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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한일무장투쟁 발자취를 따라] 2. 좌파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소회

Gijuzzang Dream 2008. 4. 13. 18:51

 

 

 

 

 

 좌파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소회

 

 

 

“미안합니다. 한국말을 하지 못해서. 한국말을 배우려해도 나이가 들어 이제는 너무 늦어버렸어요.”

항일투사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가운데)와

운암 김성숙의 아들 두건씨(왼쪽), 두련씨(오른쪽)

베이징에서 만나 선친에 대한 추억과 좌파 광복운동가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13일 베이징에서 만난 고영광씨(69)는 거듭 미안하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고씨는 님 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으로 잘 알려진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김산의 아들.

단정하게 빗어넘긴 머리에 세로줄무늬 흰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조금 긴장한 모습이었다. 셔츠 주머니에 볼펜이 제대로 꽂혀 있는데도 자꾸만 매만졌다.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아버지는 저처럼 오래 사시지 못했죠”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버지 모습을 기억하지 못했다.

김산은 고씨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38년,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33살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마흔이 다 되도록 친부에 대한 말을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스파이 누명을 쓰고 처형당한 아버지로 인해 아들이 위험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들의 성을 친부가 아닌 재혼한 중국인의 것을 딴 이유도 이 때문이다.

중국 전체를 죽음의 늪으로 빠뜨린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고 나서 오히려 많이 힘들었다”면서 “훌륭한 항일운동가인 아버지가

중국과 한국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잊혀가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고씨는 1978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공산당 중앙조직부에 김산의 명예회복 조사를 요구했다.

6년여간의 공방 끝에 중국 공산당은 김산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어머니를 떠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아버지의 철학과 열정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제는 저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분들도 아버지에게 관심을 쏟아주셔서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직업을 묻자 그는 “국가경제무역위원회 과학기술부 부국장을 지냈고 8년전 퇴직했다”고

짤막하게 말했다. 다른 중국인들보다 유난히 검은 피부여서 굴곡 많은 인생역정을 경험했을 법했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닫았다. 다만 미소를 지으며 “괜찮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다. 광복 60년 만에 정부에서 김산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기 때문.

당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수여하는 것은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일이라는 반대도

만만치 않았지만,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2년에 걸친 그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맺었다.
“이념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서훈을 받았습니다.

공산주의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가 항일투쟁으로 서훈을 받으셨다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죠.”

두건(72), 두련(61)씨 형제는 광복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의 후손이다.
두씨 형제는 운암 선생이 중국에서 활동하던 당시 만난

중국여성 두혜련과 사이에서 태어난 3남중의 둘째와 셋째 아들이다.

두혜련은 운암선생이 한국으로 떠난 뒤 아들들의 성을 자기 성씨로 바꿨다.

두건씨는 중앙미술학원 유화학부 부학부장을,

두련씨는 국가정보원센터 부주임을 각각 거친 뒤 퇴직했다.

두건씨는 “언제나 등잔불을 켜고 늦게까지 글을 쓰시던 바쁜 분이셨지만,
시간이 나면 우리와 함께

연을 띄우고 수영을 가르쳐 줄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었다”고 아버지를 회상했다.

그가 12살이던 1945년 조선은 광복을 맞았고

운암 선생은 그해 12월 광복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안고 조선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귀국한 뒤 우리 가족은 정말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민족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을 곁에서 보아왔기에 한국에서 이상을 실현하고

정치적 신념을 실천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습니다. 남겨진 가족들을 정말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현실적인 어려움이나 그리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진정한 고난은 정작 해방 이후부터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운암은 귀국후 임시정부의 미군정 참여에 반대하며 반소 · 반미 운동을 벌이다

1946년 미군정법 위반으로 6개월간 전주감옥에 수감됐다.

또 1957년에는 근로인민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됐고,

1961년에는 5 · 16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반국가 행위자로 체포됐다가

독립유공자임이 감안돼 집행유예가 선고되기도 했다.

운암은 1969년 4월12일 71세를 일기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극빈한 삶으로 인해 병원비는커녕 임종한 뒤 퇴원비조차 없었던 쓸쓸한 죽음이었다.

