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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 탄생 30주년 맞은 김덕수

Gijuzzang Dream 2008. 3. 17. 19:45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맞은 김덕수

“예인(藝人)인생 51년, 한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장이 서는 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던 다섯 살짜리 꼬마가 있었다.

장꾼들의 흥을 한껏 돋우던 남사당패 속에 끼어 있던 재간둥이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하던 아이는

새미(무동놀이에서 사미승복을 입고 어른들의 어깨를 올라타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아이)를 하고

장구를 치며 단숨에 스타가 됐다.

 

다섯 살 이후 단 한 번도 궁채와 열채(장구채)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소년은

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대가 되어 세계를 누빈다.

 

1978년에는 북, 장구, 징, 꽹과리 등 우리 정서가 녹아 있는 민속 타악기를 가지고

‘사물(四物)놀이’를 탄생시켰다.

예인(藝人) 인생 51년. 지금까지 연간 150회, 총 5000회가 넘는 공연을 펼친

우리 시대 장인 김덕수(57)씨.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향해 신명 나게 장구를 두드리는 그를 만났다.

아침부터 때 아닌 진눈깨비가 흩날린 탓에 오후 거리는 축축하게 물기를 머금고 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도로는 빽빽하게 들어찬 차들로 옴짝달싹 못하며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경적을 울리며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동차들, 조급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무는 운전자,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상가로 향하는 아가씨…

나른한 오후의 풍경을 완성하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에서 ‘삶’을 발견한다.


충무아트홀 지하 1층 한울림예술단 연습실.

 

북, 장구, 징, 꽹과리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나는 우리의 가락이 울려퍼진다.

3월 6, 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특별 기념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기자가 취재를 한 시점은 3월 4일이다).

 

각자 맡은 악기를 두드리는 김덕수 · 이광수 · 최종실 · 남기문씨의 구슬땀이 얼룩진 얼굴에는

환희가 번뜩인다. 특히 북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리고,

‘흥흥흥~ 흐음, 흐음~’ 하는 콧소리까지 내는 김덕수씨의 얼굴은 때론 진중함이,

때론 어린아이의 장난기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장구를 세게 두드릴 땐 눈을 크게 뜨고 입까지 동그랗게 벌리다가

작게 두드릴 땐 슬며시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거장(巨匠)의 풍모라니!

수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난 후 김씨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선 그가 브러시로 수염을 세심하게 빗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87년부터 수염을 길렀어요.

당시 우리 사회는 박종철, 이한열 같은 대학생들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사망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었잖아요. 전 그 즈음 88서울올림픽 홍보대사로 전 세계로 공연을 다녔어요.

하지만 ‘과연 이 나라가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나라일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지식인들이 양심선언을 하는 가운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죠.

연우극장에서 이애주 교수와 함께 바람맞이춤을 공연했어요.

그때부터 일종의 저항과 자유를 상징하기 위한 표시로 수염을 기른 거예요.

수염도 자라는 대로 놔두자 뭐 이런 거죠.”

남사당 데뷔 후 6살 때 장구를 멘 모습과 청소년 시절 모습.


그의 목소리는 우렁차다.

중학생 이후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그는 160㎝의 단신이지만

어린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장해서인지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남사당 생활을 하는 아버지의 3남 6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남사당패에 데뷔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던가.

딱히 장난감이 없던 시절,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들은 대로 따라한 장구 치기가 범상치 않자

본격적으로 장구, 태평소, 징, 꽹과리, 줄타기 등을 사사하게 된 것이다.

 

남사당의 무동으로 데뷔해 전국 방방곡곡 장이 서는 곳마다 돌아다니며 실력을 키웠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몹시 대견해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꼬마시절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전립을 상모돌리기를 할 때 쓰고 있다.

“이 전립이 46년 된 거예요. 우리말로는 벙거지라고 하죠.

하나도 고치지 않고 사용하고 있어요. 쓸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나요.”

