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숭례문이 불탔다
홍순민(중세사 2분과)
숭례문이 불탔다.
처음에 불이 났다는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TV의 속보를 보는 초기만 해도 ‘참 큰 일이다, 큰 일이구나’ 하면서도 어떻게 저러다 불길을 잡겠지 했는데, 몇 시간 내내 헛 물질만 하다가 종국에는 불티 잔뜩 머금은 불길 한 번 뭉개구름처럼 일더니 서기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0분경부터 11일 새벽 두 시 무렵까지 버티던 기둥이 꺾이며 2층 지붕이 풀썩 주저앉고서야 그 기세를 부리던 불길은 제풀에 잦아 들었다.
어찌한다, 어찌해야 좋단 말이냐, 참으로 뭘 어찌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안되겠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달려간 현장은 참담하였다.
잔불을 잡는다고 부어대는 허망한 물줄기.. 홍수라도 난듯 도로를 개울삼아 흘러가는 물줄기.. 그 불길 뒤 물줄기 속에 남은 숭례문은 참으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내 인생에 이런 모습을 다 보는구나. 내 손으로 이 모습을 기록하여 남겨야겠다. 이를 악물고 뺑뺑 돌아가며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숭례문은 불이 나기 바로 전날인 2008년 2월 9일 무엇에 끌렸는지 아는 이가 찍어 놓은 모습은 이랬다. 주위 고층 빌딩에 비하면 작디 작은 건축물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사람들과 비교하면 대단히 크고 위용이 있으며 잘 짜인 모습이다.
그 “억울하다는” 노인은 어떻게 저 곳에 불을 지를 생각을 하였단 말인가? 그나마 종묘나 전철에 지르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여러 매체들은 처음에는 “사다리로 2층 누각에 올라가 시너를 뿌리로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고 전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는 참 모호하고 부정확한 표현이다. 우선, “누각(樓閣)”이라는 표현부터가 문제가 있다. 전통 건축에서 2층으로 되어 있을 경우, 1층은 각이라고 하고 2층에는 따로 이름을 붙여 누라고 한다.
예를 들면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奎章閣)과 주합루(宙合樓)라든가, 지금은 2층이 없이 되었지만 대조전 뒤의 경훈각(景薰閣)과 징광루(澄光樓) 같은 것이 있다. 누각이라면 그 1층과 2층을 합쳐서 부르는 표현이 된다. “2층 누각”이라면 1층은 다른 것이고 2층이 누각인데 그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누각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2층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숭례문은 문이다. 도성 성벽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낸 것이다. 그 홍예문 주위의 성벽은 안팎이 모두 장대석 석축으로 쌓여 있고, 좀 먼 부분은 네 귀가 궁글려진, 다시 말해서 동글게 모가 깎인 사고석으로 쌓여 있다. 좀 동그란 사고석은 세종 때 쌓은 것이다.
홍예문 주위의 석축 부분은 육축(陸築)이라고 한다. 그 육축 위에 목조 건축물을 지었으므로 이를 문루(門樓)라고 하는 것이다. 문루가 없다고 도성의 문이 제 기능을 못하는 것은 아니다. 석축에 나 있는 홍예문에 문짝이 달려 있어 열고 닫기 때문이다. 서소문인 소의문이나 동소문인 혜화문 등은 조선시기에 상당히 오랫동안 문루가 없었다.
그러나 문루가 있는 것이 여러 면에서 좋은 것은 당연하다. 우선 기능상 문루는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將臺)나 회의소, 그리고 군졸들의 파수 초소로 쓰인다. 또 그러한 실제적 군사적 기능 이외에 의장 기능도 갖는다. 문루가 있는 문과 없는 문을 비교해 보시라. 어느 쪽이 더 위용이 있어 보일 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이름이 붙은 여덟 문 가운데 문루가 2층으로 된 것은 숭례문과 흥인문 둘 뿐이고 다른 문들은 문루가 단층으로 되어 있다. 이번에 불에 탄 것은 바로 그 문루이고, 발화 지점은 문루 가운데 2층이라는 것이다.
