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중국내 유적들 역사는 과거와 오늘의 대화다. 기억하지 않고, 묻지 않는다면 역사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중국에서 펼쳐진 항일무장투쟁 역사도 우리가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역사가 될 수 없다. 경향신문은 광복 61주년을 맞아 방치된 중국 내 항일투쟁 유적지 답사를 통해 묻혀가는 독립투사들의 조국혼을 되새기고자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와 ‘운암 김성숙 기념사업회’가 각각 주최한 이번 답사에는 경향신문 취재팀 외에 독립투사 후손과 역사학자, 대학생들이 참여했다.
중국 젊은이들이 몸을 흔드는 디스코장으로 변한 훈련장, 폐허만 남은 숙소…. 빛나던 중국 내 항일 무장 투쟁의 역사 유적지가 하나 둘씩 사라지는 현장을 지켜보는 후손들의 걸음에는 장탄식이 뒤따랐다. 60여 년 시간이 지나면서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지나간 세월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중국 옌안(延安) 근교 뤄지아핑(羅家坪). 누런 색깔에 때가 잔득 묻어 있는 비석이 눈에 들어온다. 비석 표면에는 붙여놓았다가 떼어낸 종이 자국이 덕지 덕지 붙여 있다. 비석에는 ‘조선혁명군정학교 구지’라고 적혀있다. 1945년 조선독립동맹의 무장조직인 조선의용군이 세운 항일군정학교가 있던 자리다. 나라 잃은 설움을 비수처럼 가슴에 꽃고 훈련을 받은 뒤 고단한 다리를 쉬었던 곳이다. 그러나 토굴 내부는 흙더미가 들어찼고 외벽에는 낡은 창틀만 남아 있어 스산함을 더했다. 중국 옌안 근교 나가평에 위치했던 조선혁명군정학교 근처 숙소. 김두봉 등 독립운동가가 머물렀던 이곳은 현재 폐허로 남아있다. 옌안에서 기차로 8시간거리에 있는 시안(西安). 광복군 제2지대의 주둔지가 있었던 곳인데 이곳 사정도 옌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둔지 건물은 사라진지 오래고 그 자리에는 양곡창고가 비스듬하게 서 있다. 지대장이었던 이범석 장군의 가택지에는 현지 중국인이 새로 집을 지어버렸다. OSS(Office Strategic Service) 훈련을 받았던 장소가 있다. 이 훈련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사찰 미타고사(彌陀古寺) 근교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한결 찾기가 쉽다. 하지만 이곳 역시 광복군의 훈련 장소임을 알리는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마련돼 있지 않았다. 1941년 광복군의 주력부대로 활약했던 한국청년훈련반 훈련장소였던 대학교 내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한국청년훈련반에서 활동했던 선친을 둔 이형진씨(53)는 “옌안에서 밤새 기차를 타고 오는 내내 아버님의 훈련지를 방문한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면서 “평생을 아버지를 미워했지만 현장에 와보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이 커진다”고 울먹였다. 한국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는 부양시내. 광복군 3지대원들이 ‘탈출기’라는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던 자리에 지금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이 들어서 있다. 시안에서 기차로 하루 넘게 걸리는 부양(阜陽)엔 1945년 6월 당시 한국 광복군 제3지대의 성립 장소가 있다. 현재 이곳은 2층 규모의 디스코장으로 변모했다. 보기에도 요란한 DISCO란 영문글자가 크게 씌어진 이곳 역시 팻말이나 표지판 하나 없다. 시내 큰길가에 놓인 디스코장 앞을 무심히 지나치는 중국인들은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탐방단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인근 채석장에서는 발파작업으로 끊임없이 폭파음이 들려왔고, 벽면에는 붉은 페인트로 ‘산불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흉물스럽게 적혀있었다. 낯선 타국에서 독립의 일념 하나로 젊음을 바친 조선청년들의 흔적이 난징의 산중턱에서 그렇게 또하나 스러져가고 있었다. 1935년 4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를 졸업한 김원봉 계열의 학생들과 민족혁명단 인사들이 6년동안 거주했던 호가호원은 현재 빈민촌으로 변해있어 제대로 찾아왔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중국 항일투쟁지가 많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씨는 “지금은 중국까지 찾아오는 후손들이 있지만 2~3세대가 지나면 이곳이 후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 했다. - 이고은 · 이호준 기자
“아~, 이곳이 마지막 항일투쟁의 현장이라니….”
광복된 조국의 모습을 그리며 신산고초를 마다하지 않았던 항일투사의 숨결은
비석 뒷편으로 난 좁은 산길은 광복투사들이 머물렀던 토굴로 이어진다.
당시 광복군 활동을 기억하는 루펑주씨(83)는 “사냥개를 유난히 사랑하던 이장군의 따뜻했던 모습이 어렴풋하나마 생각난다”면서 “광복군들이 돌아간 이후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현지 주민들의 증언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시안에는 세계2차대전 중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이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시안 내 시뻬이대학.