일곱 살 때 ‘귀신 같은 장구 실력’으로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을 거머쥐었고,

1964년까지 양도일·남운용·송순갑 등 명인으로부터 남사당 전 종목을 전수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리틀엔젤스예술단 단원 겸 선생으로 지구촌을 누볐다.

1970년대 ‘데모의 앞잡이’라며 야외에서 풍물 연주를 금지하자

1978년 북, 장구, 징, 꽹과리만 모아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서울 종로구 연서동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한복 차림의 더벅머리 청년 네 명(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은

각각 북과 장구, 징, 꽹과리를 하나씩 맡아 두드렸다.

민속학자 심우성은 이후 이를 ‘사물놀이’라고 명명했다.

 

사물놀이는 클래식부터 재즈와 록음악, 힙합과 테크노, 월드뮤직까지

모든 종류의 음악과 자유롭게 소리를 섞으며(퓨전) 세상을 향한 스펙트럼을 한발 한발 넓혀갔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세계화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외길 인생 51년을 맞는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회한이 교차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제가 남사당에서 유랑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노비 문서가 있었잖아요.

특히 광대는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직종이었죠.

그렇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우리 세대까지 그 위대한 예술적 유산을 물려주신 분들이에요.

그분들은 재물도 명예도 없었지만 예인으로서 철저하게 자기 싸움에서 이긴 것이고,

저는 그 정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전 악극단에도 있어봤고, 약장수를 따라다닌 적도 있어요.

요즘 시장의 약장수를 생각하시면 안 돼요.

1950, 60년대만 해도 국가가 국민건강증진 차원에서 장려한 최고의 이벤트장이었거든요.

가난하던 시절이라 당시는 위장병 환자와 회충 환자가 많았어요.

어쨌든 경무대(청와대)부터 일반 서민의 장인 난장까지 두루 거치면서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거예요.

반면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 품을 떠나 홀로 객지생활을 하면서

느껴야 했던 슬픔도 있어요. 지금도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많으니까 그런 데서 오는 쓸쓸함도 없지 않아요.”

고등학생 때의 김덕수(왼쪽)씨.

그는 광대로 살아온 삶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하지만 잠시 다른 길에 눈을 돌린 적은 있다.

그는 “인생에서 딱 두 번 다른 길을 도모했다”고 회고했다.

“단국대 이공대 요업과에 들어갔어요.

도자기를 만드는 과죠. 흙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전통적인 울림으로 세상과 만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내심 궁금했어요. 어쩌면 전통 연희를 하는 사람에 대한

은근한 무시가 싫어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금세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제 기대는

얼마 안 가 깨졌어요. 2학년까지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다음 학년부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와중에도 저는 바쁘게 해외공연을 다녔어요.

결국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해야 했지요.

 

또 한 번은 20대 중반의 일이에요.

무대 연출을 해보고 싶어 일본의 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아놨어요. 하지만 선생님들께 호된 야단을 맞고

포기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스물여섯살에 사물놀이를 만든 거예요.”

흔히 사람들은

그가 큰 재산을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한 분배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는

남사당 문화의 영향으로 그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그가 공연으로 한 해 올리는 매출은 12억~13억 원에 달하지만

그 중 그의 몫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울림예술단 식솔만 해도 30명이기 때문이다.

재직 중인 한국종합예술대학에서 받는 월급과 공연 수입을 합해

그가 한 달 평균 집에 가져가는 돈은 평균 700만 원 정도다.

그와 그의 가족은 현재 종로구 부암동의 작은 빌라(다락방까지 합해 132㎡ 규모)에서 살고 있다.

흔한 승용차 한 대 없는 그는 “내 경제적 분수에 자동차를 굴리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제자들에게 제가 강조하는 게 욕심내지 말라는 거예요.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에요.

물론 저 혼자 먹고 살았으면 빌딩 여러 채 샀겠죠. 하지만 나눔만큼 좋은 게 없어요.

그래도 식솔 밥 굶기지 않고 아이들 학교 보낼 수 있고,

교육사업도 펼칠 수 있으니 이만하면 부자 아닌가요?”