바라보기에 오른쪽 부분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문루 2층까지 가서 불을 질렀단 말인가? 사다리를 타고고 올라 갔단다. 그러나 사다리를 쓸 곳은 딱 한 군데 있다. 육축에는 계단이 나 있어서 성문을 지키는 장졸들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큰 어려움 없이 올라갈 수 있다.
육축을 올라가면 좌우 양편에 모두 문루를 둘러싼 작은 담이 있고 거기 작은 문이 있다. 그 문은 자물쇠로 채워져 있으므로 열쇠로 자물쇠를 따야 들어갈 수 있다. 방화범은 이를 미리 알고 사다리를 갖고 올라가 그 담을 넘은 것이다.
사다리의 용도는 그것으로 끝이다. 문루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데는 나무로 된 계단을 올라야 한다. 그 계단의 위쪽 끝부분이 2층의 마루 바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분은 나무 판자로 막혀 있고 평소에는 다시 자물쇠로 채워져 있어 자물쇠를 따고 나무 판자를 밀어 젖혀야 2층으로 올라설 수 있다. 방화범은 이 나무 판자를 어떻게 열었을까? 이 부분이 궁금하다.
방화범이 숙련된 열쇠 털이범이라면 이쯤이야 일도 아닐 것이나, 70 노인으로 절도 전과도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과연 그럴까 의문이다. 만약에 그 판자를 잠그는 자물쇠가 열려 있었다면 이는 관리가 허술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들리는 풍문처럼 그 곳이 노숙자들의 차지가 되어 그들이 거기서 라면도 끓여 먹고 삼겹살도 구워 먹고 배변도 했다면 이는 실로 아무런 관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는 설마 그럴 리야 있겠나 믿지 못하겠다.
여기서 무슨 수사를 하자는 것은 아니나, 불타버린 숭례문을 위해서 뭔가 생각해 보고 문제를 풀어가자면 우선 관리의 문제점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고, 관리의 허점을 밝히자면 우선 이 부분이 맨 먼저 밝혀져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
필진 : 홍순민 | 등록일 : 2008-02-15 |
2. 애곡(哀哭)하는 이유
홍순민(중세사 2분과)
나중에 보니 주위에 울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화재 이튿날부터 현장에는 많은 분들이 찾아와 눈물을 보이더니 급기야 빈소가 되어 국화꽃을 바치고 절을 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왜 눈물이 날까? 눈물의 원인을 밝히고 슬픔의 성분을 분석하는 일이 참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나, 달리 생각하면 다시 이런 일을 또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한 측면도 없지 않겠다 싶다.
숭례문이 타는걸 보면서, 또 타고난 뒤 숭례문 현장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나는 곡(哭), 곡 가운데서도 애곡(哀哭)이라고 생각한다. 곡이라는 죽은 이를 위하여 우는 울음이다. 곡 가운데는 슬픔은 없이 형식적으로 곡조를 맞추어 소리만 내는 것도 있다.
심지어 사람을 사서 대행하게 하는 곡도 있다. 그에 비해 진정으로 죽음을 슬퍼하며 우는 울음은 애곡이라 할 것이다. 남편의 주검 앞에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젊은 여인의 모습은 처절한 애곡일 것이다. 그렇게 몸부림치며 울부짖지는 않으나 영정 앞에서 솟아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리없는 울음도 애곡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천수를 다한 이의 행복한 죽음 앞에서는 애곡하지 않는다. 호상(好喪)은 축하의 잔치와 다름없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야 있으랴마는 그래도 흉악범이나 인간 말종의 죽음앞에서도 애곡하지 않는다.
긴 병에 고통받던 이의 죽음 앞에서도 위로는 할지언정 그리 애�게 애곡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잘 모르는 이의 죽음을 대하여도 조상(弔喪)은 하지만 애곡까지는 하지 않는다. 아직 할 일이 남아있는 아까운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뜬 사랑하는 이, 깊은 관계를 갖고 삶을 같이 살아온 이의 죽음 앞에서 애곡한다.
숭례문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애곡하는 것은 숭례문이 평상시에는 별로 의식하지 못하였으나 대단히 큰 비중을 가지고 우리들 마음 어느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느닷없이 자각했기 때문이요, 숭례문이 아직 더 그 자리에 있어야 하고 또 그러리라고 믿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진 데서 오는 충격 때문이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숭례문의 화재를 보고 왜 애곡하는가에 대한 어설픈 나의 진단이다.
