베리아에 있는 종족이 가장 먼저 돼지를 기른 것으로 알려져, 이 지역에 사는 종족을 퉁구스족으로 부르게 됐다고 한다.
우하량 일대의 신석기인들도 돼지를 길렀다. 지금 사람들은 돼지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신석기인들에게 돼지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중국학자들은 악어가 없는 지역에서 홍산 문화인들이 용을 새긴 옥기를 제작했다고 주장하다 반론이 일자 돼지용을 새긴 것이라며 ‘옥저용’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이다.
선사 시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에 선사 시대의 유적과 유물은 이를 찾아낸 사람이 어떤 이름을 붙이는가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경우가 많다.
용이면 용이고, 돼지면 돼지여야지 돼지용은 있을 수 없다.
중국학자들이 마구 붙인 용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거론하기로 한다.
“용이 아니라 태아를 새긴 것”
자료실에는 전시돼 있지 않지만 우하량 유지 제16지점의 무덤에서는 또 다른 인골과 함께 사람 모습을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가 나왔다. 중국학자들은 무당을 새긴 것으로 보고 이 옥기를 ‘옥무인(玉誣人)’으로 명명했다.
그리고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한 옥기도 나왔는데 중국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으로 판단하고 ‘옥봉(玉鳳)’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이 옥기에 새겨진 문양은 봉황보다는 삼족오(三足烏)에 가깝다.
옥무인과 옥봉도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중국학자들은 홍산 문화는 용과 함께 봉황을 등장시킨 최초의 문명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옥무인과 옥봉은 누가 봐도 사람과 새를 새긴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용은 아니다 보니 최근 다른 주장이 등장했다.
요즘 학자들은 홍산 지역에서 발굴된 굽은 옥기는 어머니 뱃 속에 있는 태아(胎兒)를 본뜬 것일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홍산 문화는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모계(母系)사회였다.
유아의 생존율이 낮아 인구 증가를 위해 다산(多産)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하량의 여신전도 다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므로 홍산 문화인들은 신체해부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토대로 사람의 태아나 짐승의 태아를 새긴 옥돌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홍산 지역에서 출토되는 굽은 옥이 사람과 짐승의 태아를 새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요대 등에는 곡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곡옥은 백제와 가야, 일본의 왕릉에서 출토된 관에도 많이 달려 있다. 이 곡옥은 홍산 문화인들이 만든 태아형의 굽은 옥에서 발전한 것이 아닐까.
홍산 문화인의 후예가 한반도와 일본으로 흘러갔다면 그들이 다산을 숭상하기 위해 만든 곡옥 제작의 전통이 신라와 가야 백제 일본의 관에 달리는 곡옥 장식으로 발전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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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문화의 신석기인들은 돌에 가는 방법으로 자유자재로 옥기를 제작했다.
우하량 1지점인 여신전(여신묘)에서 출토돼 공작참 자료실에 전시된 옥저룡(玉猪龍, 오른쪽 위). 우하량 16지점의 돌무덤에서 나온 새 모양의 옥기(오른쪽 아래).
중국 학자들은 봉황을 새긴 것이라고 하나 삼족오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한반도에서도 옥공예가 발달했다. 경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 등에는 태아 모양의 굽은 옥(曲玉)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왼쪽). |
공작점 자료실에서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옥저용이 아니라 ‘웅(熊)’이라는 제목만 붙여놓은 빈 전시대였다.
우하량의 여신전에서는 여신 두상과 나신상, 옥저용뿐만 아니라 곰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곰 턱뼈는 최근까지 이곳에 보관돼 있었다고 하는데, 답사단이 찾아갔을 때는 빈 전시대만 남아 있었다.
우하량 여신전에서는 ‘곰의 발’ 모양을 한 토기도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이 곰발 토기도 전시돼 있지 않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신성한 곳이니, 신석기인들이 쓰레기를 버리는 심정으로 그곳에 죽은 곰뼈를 던져 넣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곰을 키우던 우리였을까?
곰뼈와 여신상 그리고 흙으로 만든 곰발의 출토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답사단원들은 조심스럽게 ‘웅녀족(熊女族)’ 이야기를 꺼냈다. 웅녀족은 곰을 숭배했다. 서기전 3500년이면 모계사회였으니 곰족은 곧 웅녀족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제사터이니 웅녀족은 이곳에서 성스러운 제사를 지낸다. 우하량은 신성한 지역인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답사단은 차량을 이용해 노노아호산을 넘기도 했다. 노노아호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중심부에 제법 숲다운 숲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듬성듬성 나무가 서 있었다. 지역인들에 따르면 요서 지역에서는 호랑이를 볼 수 없다고 한다.