(왼쪽) 리틀엔젤스에서 활동할 때의 모습.

가운데 여자아이가 현재 유니버셜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이다.

(오른쪽) 한일 월드컵 때 황선홍선수가 입었던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모습.


김씨는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후학 양성에서만큼은 욕심이 크다고 한다.

그는 한국종합예술대학에서 전통 연희를 가르치는 한편 3개의 학교를 운영 중이다.

폐교를 사들여 만든 부여의 사물놀이교육원, 영암 남도교육원, 양평 악기공방교육원이다.

악기공방교육원에서는 ‘한울림’이라는 브랜드의 전통 악기도 생산한다.

“제가 연주용으로 사용하는 장구는 5개예요. 가장 오래된 것은 20년 된 것이죠.

장구도 다 같은 게 아니에요. 쓰임에 따라 크기와 가죽, 채가 다르죠.

좋은 장구는 조선 오동나무에 옻칠을 최소한 50번 이상 해요.

장구에 쓰이는 가죽은 개가죽과 말가죽, 소가죽인데, 어떤 음악을 하느냐에 따라

선택을 달리해야 해요. 장구 가격이요? 좋은 것은 부르는 게 값이죠.

 

사실 일본은 장인을 우대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대우해주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만큼 연금술을 잘하는 국민도 없는데 말이죠.

예전에 징을 한 번 치면 소리가 12고개를 넘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요즘 징은 한 고개도 못 넘어요. 참으로 통탄할 일이에요.”

2001년에는 문화벤처회사 ‘난장컬처스’를 만들었다.

교육, 매니지먼트, 음반 등 세 분야의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

한울림예술단은 난장컬처스의 전속 연주집단이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기(氣)’라고 말했다.

“그동안 전통음악과 관련해 많은 것을 공부하고 수많은 시간을 무대 위에서 보냈어요.

그런데 아직도 배울 게 많아요. 전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많아요.

그들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현장은 공연을 하는 순간이에요.

가르친다는 것은 제가 가진 기운을 제 학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애기 때부터 그렇게 배웠어요.

위대한 선생님으로부터 그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예술세계에서의 마지막 관문이에요.”

그는 사물놀이의 강점은 ‘혼합박’에 있다고 설명했다.

서양음악은 2박, 4박 등으로 일정한 데 반해

사물놀이는 다양한 혼합박으로 돼 있어 신명을 돋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단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가락이라고 하잖아요.

가락이라고 함은 선율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하나하나하나둘셋, 하나둘하나둘하나둘셋넷, 하나하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박자가 섞여 있어요. 리듬이 길죠.

이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문화적 미학이이에요. 또 에너지의 철학이고요.

 

서양사람들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면서 어깨춤이 절로 나는 이 소리에 ‘악’ 하는 거예요.

이런 우리의 전통음악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나갈 때 진정한 의미의 한류가 존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속에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과 색깔, 그리고 철학이 있기 때문이죠.”

김씨의 꿈은 5대양 6대주 학교 교실마다 우리의 전통 악기를 비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30년 전부터 도모해온 일이기도 하다.

“미국만 해도 이미 하버드, MIT, 예일, 프린스턴과 같은 소위 아이비리그라고 하는

명문대학교에서는 다 사물놀이를 하고 있어요.

다만 한국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그곳 현지인들이 하고 있죠.

제가 미국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악기를 줬거든요.

하지만 태권도가 그랬듯 이제는 우리 사범들을 세계 곳곳에 보내야 해요.

우리나라 학교 음악실마다 피아노가 있듯 언젠가 세계의 음악실마다

우리의 전통 악기가 놓일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우리 정부도 문화수출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이를 도모해야 해요.”

사물놀이 원년 멤버

(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 순).

그는 몇 시간동안 두드리고 뛰고

뱅글뱅글 돌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내공이 쌓였기 때문인지 60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친다.