사랑이 없으면 슬퍼하며 애곡할 리도 없을 터. 숭례문은 제 한 몸 던져 불길에 휩싸여 주저앉음으로써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함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사람들 역시 평소에는 애정 표현을 하지 않은 채 무뚝뚝하게 그 옆을 지나쳤지만 깊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이 참에 스스로, 또 남들과 서로서로 확인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진정 웅숭깊고 바른 사랑이었을까?
사랑이 반드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깊이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이 뜨거울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사랑이 그렇지 못한 쪽보다는 깊고 오래가리라.
왠지 모르게 좋아하다가 이런 줄 몰랐다고 등을 돌리는 사랑보다는 상대방의 장점은 물론이요 약점과 결점까지 모두 알면서도 그것까지도 끌어안는 사랑이 더 은근하면서도 곡진하지 않겠나.
숭례문에 대한 우리들 사랑이 과연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언론 보도를 보자면 충분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명백히 잘못되었거나,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왜 숭례문이 불 탔는데 우시는가, 왜 숭례문이 중요하다고 여기는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국보 1호잖아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보물이잖아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되묻는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국보 1호라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며 그래서 중요하고, 그래서 우는가?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 국보 2호는 덜 중요한가?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는 가치가 미미한가? 국보 2호가 뭔지, 몇 백번에 이르는 국보들의 번호와 이름과 생김새와 가치를 다 아는 것도 아닌 터에 1호라서 중요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국보니 보물이니, 1호니 2호니 하는 것은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해서 분류하고 등급을 매긴 것일 뿐이다. 그것도 우리 손으로 심사숙고하고 여러 전문가의 견해를 반영하여 매긴 것도 아니고 일제시기부터 내려오던 분류 및 등급 체계를 진지한 연구 검토 없이 이어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호는 일제가 조선총독부에서 가까운 데서부터 매겨 나갔고, 그래서 “남대문”이 1호가 되었을 뿐이다.
마침 현재 문화재청에서 그 분류 및 등급 체계를 재조정하는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달리 평가된다.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저 지방 어느 구석에 있는 무너지다 남은 집 한 채, 돌무더기 하나도 보는 이에 따라서는 비길 데 없이 소중할 수도 있다. 마치 사람 보는 것과 같다. 학식도 지위도 권세도 인물도 없는 지극히 보잘 데 없어 보이는 꼬부랑 늙은이지만 내 어머니, 내 아버지는 내게는 그 누구보다도 소중하고 존귀한 분이다.
두 번째로 숭례문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이야기가 600년을 그 모습 그대로 제자리를 지킨 존재이기 때문이란다. 이 말도 너그럽게 보자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을지 모르나 엄밀히 따지자면 옳은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하나 따지자면 주를 주렁주렁 단 딱딱한 글이 돼야 하겠지만, 우선 [실록]을 비롯한 몇몇 문헌에 의거하여 간단히 정리하면 숭례문의 변천은 다음과 같다.
도성을 축조하는 공사는 1396(태조 5)년 1월 9일 개기(開基), 오늘날 표현으로 하자면 착공하였다. 성문 공사는 별개의 공사가 아니라 자연히 도성 공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숭례문의 착공일도 이 날로 보아야 할 것이다.
9월 24일 도성을 쌓는 일이 끝나 동원되었던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이 무렵 도성의 여덟 문에 월단(月團), 곧 육축과 누합(樓閤), 다시 말해서 문루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직 최종 완공은 아니고 기본 골격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각 문의 이름도 지어졌는데, 숭례문은 정남에 있는 문으로서, 속칭 남대문이라고 하였다.
[태조실록] 1398(태조 7)년 2월 8일조에 도성의 남문, 곧 숭례문이 완공되어 태조가 가서 보았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숭례문이 최종 완공되어 오늘날로 치자면 임금의 참석하에 준공식을 하였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시 공사는 일년 내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을 이후 봄까지 농한기에만 하는 것이므로 두 해 겨울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다.