두건씨는 “아버지의 사회주의 신념과 정치적인 사상, 관념 등이
귀국 후

다른 통치자들이나 집단과 갈등을 일으켜 정작 그 분의 항일업적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모든 열정을 바쳐 조선광복만을 원했던 아버지의 인생이

저토록 고난스럽게 끝이 났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안타깝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는 “중국도 문화대혁명 등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아버지가 저술하신 책이나 사료 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면서

“가능하다면 한국과 중국 정부가 협의해 관련 사료를 발굴하는 데 힘썼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두건 · 두련 형제는 지난 1990년과 1992년 각각 전시회와 학술행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두 형제는 “아직까지 한국에 남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가 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서

“한국에서 초청해 준다면 언제든 한국을 방문해 아버지의 흔적이 남은 장소들을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 베이징, 이호준기자

◇ 15세 때 독립투신 김산

님 웨일스 저서 ‘아리랑’의 주인공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독립 운동가였다.

1905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5세 때 만주 독립군훈련소에 입소한 뒤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때 김충창(운암 김성숙의 다른 이름)의 지도를 받아 사회주의자가 됐다.

1935년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했다.

1937년엔 항일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했다.

이때 님 웨일스를 만나 인터뷰 형식의 ‘아리랑’이 탄생했다. 이 책에서 김산은 “천부적 지도자의 자질을 타고난 진보적 사고의 소유자”로 묘사됐다.

그러나 1938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일본 스파이로 몰려 체포된 후 극비리에 총살당했다.

가족들의 청원에 따라 46년만인 1984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명예가 회복됐다.

정부는 지난해 김산에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서훈했다.


◇ 좌파 정신적 스승 김성숙

운암 김성숙은

김산 등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스승’이었다.

1916~18년 용문사로 들어가 출가했다.

월초 노스님으로부터 받은 법명은 성숙(星淑).

운암은 1919년 3·1운동 때 경기 양주(楊州)의 광천시장 시위 주모자로

체포돼 1년간 복역했다. 1923년 중국으로 넘어가 ‘창일당’을 조직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31년 반제동맹에 가담했고

1936년 조선민족해방동맹, 1937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다.

중·일전쟁 이후
우리나라 항일광복운동의 우파인 김구계와

좌파인 김원봉계 통합에 앞장섰다.

그래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통합을 이끌어 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4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차장에 취임했고,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 경향, 2006년 08월 14일

- 조현철기자

 

 

 

 

 

  

 

 

 

 해평(海平) 이재현 열사는 누구?

 

 

 

해평 이재현 열사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독립운동을 위해

김구 선생과 함께 상하이로 간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3살이던 그에게 독립운동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의 호 해평(海平)은 김구 선생이 지어줬다.

김구 선생은 젊은 군인 이재현 열사를 총애했다.

해평 선생은 1939년 11월, 23살의 나이로 30여 명의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과 함께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이하 전지공작대)를 창설했다.

전지공작대는 결성과정에서 김구 선생의 승인을 받았지만

임시정부와는 별도의 독자적 조직체였다. 그는 일본군 37사단과 맞서 정보를 빼내고 한국 국적의 일본군 사병을 포섭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중국인으로 위장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8개월간 온몸을 씻지 않고 뙤약볕에 살갗을 태웠다고 한다.

중국 시골 청년 행세를 하며 일본군에 접근하기도 했다.

최정예부대였던 전지공작대는 1941년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의 제5지대로 편입됐다.

이후 그는 1945년 OSS부대(미전략사무국이 훈련시킨 광복군 부대)에서 무선반 조교활동을 하며 일본군 공습을 준비했고, 광복 후 1946년 조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백마부대에서 정보대장으로 근무한 데 이어 조선민족청년단 서무과장으로 일했다.

1963년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독립운동의 유공을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받았지만

이듬해 외국 망명생활을 하다가 1973년 재입국했다.

만국 공통어인 에스페란토 한국어 사전을 한국 최초로 집필하기도 했다.

향년 81세의 나이로 1997년 작고했다.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손을 내밀기만 했어도 잘 살 수 있었다.

박전대통령은 해방 직전 일본군이었던 이유로 귀국이 힘들자 해평선생을 찾아와 부탁, 귀국할 수 있었다.
3·1절 기념식장에서 만난 박전대통령이 간절히 만나기를 애원하였으나

끝내 뿌리치고는 만나주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광복군으로 조국을 위해 일했어도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해평 선생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뜻을 지킨 올곧은 지사였다.
- 경향, 2006년 08월 14일
- 베이징 / 이고은기자

 

 

 

 

 이재현 열사 아들의 ‘망부歌’

 

“아버지, 이젠 존경합니다.” 지난 8일 중국 산시성 시안(西安)의 시베이대학 내 운동장.

한 중년의 남자가 영정 2개를 품에 안고

옛 한국청년훈련반의 훈련장소가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시울은 차츰 붉어졌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평생을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뒤에야 당신을 이해하게 됐고,

오늘 이 자리에 서니 내가 몰랐던 당신의 삶이 얼마나 고귀했는가를 느낍니다.”