호랑이는 포식자인지라 많은 동물을 먹잇감으로 하는데, 노노아호산을 중심으로 한 요서 지역은 호랑이가 살기에 적합지 않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초식을 할 수 있는 곰이 가장 강력한 동물이었을 수도 있다. 곰을 숭배하는 종족은 널리 퍼져 살았기에 호랑이를 숭배한 종족보다 우세했다.
이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신은 곰일 수도 있고 다신을 상징하는 여신일 수도 있다.
이러한 때 금속을 다룰 줄 아는 종족이 이곳으로 들어온다.
이들은 아주 우연하게 금속을 다루는 기술을 개발했다.
광물질을 품고 있는 돌을 불에 집어넣으면 광물질이 녹아나온다.
광물질은 온도가 떨어지면 딱딱하게 굳는데, 굳기 전에 일정한 틀에 넣어 굳히면 토기는 물론이고 나무보다 단단한 도구를 만들 수 있다.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이들은 광물질이 나오는 돌을 찾을 수 있었고, 녹인 광물질을 이용해 도구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철도 찾아냈으나 떨어뜨리면 ‘퍽석’ 깨지는 무쇠인지라 도구의 재료로는 부적합했다. 구리와 아연을 섞은 청동이 도구를 만드는 데 훨씬 더 유리했기에 이들은 청동기 문화를 만들어갔다. 청동기 제작술을 가진 이들이 곰과 여신을 모시는 종족과 결합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청동기 문화는 노노아호산의 북쪽인 내몽고자치구 적봉시 하가점(夏家店) 마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청동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이 남하해 우하량 일대에서 곰족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
이들은 곰족을 지배하며 부드럽게 융화했다.
고조선족의 탄생
한민족이 단군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처음 밝힌 사서는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다. 책을 내는 사람이면 누구든 첫머리만큼은 매우 신중하게 서술한다.
삼국유사는 첫장에 ‘고조선’이란 제목을 붙이고 고조선과 단군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김원중씨가 번역한 민음사 출간의 삼국유사 첫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고기』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는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여 환웅에게 천부인 세 개를 주어 즉시 내려 보내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과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했다.
그 당시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한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항상 기원했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너희가 이것을 먹되,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는 쑥과 마늘을 받아먹으면서 삼칠일 동안 금기했는데,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금기를 지키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의 몸이 되지 못했다.
웅녀는 혼인할 상대가 없어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빌었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고 불렀다.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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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거론된 환웅은 종족 이름이자 종족 대표자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청동기 제작술을 가진 3000여 명의 환웅족은 노노아호산 우하량의 신단수 아래, ‘신시’라고 할 수 있는 곳으로 정복하듯이 옮겨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온 곰족과 호랑이족 가운데 좀 더 세력이 큰 곰족과 결혼 동맹을 맺고 대표자로 단군을 뽑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신시를 무대로 한 단군족(고조선 족)이 탄생한 것이다.
금속기가 등장하면 사회의 생산량은 더욱 커진다. 갈아서 만드는 돌칼보다는 틀에 넣어 만드는 청동검을 훨씬 더 많이 만들 수 있다. 병장기의 생산이 증가하면, 작물을 재배하는 것보다 인접한 종족이 재배한 것을 빼앗아오는 것이 훨씬 더 빠르게 부(富)를 축적하는 길이 된다.
다른 종족을 공격하는 것은 남성의 임무이니 사회와 가족은 빠르게 힘있는 아버지 체제로 재편된다. 부계(父系)사회가 등장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업적을 지키기 위해 가장 신뢰할 수 있고 힘이 센 큰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니 장자상속(長子相續)을 기본으로 한 고대왕국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회는 부족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성한 곳에 모여 단결을 강조한다.
이때 제사를 지내는 부족의 대표가 단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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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지역은 소금 공급이 가능했다
신단수가 있는 산이 태백산이다.
삼국유사는 태백산을 '太伯山'으로 적어놓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태백산을 백두산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신석기 문명과 청동기 문명은 평원에서 일어났으니, 백두산 고원지대는 단군의 무대가 될 수 없다.
태백산은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우두머리산’이다. 단군족이 요서에 포진한 것이 옳다면, 이 지역 최고봉인 노노아호산이 태백산이 될 수 있다.
문명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살 수 있는 편평한 곳에서 일어난다. 물이 있어야 하고 땔감 공급이 가능한 숲이 있어야 한다. 물은 곧 강인데 강은 물자를 운반하는 고속도로 역할도 한다. 그리고 반드시 소금의 공급이 가능해야 한다. 사람은 소금 없이 생존할 수 없다.
내륙에 있는 홍산 문화는 어떻게 소금을 확보했을까.