4월 26일 정도전(鄭道傳)이 서울의 위치, 도성 및 궁궐, 관아, 저자 주택, 그리고 사방의 풍광 등 여덟 경치를 읊은 팔경시(八景詩)를 지어 바쳤다. 정도전은 경복궁이라는 이름과 경복궁 주요 전각의 이름도 지었다. 이로 보건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유교의 오상(五常) 개념을 적용한, 숭례문을 비롯한 도성 문들의 이름도 정도전이 지었으리라 생각된다.
1422(세종 4)년에는 도성 가운데 토성(土城)으로 된 부분을 석성(石城)으로 바꾸는 공사를 했으나, 이 때는 숭례문은 태조대 모습 그대로 있었다.
1447(세종 29)년 8월, 당시 좌참찬 정분(鄭苯)이 담당하여 도성의 숭례문 부분을 보수하는 공사를 시작하였다. 낮은 지대를 돋우고 홍예문을 내고 문루를 건축하는 큰 공사였다. 이 공사는 1448(세종 30)년 3월 17일 상량(上樑)을 하고, 5월에 준공된 것으로 보인다. 세종 말년의 공사로 숭례문은 태조대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보수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는 중건(重建)이었다.
1479(성종 10)년에도 숭례문을 크게 보수하는 공사를 벌여, 4월 2일에 입주(立柱)-기둥을 세우고 5월에 준공하였다. 기둥을 세웠다는 것으로 보아 부분적으로만 손을 본 것이 아니라 크게 고친 중수(重修)였던 것으로 보인다.
숭례문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가운데서도 무너지거나 불에 타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런데, 굳이 뒤집어 생각해 보자면 매우 미안한 말이지만 이 때 숭례문은 무너졌거나 아니면 크게 망가졌어야 한다.
도성과 도성의 문들은 외적의 침임을 막아내기 위한 방어 시설이다. 그런데 그 외적이 서울까지 침범하는 상황에서도 멀쩡히 있었다는 것은 기실 자랑거리가 못된다. 숭례문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버리고 도주한 당시의 임금과 관료들, 장수와 그리고 군졸들에게 할 말이다.
조선후기 숙종대 도성을 크게 고쳤고, 그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서 손을 보았기에 숭례문도 필요에 따라서 고쳤을 것이므로 부분적으로는 모습이 바뀌었겠지만, 아무튼 크게 보자면 숭례문은 조선후기에서 말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 제 모습을 지켜왔다.
목멱산의 서쪽 기슭에서 북쪽으로 도성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원경의 오른편에는 북한산의 보현봉으로부터 서쪽으로 이어지는 연봉들과 그 앞쪽의 백악이 있고, 왼편에는 인왕산이 있다.
근경 오른쪽 가장자리 아랫쪽에서 중앙을 지나 인왕산 능선으로 구불구불 도성이 이어진다.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으나 사진의 중앙 부위에 숭례문이 높이 솟아 있다. 도성의 오른편이 성안이고, 왼편이 성밖이다. 성안과 성밖에는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오후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며 높히 서 있는 근경의 도성의 모습이 사뭇 인상적이다.
숭례문의 육축과 문루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좌우로 성벽이 살아 있고, 성벽 위의 여장(女墻)도 거의 온전히 남아 있는 모습을 문 외곽에서 잡은 이미지이다. 숭례문 밖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초가 지붕의 가가(假家)들이 침범하여 좁고 무질서한 상태이지만, 1890년대 초엽까지 원형을 유지 하고 있는 숭례문을 잘 보여준다.
1890년대 전반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숭례문의 육축과 문루, 좌우의 성벽과 그 위의 여장(女墻) 등이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도로 좌우변에 초가 지붕의 가가가 도로를 침범하고 있으나 연이어 비교적 질서있게 지어져 있어 도로는 좀더 넓게 확보되어 있다.
도로 남편으로 전차 선로가 놓여 숭례문의 홍예문으로 전차가 통과하고 있는 장면이다. 서울의 전차 선로는 첫 번째로 청량리에서 서대문 경교 사이의 노선이 1899년 5월에 개통되었고, 종로 보신각에서 갈라져서 숭례문을 거쳐서 용산으로 가는 지선이 1899년 12월 20일에 두 번째로 개통되었다.
숭례문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문 좌우의 성벽도 보존되어 있다. 특히 성벽 위의 여장이 반듯하게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도로 좌우변에는 초가로 된 가가가 말끔히 철거되어 와가 혹은 판자로 된 점포들이 드러났고, 도로는 넓게 정비되었다.
