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놀이 탄생 30주년 맞은 김덕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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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꾼들의 흥을 한껏 돋우던 남사당패 속에 끼어 있던 재간둥이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빛을 발하던 아이는 새미(무동놀이에서 사미승복을 입고 어른들의 어깨를 올라타고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는 아이)를 하고 장구를 치며 단숨에 스타가 됐다.
다섯 살 이후 단 한 번도 궁채와 열채(장구채)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소년은 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광대가 되어 세계를 누빈다.
1978년에는 북, 장구, 징, 꽹과리 등 우리 정서가 녹아 있는 민속 타악기를 가지고 ‘사물(四物)놀이’를 탄생시켰다. 예인(藝人) 인생 51년. 지금까지 연간 150회, 총 5000회가 넘는 공연을 펼친 우리 시대 장인 김덕수(57)씨.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향해 신명 나게 장구를 두드리는 그를 만났다. 서울 동대문운동장 주변의 도로는 빽빽하게 들어찬 차들로 옴짝달싹 못하며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경적을 울리며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동차들, 조급한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무는 운전자, 커다란 가방을 든 채 종종걸음으로 상가로 향하는 아가씨… 나른한 오후의 풍경을 완성하는 다양한 군상의 모습에서 ‘삶’을 발견한다.
북, 장구, 징, 꽹과리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나는 우리의 가락이 울려퍼진다. 3월 6, 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리는 ‘사물놀이 탄생 30주년 특별 기념공연’을 앞두고 막바지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기자가 취재를 한 시점은 3월 4일이다).
각자 맡은 악기를 두드리는 김덕수 · 이광수 · 최종실 · 남기문씨의 구슬땀이 얼룩진 얼굴에는 환희가 번뜩인다. 특히 북장단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리고, ‘흥흥흥~ 흐음, 흐음~’ 하는 콧소리까지 내는 김덕수씨의 얼굴은 때론 진중함이, 때론 어린아이의 장난기가 배어나오는 듯하다.
장구를 세게 두드릴 땐 눈을 크게 뜨고 입까지 동그랗게 벌리다가 작게 두드릴 땐 슬며시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삼매경(三昧境)에 빠진 거장(巨匠)의 풍모라니!
수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난 후 김씨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거울 앞에 선 그가 브러시로 수염을 세심하게 빗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우리 사회는 박종철, 이한열 같은 대학생들이 고문과 최루탄으로 사망하는 등 최악의 상황이었잖아요. 전 그 즈음 88서울올림픽 홍보대사로 전 세계로 공연을 다녔어요. 하지만 ‘과연 이 나라가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는 나라일까’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지식인들이 양심선언을 하는 가운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죠. 연우극장에서 이애주 교수와 함께 바람맞이춤을 공연했어요. 그때부터 일종의 저항과 자유를 상징하기 위한 표시로 수염을 기른 거예요. 수염도 자라는 대로 놔두자 뭐 이런 거죠.”
중학생 이후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았다는 그는 160㎝의 단신이지만 어린시절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장해서인지 언제 어디서나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고작 다섯 살의 나이에 남사당패에 데뷔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던가. 딱히 장난감이 없던 시절,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고 들은 대로 따라한 장구 치기가 범상치 않자 본격적으로 장구, 태평소, 징, 꽹과리, 줄타기 등을 사사하게 된 것이다.
남사당의 무동으로 데뷔해 전국 방방곡곡 장이 서는 곳마다 돌아다니며 실력을 키웠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몹시 대견해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꼬마시절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전립을 상모돌리기를 할 때 쓰고 있다. 하나도 고치지 않고 사용하고 있어요. 쓸 때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생각나요.” 1964년까지 양도일·남운용·송순갑 등 명인으로부터 남사당 전 종목을 전수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리틀엔젤스예술단 단원 겸 선생으로 지구촌을 누볐다. 1970년대 ‘데모의 앞잡이’라며 야외에서 풍물 연주를 금지하자 1978년 북, 장구, 징, 꽹과리만 모아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
서울 종로구 연서동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한복 차림의 더벅머리 청년 네 명(이광수, 김덕수, 최종실, 김용배)은 각각 북과 장구, 징, 꽹과리를 하나씩 맡아 두드렸다. 민속학자 심우성은 이후 이를 ‘사물놀이’라고 명명했다.