시안의 반대쪽에 있는 난징의 상황도 후손들의 가슴을 갑갑하게 했다. 의열단이 만든 군사정치학교가 훈련장으로 활용하던 천녕사는 폐가처럼 방치돼 있었다.
난징 시내에 위치한 민족혁명단의 거점지 호가화원은 아예 흔적조차 찾을수 없었다.
대학원생 고호씨(29)는 “남의 땅에서 항일운동을 해야했던 역사도 서러운데 이렇게 잊혀져 가는
- 경향, 2006년 08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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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에 물린 반쪽 광복운동史 지난 12일 중국 허베이성 한단(邯鄲)의 진기로예 열사릉원. 이곳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좌파계열 독립운동가 진광화 · 윤세주 열사의 묘가 모셔져 있었다. 두 열사는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하다 1942년 6월 중국 태항산에서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한 ‘마전(痲田)반격전’에서 전사한 투사들이다. 11박12일의 중국 화북지역 항일투쟁지 답사일정 중 이 능원을 찾은 단원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후손은 답사 주최측의 두 열사 추모행사에 불만을 나타냈다. 또 다른 단원은 “옛날 같았으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을 일”이라고도 했다. 아니 어쩌면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일는지도 모른다. 광복 후 남한의 민족주의 계열은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제 자리를 잃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북한으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부끄러운 역사’는 오늘까지도 청산되지 않고 있다. 광복운동은 1911년 임시정부 수립 후 광복이 될 때까지만 해도 좌 · 우를 구별하기보다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추구했다. 이에 대한 좌·우 편가르기는 광복 이후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불거진 것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사의 자리를 대신 꿰찬 이념이란 ‘괴물’은 여전히 살아 꿈틀대고 있다. 젊음을 나라에 바친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그 뒤에서 빛이 바랜 채 있다. 언제가 돼야 우리 사회가 이들을 제대로 보게 될까. 열흘 넘게 중국 대륙을 답사하며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이념 초월한 역사교육 절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읽어보셨죠? 남과 북 어느쪽으로도 갈 수 없어 제3국을 선택했다가 바다에 몸을 던지는 주인공. 지금 남과 북 모두에서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져 가는 광복운동가들은 소설 ‘광장’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들이에요.” 지난 13일 충칭 광복군 제1지대 본부 터. 장규식 교수(중앙대 사학과)는 “공산주의든 무정부주의든 이념보다 광복과 해방을 간절히 원했던 중간파 광복운동가들은 진정 광복이 찾아온 뒤에는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불운한 사람들”이라며 말을 꺼냈다. ‘위치엔 고속도로’가 개통돼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광복군터를 둘러본 뒤였다. 방치된 채 사라져 갈 수밖에 없었던 거죠.” 끊임없는 정권의 견제와 위협 속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북쪽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광복운동가들이 마찬가지 상황에 처했다. 그러면서 “한국전쟁이 끝나자 다른 체제의 이념을 수용할 수 있는 포용력은 더욱 좁아졌고, 더욱 극단적인 이념성향이 선호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전쟁과 동시에 항일역사에서 완전히 소외된 이들 중도 좌 · 우파 광복투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한국 분단의 가장 비극적인 희생양”이라고 평가했다. “우리나라에서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 유적지를 중국에서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꼬집었다.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면서 “좌우의 균형이 잡힌 역사관이 부재했던 것이 바로 좌파계열 광복운동가들을 뒤늦게 평가하게 된 주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장교수는 “우리가 이제야 뒤늦게 이들 좌파광복운동가의 자취를 되짚어보려 하지만 항일운동 당시로부터 60~7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남긴 사료와 유적을 발견하기는 많이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들 사료와 유적들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정부측의 관심과 지원을 촉구했다. - 경향, 이호준 기자 - 2006년 08월 14일
“중국 공산당을 위해 싸운 이들을 왜 기려야 합니까.”
이념대립의 찌꺼기는 이렇듯 이국의 항일열사 묘역에도 남아 있었다.
독립운동 역사가 외면당한 한국 사회에서 친일잔재 청산 구호는 초라하게 잦아들었다.
올해로 광복 61년째다.
- 경향, 2006년 08월 14일, 사회부 이고은기자
장교수는 “광복 후 남과 북이 갈라지며 이념대립이 심화되던 시점에 민족통일을 주장하며 극단적 이념대립을 경계했던 인물들은 결국 완고한 체제 안에서 이방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들은 잊혀졌고, 이들이 곳곳에 남긴 흔적들도 보호받기는커녕
남쪽의 경우 운암 김성숙 선생과 같은 좌파광복운동가들은
장교수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한국전쟁이었다”고 규정했다.
그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내 곳곳의 항일유적들도 제대로 보존되고 있지 않다”면서
그는 “우리 사회가 광복 60주년을 맞은 지난 해에야 겨우 사회주의계열 광복운동가들을
장교수는 “좌우로 극단적으로 편향된 교육과 역사관은 결국 또다시 사회의 이념적 성숙을 가로막게 되고
그는 또 “좌파항일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이 늦어진 만큼 지속적인 탐방과 조사활동이 필요하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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