이 남자는 항일운동가 해평 이재현 열사(1997년 사망)의 아들 이형진씨(53)였다.

정부의 무관심과 가난에 짓눌려 열사인 아버지를 미워한 이씨가

뒤늦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광복투사 해평 이재현 열사의 아들 이형진씨가 8일 선친의 영정을 안고 중국 시안 시베이대학 내 운동장을 찾아 선친이 활동하던 곳을 바라보고 있다.

해평 선생은 임시정부와는 별도인 독자적 조직체였다가 이후 광복군에 편입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이하 전지공작대)에서 활동한 우국지사였다.

이씨가 이날 찾은 시안의 시베이대학은 전지공작대가 설치한 한국청년훈련반이 훈련하던 장소이다.

선친이 가장 열렬히 투쟁하던 흔적이 남겨진 곳이다.

3199년 11월 30여 명의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들이 중심이 돼 안휘성 충칭에서 조직된 전지공작대는 중국 26군 호종남 부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일본군 37사단에 맞선 조직체다.

당시 해평 선생은 42년 태항산 전투 이전까지 한국 국적의 일본군 사병을 포섭하고 정보를 빼내는 ‘초모(招募)’ 활동을 벌였다.

그는 광복을 맞을 때까지 항일투쟁에 끈을 놓지 않았다.
선생은 광복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평생토록 부와 명예는 쳐다보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는 그것이 고통일 뿐이었다.
이씨는 “아버지는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는 낙제점이었다”며 속내를 털어놨다.

이씨는 생전의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이해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아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는 47년 결혼한 뒤 생계를 몽땅 어머니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꿀꿀이죽과 주먹밥을 얻어 자식들을 먹였다.  

당시만 해도 생소한 영화 엑스트라 일까지 해야 했다.

아버지는 광복 후에도 군과 조선민족청년단 등에서 활동했다.

에스페란토어 사전을 집필하기 위해 산속으로 무작정 들어가기도 했다.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이씨는 “아직도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만 나와도 진저리를 치신다”면서

“광복 후 군생활을 하시면서도 군자금으로 들어왔던 금반지 하나조차 생활비로 쓰라고 내놓은 적이

없으셨다”고 말했다. 이씨의 어머니는 아직도 아버지의 묘를 찾지 않는다고 한다.

광복 후 혼란 속에서 64년 베트남, 호주 등 외국으로 망명을 떠난 아버지는 10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이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아버지를 73년 군대 면회장에서 마주할 기회를 맞았다.

그러나 이씨는 “내겐 아버지가 없다”며 면회장에 나가길 꺼려했다.

스물둘, 아직은 아버지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그후에도 아들과 아버지는 서로 서먹했다.

이씨는 “늘 절제된 생활을 하시느라 우리에게도 통제와 명령을 하셨던 아버지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며 “철없던 시절, ‘저 노인네 언제쯤 돌아가시려나…’란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이 때문에 이씨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아들은 스물아홉이 되던 해 처음으로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목소리를 냈다.

가장으로서의 생활력이 없는 아버지에게 “박정희 대통령이라도 찾아가서 살길을 찾아보라”고

대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조국은 목숨을 바칠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면 안 되는 법이다.”

이후 부자는 석달간 대화를 끊었다.

그렇게 꼿꼿하기만 하던 아버지는 9년 전 생을 마감했다.

영양실조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가족들의 도움 없이 연명하기 힘들었던 아버지는

끝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식사까지도 마다하다 눈을 감았다.

이씨는 3년상을 모셨다. 생전에 나눠보지 못한 아버지와의 대화를 사후에 해보기로 한 것.

“지독한 분이셨습니다. 아직도 제 작은 그릇으로는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는 꼭 아버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내가 알던, 싫었던 아버지가 아닌 내가 모르던, 투사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아버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10년째.

이씨는 자신이 모르던 아버지의 삶을 찾아, 그 족적을 따라 중국땅을 밟았다.

“내가 철없이 아버지를 부인하던 스무살의 나이에

당신께서는 이 먼길을 걷고 뛰며 민족 광복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머리로 이해했던 당신의 삶이지만, 이곳에서 그 길을 따라 걸어보니

당신의 심정을 나도 모르게 가슴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알던 가엾은 남자, 미운 아버지는 이제 내게 자랑스러운 투사입니다.”

머나먼 타국땅,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아들은 비오듯 흘린 땀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쏟았다.

아들이 안은 아버지의 영정은 여전히 꼿꼿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시안에서 / 이고은기자 freetree@kyunghyang.com〉

2006년 08월 14일 경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