사물놀이는 클래식부터 재즈와 록음악, 힙합과 테크노, 월드뮤직까지 모든 종류의 음악과 자유롭게 소리를 섞으며(퓨전) 세상을 향한 스펙트럼을 한발 한발 넓혀갔다.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를 세계화하는 작업의 일환이었다. 외길 인생 51년을 맞는 그는 “감사하는 마음과 회한이 교차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노비 문서가 있었잖아요. 특히 광대는 사회에서 가장 천대받던 직종이었죠. 그렇게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우리 세대까지 그 위대한 예술적 유산을 물려주신 분들이에요. 그분들은 재물도 명예도 없었지만 예인으로서 철저하게 자기 싸움에서 이긴 것이고, 저는 그 정신을 배울 수 있었어요. 전 악극단에도 있어봤고, 약장수를 따라다닌 적도 있어요. 요즘 시장의 약장수를 생각하시면 안 돼요. 1950, 60년대만 해도 국가가 국민건강증진 차원에서 장려한 최고의 이벤트장이었거든요. 가난하던 시절이라 당시는 위장병 환자와 회충 환자가 많았어요. 어쨌든 경무대(청와대)부터 일반 서민의 장인 난장까지 두루 거치면서 오늘의 제가 있게 된 거예요. 반면 9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지만 다섯 살 때부터 어머니 품을 떠나 홀로 객지생활을 하면서 느껴야 했던 슬픔도 있어요. 지금도 한 여자의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이지만 집을 떠나 있는 날이 많으니까 그런 데서 오는 쓸쓸함도 없지 않아요.”
그는 광대로 살아온 삶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단다. 하지만 잠시 다른 길에 눈을 돌린 적은 있다. 그는 “인생에서 딱 두 번 다른 길을 도모했다”고 회고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죠. 흙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전통적인 울림으로 세상과 만나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내심 궁금했어요. 어쩌면 전통 연희를 하는 사람에 대한 은근한 무시가 싫어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금세 도자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제 기대는 얼마 안 가 깨졌어요. 2학년까지 교양과목을 이수해야 다음 학년부터 도자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와중에도 저는 바쁘게 해외공연을 다녔어요. 결국 2학년 때 학교를 중퇴해야 했지요.
또 한 번은 20대 중반의 일이에요. 무대 연출을 해보고 싶어 일본의 한 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아놨어요. 하지만 선생님들께 호된 야단을 맞고 포기했어요. 정신을 차리고 스물여섯살에 사물놀이를 만든 거예요.” 그가 큰 재산을 모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한 분배의 원칙이 자리 잡고 있는 남사당 문화의 영향으로 그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 그가 공연으로 한 해 올리는 매출은 12억~13억 원에 달하지만 그 중 그의 몫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한울림예술단 식솔만 해도 30명이기 때문이다. 재직 중인 한국종합예술대학에서 받는 월급과 공연 수입을 합해 그가 한 달 평균 집에 가져가는 돈은 평균 700만 원 정도다. 그와 그의 가족은 현재 종로구 부암동의 작은 빌라(다락방까지 합해 132㎡ 규모)에서 살고 있다. 흔한 승용차 한 대 없는 그는 “내 경제적 분수에 자동차를 굴리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물론 저 혼자 먹고 살았으면 빌딩 여러 채 샀겠죠. 하지만 나눔만큼 좋은 게 없어요. 그래도 식솔 밥 굶기지 않고 아이들 학교 보낼 수 있고, 교육사업도 펼칠 수 있으니 이만하면 부자 아닌가요?”
