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인언견언론에 따라 실제 불교미술을 감상해보자.
석굴암 본존불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다.
그 당시 필자에게 무슨 심미안이 있었겠는가.
사춘기의 호기심으로, 혹은 수학여행의 들뜸으로
교과서에서 본 ‘조상의 빛나는 업적’을 눈으로 확인하자는 심사 이상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막상 본존불과 마주쳤을 때,
그런 얼치기 문외한이 보더라도 그것은 왠지 모를 감동과 충격에 휩싸이게 하였다.
나도 모르게 거룩함에 압도당하여 오랜 동안 멍 하니 서 있었다.
그 감동은 세포에 간직되어 기억되다가 다시 본존불 앞에 설 때마다,
아니면 그 사진을 볼 때마다 감동의 불씨를 지핀다.
어른이 되어 심미안이 깊어진 대신 불상이 멀어졌다.
다시 본존불 앞에 섰을 땐 두터운 유리벽이 막아섰다.
그 바람에 오늘 쓰는 글은 본존불을 다시 대하거나 사진으로 보며,
그때의 기억들의 편린들을 퍼즐처럼 짜 맞추면서 이루어졌다.
당시에 감동은 필자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사이에 학생 틈을 비집고 선 일본인으로 보이는 한 관광객도 감동에 휩싸여
거의 무아의 경지에 오른 듯 아무 소리도 하지 않은 채 한참 서 있다가
경건함에 휩싸여 이내 합장을 하며 수도 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그 일본인 때문에 어린 학생은 “저것이 그 정도로 위대한가?”라고 생각하며
그 자의 감동에 이르기 위해 오랜 동안 본존불을 바라보고 또 보았지만
그런 희열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그 앞에 섰을 때, 불교를 알지 못하는 서양인도 간혹 그런 표정을 지었다.
본존불은 불교 경전의 한 구절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불법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게 하는 힘이 있다.
본존불을 만나고 토함산을 내려가는 이의 가슴엔
어느새 연기라든가, 지혜라든가, 자비라든가 그들이 주워들은 불교의 용어들이
꼴을 갖추어 각인이 된다.
이처럼, 불교 미술의 정수인 석굴암 앞에 서면 불상이 불법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의 논리대로 진여 실체에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는 석굴암의 본존불을 방편으로 삼아 불법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방편(方便)은 수단이나 임시방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방편에는 진여실상이 전제되어 있다. 대기설법(對機說法)과 응병여약(應病與藥),
곧 석가모니처럼 온전히 깨달은 이가 병에 맞추어 약을 주듯
중생의 근기에 적합하게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깨달음의 차원에서 보면 방편이 곧 진리이다.
석굴암의 구조에 대해선 학계에 여러 설이 있으나 필자는
화엄만다라라(華嚴曼茶羅)라는 당시에 풍미한 세계관을 구조적으로 반영한 결과로 본다.
신라는 불교의 신주(神呪) 신앙을 매개로
기존의 신라적 샤머니즘이라 할 풍류도(風流道)와 불교를 융합하여
풍류만다라(風流曼茶羅)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성덕왕(聖德王) 대에 와서 이를 화엄(華嚴)철학으로 체계화하여
화엄만다라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다.
성덕왕대에서 경덕왕에 이르는 화엄만다라 시대는
흔히 에밀레종으로 칭하는 성덕대왕 신종이 주조되고, 석굴암, 불국사가 조성되며,
향가 가운데 가장 문학성이 빼어난 ‘제망매가’와 ‘찬기파랑가’가 창작되고 향유되던,
그야말로 한국 문화의 황금기다.
화엄만다라와 석굴암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장의 주제에서 벗어나므로
다른 장에서 상세히 말하고자 한다.
화엄만다라 세계관의 구조적 반영
주지하듯 석굴암 본존불은 석가가 보리수 밑에서 무상정각등(無上正等覺)을 이루어
악마를 물리치고 땅을 가리킨 항마촉지인을 한 모습이다.
그때 깨달은 지혜를 설한 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이다.
미술사적으로는 간다라 양식에 마투라양식과 굽타양식이 결합되고
여기에 신라인의 창조적 불교 수용과 예술성이 더해져
최고 경지의 원융미(圓融美)를 이루고 있다.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모든 부처를 통섭하는 것이 화엄의 부처관이다.
석굴암을 보면
전실에 팔부신장(八部神將) 8구,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 2구, 사천왕상 4구가 있으며,
후실에 본존불을 가운데 놓고
천부상(天部像) 2구, 보살상 3구, 십대제자상(十代弟子像) 10구, 감실좌상 (龕室坐像) 10구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다.
본존불을 중심으로 범천, 제석천을 보살형으로 변형시키고
십일면관음보살을 정면관으로 중앙 본존 뒤에 바로 뒤에 배치하여
양자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회중(會衆)은 다만 회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요,
석가여래가 지닌 뛰어난 속성과 방편을 구상화하여 석가를 장엄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여러 상들에서 석가를 보고, 석가상에서 여러 상들을 읽어낼 수 있다.
즉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라는 일즉다(一卽多)요 다즉일(多卽一)인
불교의 원리를 석굴암은 나타내 보인 것이다.(강우방,『법공과 장엄』)
우리는 석굴암을 통해 화엄의 진리 가운데 한 자락을 스치듯 맛보는 것이다.
살인이자 구원인 본존의 미소
전실에서 반지름 12자의 원인 후실을 바라보면 본존불이 후실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본존상의 높이는 좌대를 합쳐서 17자이다.
