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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金生)의 글씨 - 강진 백련사

Gijuzzang Dream 2008. 2. 15. 01:14

 

 

 

 

 백련사의 김생(金生) 글씨에 대한 선조들의 감정  

 


 

전라남도 강진에 소재한 백련사에는

해동의 서성(書聖)이라고 일컬어지는 통일신라 김생(金生, 711~790)의 필적이 전해지고 있다.

1200여 년 전의 필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해오는 얘기는 자못 진지하다.

승려가 루 남쪽의 돌계단을 가리키며

“이 역시 신라 시대에 만든 것으로 잡석으로 쌓은 것인데 면이 깎은 것 같습니다.

대개 절에 삼절(三絶)이 있다고 하는데

김생의 글씨와 서원(西院)의 동백나무가 이것(돌 계단)과 합하여 셋이 됩니다.” 고 하였다.

김생,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銘> 부분, 탁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문집에 실려 있는 위 글에서

승려는 백련사의 삼절로 지금도 유명한 동백나무와 돌계단, 그리고 김생의 글씨를 꼽았다.

 

그만큼 소중하다는 것인데, 김생의 글씨가 백련사에 있다는 기록이 고려시대와 조선 초에는 보이지 않다가

조선중후기에 갑작스레 나타나기 시작하니 의아할 따름이다.

사실 조선시대에 들어서게 되면 그의 진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상황을 조선후기의 서예가인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이렇게 적었다.

우리나라 필법은 신라 김생을 근원으로 삼는다.

오늘날 그의 진적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탑본(榻本) 또한 기이하고 법이 있어 고려 이후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만덕산백련사>가 정말로 김생의 필적일까?

조선시대에는 이 현판이 과연 김생의 필적인지에 대해 여러 논란이 있어왔다.

조선시대 주자성리학의 거목인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이 편액을 본적이 있다.

때는 그가 南人과의 당쟁 속에서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1689년에 제주로 유배 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강진에 도착하였지만 바람이 거세어져 잦아들기를 기다리고자 백련사에 기거하였다.

그는 이때 만경루에 걸린 김생의 <만덕산 백련사>, 안여해가 쓴 <만경루 萬景樓>, 서역문자로 된 현판을 보았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 안노생(安魯生)의 후손인 안여해(安汝諧)와 담화를 나누었고

서역문자를 해석하여 대학자의 면모를 보여주었으나

김생 필적에 대해서는 승려의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현재의 기록으로는 그가 김생 필적이라는 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당시는 사상 논쟁이 치열하였던 때이므로, 아마도 이 같은 옛 유물이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던 듯하다.


한 세대가 흘러 18세기 전반에 이르게 되면 서서히 고증학적인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선비들은 옛 고적이나 유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은 서화 평론가답게 <만덕산백련사>에 대해 정확한 감정을 하였다.

김생, <萬德山白蓮社>, 115.6×47, 강진 백련사 소재. (불교문화재연구소 제공)


세상에 전하기로는 김생은 사찰의 건물에 제액(題額)을 하였지만 결구법이 백월비(白月碑)와 다르므로,

아마도 김생의 진적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필세가 맑고 굳세니 또한 신라와 고려 무렵의 명필이다.

이하곤의 명확한 감정과 필적에 대한 비교 분석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실 오늘날의 미술사가들도 그의 분석 방법에서 벗어나지 않은 점은 그의 뛰어난 감식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서예 양식적으로 보면 <만덕산백련사>의 어리숙한 짜임새와 머리 부분이 큰 자형 등은

김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낭공대사의 일대기를 적은 <백월비>와 어느 정도 유사하지만

글씨모양이 세로로 길고 획의 모서리가 심하게 각이 지며 획이 굵다.

 

이하곤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같은 차이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특징은 원대 설암(雪菴)의 <종춘첩(春種帖)>같은 大字 해서에서 찾을 수 있다.

설암은 중당(中唐)시대의 안진경(顔眞卿)과 북송시대의 황정견(黃庭堅)의 글씨에 바탕을 두고

독특한 大字 서풍을 일으킨 서가이다.

이 설암체는 고려 말에 유입되어 조선시대에 유행하면서 제서(題書)나 편액 글씨에 쓰여 졌다.

 

<만덕산백련사> 역시 그 같은 영향아래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다만 제작 과정에서 당시 김생의 필적이라고 전해오던 해서를 일부 참고하여 제작되었을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인 비교를 통해 편액에 대한 정확한 감정을 시도한 이하곤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당대의 서화수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만덕산백련사>를 김생의 필적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분위기는 19세기에 이르면 더더욱 강해진다.

 

아래의 글은 조선후기의 실학자인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1806년에 쓴 시이다.

문의 주련은 김생의 글씨이고

누각의 현판은 이광사가 쓴 것이니
시대가 멀어 가짜일까 의심하지만

무게 있는 그 이름 허망하지 아니하네.

설암, <春種帖>, 1296年 書, 板本 冊, 개인소장


당대의 실학자였던 정약용마저 <만덕산백련사>가 김생의 필적이라고 하였으니, 19세기의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이후에는 많은 선비들이 별다른 의심 없이 이 편액을 김생의 필적으로 보게 된다.

이 현상은 당시 거세게 일었던 문헌고증학이라는 바람으로 인해 거의 모든 선비들이 옛 필적의 수집에 열광하던 터라,

감식과 애호를 혼동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우리는 <만덕산백련사>와 관련된 옛 기록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된다.

너무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감정에 있어서 지나친 애호는 무관심보다 해가 될 때가 있다.

감정과 애호는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하며, 감정에 임하는 자는 혹리(酷吏)와 같은 눈에 차디찬 가슴을 지녀야 한다.
- 문화재청 인천항문화재감정관실 김현권 감정위원

- 문화재칼럼 / 게시일 2008-02-04