그는 한국종합예술대학에서 전통 연희를 가르치는 한편 3개의 학교를 운영 중이다. 폐교를 사들여 만든 부여의 사물놀이교육원, 영암 남도교육원, 양평 악기공방교육원이다. 악기공방교육원에서는 ‘한울림’이라는 브랜드의 전통 악기도 생산한다. 장구도 다 같은 게 아니에요. 쓰임에 따라 크기와 가죽, 채가 다르죠. 좋은 장구는 조선 오동나무에 옻칠을 최소한 50번 이상 해요. 장구에 쓰이는 가죽은 개가죽과 말가죽, 소가죽인데, 어떤 음악을 하느냐에 따라 선택을 달리해야 해요. 장구 가격이요? 좋은 것은 부르는 게 값이죠.
사실 일본은 장인을 우대하는데 우리나라는 전통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을 대우해주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어요. 우리나라 사람만큼 연금술을 잘하는 국민도 없는데 말이죠. 예전에 징을 한 번 치면 소리가 12고개를 넘었다고 했어요. 하지만 요즘 징은 한 고개도 못 넘어요. 참으로 통탄할 일이에요.” 교육, 매니지먼트, 음반 등 세 분야의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 한울림예술단은 난장컬처스의 전속 연주집단이다. 그는 자신이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기(氣)’라고 말했다. 그런데 아직도 배울 게 많아요. 전 학생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많아요. 그들에게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교육현장은 공연을 하는 순간이에요. 가르친다는 것은 제가 가진 기운을 제 학생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애기 때부터 그렇게 배웠어요. 위대한 선생님으로부터 그 기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예술세계에서의 마지막 관문이에요.” 서양음악은 2박, 4박 등으로 일정한 데 반해 사물놀이는 다양한 혼합박으로 돼 있어 신명을 돋운다는 것이다. 가락이라고 함은 선율이 있다는 뜻이에요. 하나하나하나하나둘셋, 하나둘하나둘하나둘셋넷, 하나하나… 이런 식으로 다양한 박자가 섞여 있어요. 리듬이 길죠. 이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문화적 미학이이에요. 또 에너지의 철학이고요.
서양사람들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면서 어깨춤이 절로 나는 이 소리에 ‘악’ 하는 거예요. 이런 우리의 전통음악이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세상사람들이 우리의 전통음악을 공부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들어나갈 때 진정한 의미의 한류가 존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속에 우리 민족만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마음과 색깔, 그리고 철학이 있기 때문이죠.” 그가 30년 전부터 도모해온 일이기도 하다. 명문대학교에서는 다 사물놀이를 하고 있어요. 다만 한국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그곳 현지인들이 하고 있죠. 제가 미국에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사물놀이를 가르치고 악기를 줬거든요. 하지만 태권도가 그랬듯 이제는 우리 사범들을 세계 곳곳에 보내야 해요. 우리나라 학교 음악실마다 피아노가 있듯 언젠가 세계의 음악실마다 우리의 전통 악기가 놓일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우리 정부도 문화수출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이를 도모해야 해요.”
그는 몇 시간동안 두드리고 뛰고 뱅글뱅글 돌면서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내공이 쌓였기 때문인지 60을 바라보는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활력이 넘친다.
평론가들은 그를 가리켜 “활활 타오르는 둥그런 불덩어리 속에 앉아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걸출한 광대 김덕수씨. 그가 지난해 자서전, ‘신명으로 세상을 두드리다’(김영사)를 통해 한 말은 광대 김덕수씨의 삶과 전통예술에 대한 생각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기본을 세우되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 지난 50년간 길이 집이고 무대였다. 핵심은 결국 행위다. 난장판이든 카네기홀이든 올림픽 초청 무대든 평양 한복판이든 세계 각지의 어느 민족 문화권에 갔든 길은 내 집이었고, 무대였다. 나는 대한민국만이 가진 독특한 에너지를 장구로 춤으로 꽹과리로 알렸다. 나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기운을 알리는 일로 행복을 느꼈고, 자긍심을 가졌다.”
<글·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사진·김세구 기자 k39@kyunghyang.com> - 2008 03/18, 경향, 뉴스메이커 766호 [아주 특별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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