170센티미터의 키를 가진 참배자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본존불은 대좌대와의 높이 비례가 1 : 0.5로 위압감이라기보다는
당당하고 위엄 넘치는 미(美)다.(문명대, 「석굴암 불상 조각의 양식사적 연구」)
언뜻 보기에도 상체와 하체, 얼굴과 어깨의 크기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를 과학적으로 측량한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의 측량에 의하면,
무릎과 무릎 사이는 8.8자, 어깨의 너비는 6.6자, 가슴너비 4.4자, 얼굴 폭 2.2자이며,
양 무릎 8.8자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을 그리면 꼭지점은 턱에 닿는다.
(요네다 미요지, 「경주 석굴암의 조형계획」)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착의를 하여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데,
어깨는 둥글고 가슴은 알맞게 넓고 살결이 고와 부드러우면서도 당당하다.
허리는 잘록하여 늘씬한 세련미를 더하고 가부좌를 튼 다리는 안정감 있게 바탕을 이룬다.
그 위로 항마촉지인을 한 팔은 좌우가 변화를 주면서 동작을 구성해 박진감과 역동감을 준다.
가사의 선은 어깨 왼 편에서 오른 편 가슴 아래 부분으로 만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려
경쾌하면서도 원만한 곡선미를 더한다.
곧추 세운 등은 기품 있는 자세를 형성하고 매초롬한 피부는 부드러운 건강미를 형성한다.
심리적으로 가장 평안한 여백을 형성하며 어깨 위 상호를 감싸고 있는 두광(頭光)에서는
한없이 진리의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두광은 본존상과 분리되어 본당의 벽에 새겨졌는데 자세히 보면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좌우는 224.2㎝임에 반하여 상하는 228.2㎝로 아래위가 긴 타원형이다.
실제는 타원이지만 참배객의 자리에서 보면 원형으로 보인다.
이것은 시선의 원근을 고려하여 먼 것은 세밀히 새기고 가까운 것은 드물게 새긴 것이다.
회화의 원소근대(遠小近大)의 원근법을 반대로 처리함으로써
시각 상 착각을 피하고자 한 것인 만큼 그 용의가 얼마나 주도하였나 하는 것을
능히 엿볼 수 있다.(리여성, 「석굴암 조각과 사실주의」)
다가가서 서면, 상호는 얼굴이 긴장감 있게 팽팽하면서도 부드럽다.
눈썹은 기운차면서도 맵시 있게 뻗어나갔고,
반쯤 뜬 눈은 살짝 치켜 올라 적멸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얼굴 전체와 균형을 이루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맞춤한 코는
중앙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날렵하게 흘러내렸고,
꽉 다문 입은 엄숙하기만 한데 자세히 보면 살짝 미소를 띠어
저 높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순간에서나 번져 나올 수 있는 ‘빈틈’과 ‘여유’를 읽게 한다.
요새 언론에서 배우나 유명인의 ‘살인미소’를 말하지만,
본존불의 이 미소야말로 살인미소의 지존이다.
아니, 지극한 깨달음이 얼굴의 수십만 개 근육을 움직여 빚어내 모두를 감동으로 ‘죽이고’
그 황홀경에서 벗어나면 모두를 살려내는 지혜를 저절로 떠올리게 하는
‘살인인 동시에 구원인 미소’다.
오른팔은 기운차게 뻗어내려 대지를 가리키고
왼팔은 허리에서 틀어 안정감 있게 몸을 받치며 하늘을 향하고 있다.
팔과 손가락, 발 모두 적당히 살이 올라 미끈하다.
더욱 다가가 들여다보면 손톱과 마디 사이의 주름까지 새긴 정교함에 탄성을 지르게 된다.
정녕 돌에 새긴 것인데 피가 돌고 기가 흐르는 듯하다.
차가운 돌에 새긴 것인데 사람 이상의 온기와 살결의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고
0.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필자를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감동시키는 부분은 살짝 들어 올린 새끼손가락이다.
미륵반가상의 미소와 완벽한 균형과 조화미도 불상의 최고의 경지에 이른 표현이지만,
아무 학자도 지적하지 않았지만, 저 새끼손가락의 들어올림이야말로
석굴암 본존불을 지상 최고의 불상으로 만든 형상,
곧 본존불 불상이 형성하는 미학의 정화(精華)라고 감히 말한다.
미소로 형상화한 화엄의 높은 깨달음이
얼굴을 지나 목과 어깨를 지나 기운차게 팔을 타고 흐르다 여기에 이르러선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올렸으리라. 진공묘유(眞空妙有)!
미묘한 그 들림이 전체 불상을 움직이게 한다.
불상을 돌이 아니라 정신이 작용하고 있는 실체로 만든다.
그 순간 우주에 파문이 일고, 우리의 가슴에도 끊임없이 지혜와 감동의 밀물이 밀려온다.
역동적 새끼손가락은 미학의 정화
깨달은 순간의 영원한 실존을 묘사해서일까.
기운이 넘치면서도 부드럽고, 엄숙하면서도 자애롭다. 장엄하면서도 온화하다.
정녕 돌에 새긴 것인데 상대방을 온화하고 평안하게 하면서도
장엄한 깨달음의 세계로 깊이, 또 깊이 잠기게 한다.
이리 거룩하면서도 아름다운 불상이 또 있을까.
다시 참배자의 위치에 서면
우리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잠깐 진여실체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말과 생각으로 화엄의 진리에 다다를 수 없지만,
의어(義語)인 석굴암 본존불을 통해 그것의 한 자락을 엿볼 수는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진여실체의 지극한 한 자락일 뿐.
석굴암의 본존불을 방편으로 삼아 불법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지만,
그 깨달음조차 해체할 때 진여 실체에 이른다.
“영원의 실존, 또 지극한 깨달음에서 피어나는 그 미소,
그 기운 팔을 타고 흘러선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들어 올리자.
요동치는 불상, 우주에 이는 파문,/내 가슴엔 밀물.”
-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법보신문, 940호, 불교미학에세이, 2008-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