신석기 시대 인류는 배를 제작했으므로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천일염을 배에 실어 강을 이용해 내륙 깊숙한 곳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노노아호산 남쪽에 발해로 이어지는 대릉하가 있으니 소금을 공급받을 수 있다.
노노아호산 북쪽의 내몽골 초원에는 노합하 영금하 등 서요하 지류가 들어오지만, 발해에서부터 서요하를 따라 소금을 운반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노노아호산이 높지 않으므로 수레나 짐승의 힘을 이용해 발해에서 생산한 소금을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노아호산 북쪽의 홍산 문화인들은 발해에서 나온 소금에만 의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광개토태왕릉비에는
‘영락(광개토태왕 연호) 5년 을미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 부산을 지나 염수 상류에 이르러 3개 부락 600~700 영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 말 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永樂五年歲在乙未, 王以稗麗不□□人, 躬率往討. 過富山負山, 至鹽水上, 破其三部洛六七百營, 牛馬群羊, 不可稱數)' 라는 글귀가 있다.
(□로 표시한 것은 판독되지 않는 글자)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소금강이라는 뜻의 염수(鹽水)인데,
광개토태왕이 이 강 상류까지 쳐들어갔다고 밝히고 있다.
서요하로는 ‘서랍목륜하(西拉沐淪河)’가 흘러드는데, 학자들은 염수가 서랍목륜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서랍목륜하는 현재 짠물이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 이곳을 파면 소금기를 머금은 물이 올라왔다고 한다. 소금우물(井鹽)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요서 지역을 맴돈 고조선 도읍지
한국 역사학계의 큰 고민 가운데 하나는 고조선의 위치를 비정(批正)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 최고(最古)의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는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았던 곳이다. 혹은 왕의 도읍터 왕검이라고 한다(平壤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고 밝혀놓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고조선은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삼국유사는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밝혀놓았다.
앞에서 인용한 삼국유사의 이 부분을 옮기면 이렇다.
『위서』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고 불렀으니 바로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다.’ …중략…
단군왕검은 당요(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백악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이 즉위하던 기묘년에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그 후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살면서 산신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1908세였다. |
단군이 1500년 동안 다스리고 1908세까지 살았다는 것은, 자연인(自然人)인 단군이 장수했다는 뜻이 아니다. 여러 명의 단군이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의미다.
고조선을 다스린 단군이 몇 대였는지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47대 내외인 것으로 밝힌 사서가 많다.
‘삼국유사’는 고조선이 도읍지를 아사달→백악산 아사달→장당경→아사달로 옮겼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에서 평양을 언급한 것과 맥이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차이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고조선의 흔적을 찾아나선 답사단은 1주일 동안 노노아호산 남북을 뺑뺑 돌다시피 했는데,이러한 여행을 통해 본 노노아호산 주변은 겨대한 평야였다. 노노아호산과 연산 그리고 의무려산 갈래를 제외하면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밭이었다. 평양(平壤)은 곧 편평한 땅이니, 요서 지역의 광대한 평원이 평양일 수 있다.
선사 시대, 사람들은 자연재해나 전쟁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터전을 옮겼는데, 그때마다 살던 곳의 지명도 함께 가져갔다. 요서 지역에 살던 이들이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갔다면 ‘평양’이란 지명도 함께 옮겨 갔을 수 있다.
발해는 작은 바다다. 서해라고 하는 ‘큰 만(灣)’의 제일 안쪽에 있는 만이니, 다른 바다에 비해 풍랑이 작다. 이러한 바다에서는 배를 운항하기가 쉽다. 대릉하나 요하 하류에서 배를 몰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요동반도를 만나므로 요동반도는 어렵지 않게 홍산 문화의 영향권이 되었을 것이다.
요동반도는 중국의 산동반도를 마주 보고 있으니 요동반도에 터 잡은 고대인들은 배를 타고 산동반도로 진출했을 것이다. 이로써 산동반도에도 요서지방과 같은 문화가 형성된다. 산동반도를 동이(東夷)족 지역으로 밝힌 중국 사서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기에 장보고를 비롯한 통일신라인들도 대개 산동반도로 옮겨와 생활했던 것은 아닐까. 이러한 산동반도나 요동반도에서 하루 정도 항해하면 대동강이나 한강 하류에 도착할 수 있다. 이들은 대동강과 한강 하구에 유사시 배로 대피하기 위한 장소를 만든다.
나당연합군에 밀린 백제인들은 일본 규슈(九州)섬의 다이자이후(大宰府) 지역 등으로 피신했다. 그와 똑같이 요서 문화인들도 한반도의 대동강과 한강 주변에 해외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다. 그로 인해 대동강에서 가까운 묘향산과 한강 하류 강화도 마니산에 단군과 관련된 시설이 들어선다. 증거는 없지만 이는 그럴듯한 가설이다.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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