숭례문에 결정적인 타격이 가해진 때는 순종이 황제가 된 융희 연간이다. 1907년 10월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후일 대정(大正) 천황이 되는 당시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를 초청한다.
앞줄 가운데 어린 아이가 영친왕, 그 옆의 조금 큰 아이가 요시히토.
요시히토가 더럽고 누추한 숭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숭례문의 좌우 도성 가운데 서쪽 부분을 헐어 도로를 내었고, 이듬해에는 동쪽 부분도 헐어 내었다. 이로써 숭례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섬처럼 남아 있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헐려 없어지고 주위는 일본식 축대로 마감되어 문의 지면이 주위 도로면보다 높아졌다. 문 주위로 넓은 길이 나고 전차 선로는 홍예문으로 통과하지 않고 주위 도로로 이동하였다.
1950년에서 53년까지 서울에 폭탄과 포탄 총알이 빗발치는 그 혹독한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숭례문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하면서도 자기를 지켰다. 1956년에는 전쟁으로 망가진 곳을 보수하고, 1962년에는 전면적으로 해체하여 새로운 부재를 끼워넣은 중수 공사를 하였다.
2005년 5월 27일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 후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숭례문을 개방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숭례문을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볼 수 있었다. 이렇듯 세월 따라 모양은 조금씩 바뀌었을지라도 숭례문은 늘 거기 있었다.
숭례문의 진정한 가치는 어디 있는가? 나는 숭례문이 거기 오래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는 데 가장 큰 가치가 있다고 본다.
조선 태조대 이후 온갖 풍파 곡절을 다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아니 2008년 2월 10일까지 숭례문은 조선 대한제국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도성의 대문 가운데서도 제1의 문이었다.
주위에 고층 빌딩들이 빽빽하게 들어서면서 숭례문은 작아 보이고, 낡아 보이게 되었다. 더 이상 서울 장안에 드나드는 문이 아니라 도로 한가운데 교통 흐름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오그라들었다.
그렇지만 숭례문은 다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서울의 얼굴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 다시 한 번 뒤돌아보게 되고, 돌아왔을 때 반가움의 눈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는 표상이었다. 우리 마음 저 깊은 데 자리잡고 있는 고향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숭례문을 태운 불기운이 식기도 전에 “복원”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돈을 들여 건을 다시 지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복원은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한다면 제대로 옛모습대로 짓지도 못하리라고 판단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복원”은 불가능하고 생각한다. “복원”할 수 없다면 복원을 운위하지 말기를 바란다. 차라리 “중건”을 하라. 혹시 가능하다면 “중수”를 하라. 그도저도 못하겠으면 현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라. 훗날 할 수 있을 만할 때 하게 기회를 남겨두라.
그러나 중건 아니면 중수를 해서 설령 비슷하게나마 되살린다 해도 그것은 이제까지 저기 있던 그 숭례문은 아니다. 숭례문에 녹아 있고 서려 있던 그 역사는 어찌하랴? 상처받고 시달리면서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숭례문은 사라졌다. 다시는 못 올 길을 갔다. 그래서 운다. 이제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우리 속에 가라앉아 있던 사랑을 주체 못하고 몸 밖으로 흘려 내보내는 것이다. 애곡하는 것이다. |
필진 : 홍순민 | 등록일 : 2008-02-19 |
3. 숭례문을 중건(重建)하자
완전히 타 없어진 줄 알았던 숭례문이 그나마 상당 부분 남아 있다. 성벽 부분인 육축(陸築)이 그대로 있고, 목조 부분인 문루도 2층은 모두 타 없어졌으나 1층 부분은 다 타지 않았다. 그러기는 하지만 크게 충격을 받고 망가져서 그대로 되살리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림 1) 숭례문 문루의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계단 위 2층 부분은 형체가 없어졌으나, 1층 부분은 골조가 남아 있다.
(그림 2) 1890년 전후의 숭례문의 모습. 양 옆으로 성벽이 살아 있다. 전면의 초가집들은 도로변의 점포에서 내달아 지은 가가(假家)이다. |
필진 : 홍순민 | 등록일 : 2008-0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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