 

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 “활활 타오르는

둥그런 불덩어리 속에 앉아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걸출한 광대 김덕수씨.

그가 지난해 자서전,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김영사)를 통해

한 말은 광대 김덕수씨의 삶과 전통예술에 대한 생각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전통은 지킴이 아니라 창조를 통한 열림이다.

기본을 세우되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지난 50년간 길이 집이고 무대였다.

핵심은 결국 행위다. 난장판이든 카네기홀이든 올림픽 초청 무대든 평양 한복판이든

세계 각지의 어느 민족 문화권에 갔든 길은 내 집이었고, 무대였다.

나는 대한민국만이 가진 독특한 에너지를 장구로 춤으로 꽹과리로 알렸다.

나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기운을 알리는 일로 행복을 느꼈고, 자긍심을 가졌다.”

● 학력

1970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

● 경력
1957 남사당 무동으로 데뷔
1965 한국민속가무예술단

        마치 리틀엔젤스에 입단
1978. 2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웃다리 풍물’가락으로

            사물놀이 탄생
1994. 7 (현)부여에 사물놀이교육원 개설
1995. 12 (현)사물놀이 한울림 창단,

              단장, 예술감독
1997. 4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악과 겸임교수
          목원대 음악대 한국음악과 겸임교수
          총체극 영고 예술감독
1997. 5 제7회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 총감독
1997. 9 뮤지컬 퍼포먼스 ‘난타’ 예술감독
            (사)민족음악협의회 이사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1999. 3 (현)한국연극배우협회 감사
2001. 8 (현)전통문화벤처기업 난장컬처스 대표
2005. 11 (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통예술위원회 위원
              (현)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부교수

● 상훈
1959 전국농악경연대회 대통령상
1961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상
1995 국민훈장 모란장
1998 프랑스 문화부 수여 예술문화훈장
2001 제4회 일맥문화대상 나라빛냄상
2002 한·일월드컵 공로 대통령상 표창
2004 민주평화통일 유공자문위원회 의장 표창 대통령상
2007 은관문화훈장
제18회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예술 · 문화상



덕수를 만든 건 아버지였다

김덕수씨는 유난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다.

그는 젖을 떼기가 무섭게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유람했고

아버지의 피를 받아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남사당에 들어갔다. 어머니의 반대는 극렬했지만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가족이 모두 잠든 어느 날 새벽

“아버지 따라 기차 타자”며 아들을 깨워

난장축제가 한창인 조치원에 데리고 가 무동을 시켰다.

 

아버지는 어린 김씨의 손을 끌고 이곳저곳을 구경시키며

“모름지기 사람 사는 데는 이처럼 흥이 있어야 한다.

덕수야. 너는 평생 흥겹게 살아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또 “균형을 잡고 사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김씨는 “지금도 공연을 다닐 때마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뼈저리게 느끼곤 한다”며

“내가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아무리 큰 무대에 올라도

두려울 것이 없다”고 자서전을 통해 밝혔다.

아버지는 공연 때마다 당신의 몫과 아들의 몫을 차곡차곡

챙겨두었다가 집에 가져갔다.

김씨에 따르면 김씨의 아버지는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단순한 가족이 아니라 매니저 겸 파트너였다.

친구였고 형이었고 스승이었다.

아버지가 공연을 하지 않고 보호자로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행여 아들이 공부와 건강에 소홀할까봐 늘 신경을 썼다고 한다.

김씨는 1981년 재일동포 2세인 부인 김리혜씨와 결혼했다.

결혼 전 기자로 일을 했다는 김리혜씨는

무형문화재 27호인 승무와 97호인 살풀이춤 이수자이기도 하다.

부부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다. 장남 김용훈씨(수파사이즈)는 힙합 연주자이자 배우이다.

김씨는 “아들에게 전통음악을 전수하고 싶었지만 힙합을 하고 싶어했다”며 아쉬워했다.

둘째아들은 현재 대학에 다니고 있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 2008 03/18, 경향, 뉴스메이커 766호 [아주 특별한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