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만 필자의 주변에는 남의 사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그 대상이 누구나 아는 공인(公人)일 경우에 관심도는 더욱 높아진다.
필자도 여기에서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고 연예인 누구가 누구와 결혼했다든지 혹은 이혼했다든지
아니면 전혀 근거가 없이 유포되는 연예인 결혼설에 관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필자는 그냥 남이 쓴 일기를 통하여 그 사람의 사생활을 엿보기도 하고
때로는 음미(?)하기도 할 뿐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될 만큼 관음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기만큼 한 사람의 사생활을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요사이 사람들이 쓴 일기도 재미있지만, 필자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쓴 일기를 매우 좋아한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당시 사람들의 생생한 모습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심히 보지 않아서 그렇지 ‘일기’가 국보 · 보물인 경우가 꽤나 많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난중일기(국보 제76호)를 포함하여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일기만 9종이 된다.
이 가운데 당시 생활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는 일기는 단연 미암일기와 쇄미록일 것이다.
미암일기는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유희춘(1513~1577)이 쓴 일기로
선조 즉위년인 1567년부터 선조 10년(1577)까지 약 11년에 걸쳐
당시 조정에서 일어났던 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보물 1096호, 쇄미록
반면 쇄미록의 경우 오희문(1539~1631)이라는 선비가
지방에 있는 친척방문과 노비관리 및 신공수취(身貢收取)를 위해
1591년 11월 27일에 서울을 떠나 충청 · 전라지방을 순회하다가
다음해 4월 장수현에서 임진왜란 발발소식을 듣고 귀가하지 못한 채 3개월간 산중에 들어가 피난하고,
그 후 강원도로 피난했던 가족을 만나 홍주 · 임천 · 평강 등지로 전전하면서 기록한 일기이다.
오희문은 인조조에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吳允謙)의 아버지이고,
병자호란 때 절의에 죽은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인 오달제(吳達濟)의 할아버지이다.
서명(書名)을 쇄미록(瑣尾錄)이라고 한 것은
《시경》 패풍(邶風) 모구(旄丘)의 “자잘하고 자잘스런 유리하는 사람이네.[瑣兮尾兮 遊離之子]”를
인용하여 제목으로 삼은 것이다. '유리기(流離記)' 곧 피난록(避亂錄)이란 뜻이며,
이 일기 마지막에 “이후부터의 일기는 용지(用紙)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 ”고 한 데서 이 일기의 목적이 피난중의 사실을 기록하려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오희문이 난을 겪으면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다.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내용을 보면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금산 · 무주 · 용담 · 진안 · 웅현 · 전주 등지의 전황과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의 용인 패전, 의병장 곽재우 · 김면 · 고경명 · 김덕령 · 조헌 · 심수경 등의
활약상 그리고 왜군의 잔인한 살인 · 방화 · 약탈행위,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황폐화된 서울의 상황과 전란에 따르는 피난민들의 사태,
군대징발과 군량조달로 인한 백성들의 도산, 유행병과 기아로 인한 사자의 속출 등
민중의 생활상이 기록되었다.
또한 공물의 징수, 군량의 수송, 환상(還上)의 감산(減産) 등 농민의 경제생활에 관한 실제문제들과
노비의 신공과 매매, 소송입안 등 노비제도에 관한 자료와 각지의 산물과 풍속에 관한 기사도 실려 있다.
그리고 과거제도에 관한 구체적 내용과
임천에 있을 때 홍산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에 관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문화재로 지정받기 위해서는 역사적 · 예술적 · 학술적 가치가 커야 하는데
이들 일기는 도자기나 그림처럼 예술적 가치가 아닌 자료적 가치로 인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각종 기록 자료들, 예를 들면 기록이 적은 조선시대 이전의 건립된 비(碑)들이
자료적 가치로 인하여 지정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미암일기나 쇄미록을 통하여 사람들의 어떠한 사생활을 엿볼 수 있을까.
미암일기와 쇄미록은 모두 번역되어 있어서 누구나 읽어 볼 수 있지만,
특히 미암일기의 경우
그 내용을 관직생활, 살람살이, 나들이, 재산증식, 부부갈등, 노후생활 등으로 재구성한 책이
몇 년 전에 출간되어 많은 사람들이 읽은 적이 있었다.
이 책은 각 구성 항목만으로도 당시 생활 중심으로 쓴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부부갈등’은 일기가 아니면 재구성하기 어려운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해보면, 미암이 해남에 계집종 신분인 첩을 두었는데,
첩의 이름은 방굿덕이었다고 한다. 미암보다는 15살 아래이며
미암이 함경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첩이 되었다. 이 둘 사이에는 4명의 딸이 있으며,
첩의 역할은 미암이 전라도로 내려오면 옆에서 시중을 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 첩으로 인하여 부부간에 다투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암이 전라도 감사로 있을 때 33살의 옥경아라는 기생을 좋아했다는 내용도 소개되고 있다.
쇄미록의 경우에는
당시 지배층의 대표적인 겨울 스포츠인 매사냥의 모습을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어 주목된다.
매사냥을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만큼 꿩을 잡았는지에 대해서
일기 곳곳에 기록되어 있어 16세기 매사냥의 구체적인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틈만 나면 일기들을 뒤적이고 있다.
그리고 비록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묵재 이문건(1495~1567)이
경북 성주에 귀양 가서 쓴 묵재일기도 이들 일기에 못지않다는 점도 부기해 둔다.
필자는 이 일기를 통하여 당시 지방 장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을 가지고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일반인들이 조선시대 일기를 읽기는 상당히 어려운 점이 있다.
현재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국가기록유산 사이트에 접속하면 지정된 일기들을 볼 수 있지만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
필자가 이전에 이 사이트를 만드는 데에 참여하였는데
한글로 된 내용을 보여줄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워 번역된 내용을
원문과 아울러 소개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다가 그만 다른 부서로 옮기는 바람에
더 이상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는 한글로 번역된 일기를 인터넷을 통하여
집에서도 편안하고 쉽게 볼 날을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오늘도 일기에서 재미있는 내용을 찾아본다.
- 2008-03-03 문화재청, 문화유산e야기
- 국립문화재연구소 예능민속연구실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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